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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6년 12월 11일 주일낮설교 (복된 만남의 조건)

2016년 12월 11일 주일낮설교 (복된 만남의 조건)

복된 만남의 조건

12. 11, 2016

本文:마가복음10:35-45

:

 

2015년 작년 한 해 동안 대한민국에서는 302.8천 쌍이 결혼을 하고 109.2천 쌍이 이혼을 하였다고 하니 거의 1/3이 이혼을 한 샘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였으나 결국은 1/3이 돌아섰으니 그들의 만남은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만남이란 시작과 끝이 같지 못한 채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주고 끝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좋은 만남을 이루어 내기 위해 만남의 조건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그 조건이라는 게 다 다르겠지만 공통된 가장 중요한 조건을 정리해 보면 거의 서너 가지로 요약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조건들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좋은 만남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보면 그 방도가 무엇인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찾아가 간절히 부탁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정중히 부탁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왕좌에 오르게 되었을 때 하나는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왼편에 앉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완곡하게 거절하시면서 그 자리는 그 자리에 합당한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다른 제자들은 이 두 사람에 대해 격렬한 분노를 터트렸습니다. 자기들도 거기에 대한 욕망이 있었는데 그 두 사람들이 조용히 예수님을 찾아가 독식하려고 했다는 것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은 그들을 다 불러 모으시고 조용히 훈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너희들이 요구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권세와 출세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우리들이 추구하는 하늘나라는 그러한 곳이 아니란다. 오히려 그렇게 크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게 되고 낮아지려는 사람들은 크게 되는 것이 하늘나라 원칙이란다. 내가 이 세상에 왜 왔는지 아느냐, 나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목숨까지라도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어주려고 왔느니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좋은 만남과 복된 만남의 조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함께 배우면서 바른 가치관과 믿음으로 우리들의 삶을 보다 더 성숙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복된 만남의 조건

예수님과 제자들은 참으로 귀하게 만나 3년이라는 세월 동안 함께 동고동락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 같았지만 그들은 불행하게도 복된 만남의 결실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잡히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되자 한결 같이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26:55-56)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21:2-3)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라는 말씀들과 같이 말입니다. 주님과 제자들과의 만남은 이렇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시 찾아 성령으로 붙들어 매지 않았다면 이렇게 영원히 그들의 만남은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왜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요? 만남의 조건이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된 만남에는 조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땅의 그 누구도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 복된 만남을 유지해 갈 수가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욕망이란 게 잔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조건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무슨 조건이 충족되어야 진정한 만남의 열매가 축복으로 연결될 수가 있을까요?

복된 만남의 조건은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생각이 있고 마음이 있고 가치관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것이 서로에게 공통분모가 되지 못한다면 그 만남은 결코 끝까지 가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혼의 조건으로 거의 대부분이, 남자는 능력 즉 돈이고 여자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이 조건이 맞으면 일단 끌리게 되고 장래를 약속하게 됩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마음과 생각과 가치관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소원했던 아름다운 여자도, 돈이 많은 남자도 결국은 자신들의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온 몸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헤어지고 이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예쁜 여자를 왜 싫어하게 되었을까? 그렇게 돈 많은 남자랑 왜 함께 살지 못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만남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마음과 생각과 가치관이 통해야만 행복한 만남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이렇게도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비밀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의 사랑을 요구하시되 마음을 다하는 사랑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네 재물을 다하고 몸을 다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마음과 성품과 힘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진정한 만남을 끝까지 붙잡아 매어 주는 힘은 결코 외형적인 아름다움이나 돈이나 세상적인 출세가 아닙니다. 사람을 붙잡아 매어 행복의 길로 당당하게 나아가게 하는 능력은 내면적인 마음이요 성품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도치법으로 기록된 문장입니다. 원래는,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을 끝까지 유지해 가는 최상의 길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결코 예수님과 함께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끝까지 함께 갈 수가 있겠습니까?

눈 덮인 깊은 산길을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다행히도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목사님과 스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스님이 무엇엔가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깜짝 놀란 목사님이 괜찮습니까?” 하고 일으켜 세우려다가 또 다시 걸려 넘어졌습니다. 도대체 눈 속에 무엇이 있는가, 하고 두 사람이 눈을 헤치고 보니 거기에는 사람이 한 사람 쓰러져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지친 사람이 쓰러졌고 그 위에 계속 눈이 내려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그 사람에게 아직도 의식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목사님이 스님에게 다급히 요청했습니다. “스님, 이 사람을 우리 함께 매고 주막까지 가십시다. 이대로 두면 죽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다 그 사람의 업보요. 그 사람의 지나온 삶이 이곳까지인가 보오. 혼자서도 이 엄청난 눈길을 헤치고 갈 수 없거늘 우리들이 어떻게 그 사람까지 매고 갈 수 있단 말이오.” 하고는 그냥 혼자 횅하니 가벼렸습니다. 목사님은 참아 그 사람을 거기에 두고 갈 수가 없어 눈 위에 끌다시피 낑낑대며 땀을 뻘뻘 흘리며 한 걸음 두 걸음 주막이 나타날 때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거의 주막이 보이는 곳에서 목사님은 또 다시 무엇엔가 걸려 넘어졌습니다. 가만히 눈을 헤치고 보니 혼자서 횅하니 먼저 가버렸던 스님이었습니다. 눈길을 헤치고 가다가 눈보라와 추위를 이기지 못한 채 쓰러져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낯선 사람을 이끌고 오너라 땀을 흘리고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일심으로 결국은 주막까지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좋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마음이 통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함께 하고 아름답고 복된 만남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이처럼 마음이 맞아야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마음을 맞추어 복된 일을 하게 되면 스스로의 삶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요 둘을 하나로 묶어 주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복된 만남의 조건은 목표가 같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 한 사람도 목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한국 방송 중에는 신동엽과 이영자가 이끄는 안녕하십니까?”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고 해결점을 함께 모색하는 그런 대로 괜찮은 프로그램입니다. 대부분 부부들이 함께 나와 고민을 털어 놓고 객관적으로 방청객으로부터 솔루션을 찾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함께 가자고 결혼은 해 놓고 가는 길과 목표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고민이 되고 문제가 되고 급기야는 만남이 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서로의 마음과 생각도 같아야 하겠지만 그 마음과 생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는 더욱 중요합니다. 인생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것은 두 만남의 가장 중요한 공통분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다르다면 결코 끝까지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것이 아주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들이 된 그들의 목표는 이스라엘 나라가 로마로부터 독립이 되고 엄청난 능력을 가진 예수님이 그 나라의 왕이 되신다면 그들은 우의정 좌의정이 되겠구나 하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약삭빠른 야고보와 요한이 먼저 예수님을 찾아가 이것을 구하였고 나중에 나머지 제자들이 이것을 알고 폭발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목표는 너무나도 분명했습니다. 오로지 그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빽을 믿고 한 자리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복음서의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19:27-29)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10:35-37)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상의 말씀들은 한결 같이 예수님과 목표가 다른 제자들의 모습들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는 것이었고 예수님은 그 반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과 뜻이 다른 예수님께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연약하심으로 악당들에게 잡혀 십자가에까지 끌려가시게 되자 더 이상의 소망이 없는 줄 알고 뿔뿔이 그들의 길로 가벼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서도 똑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만남도 서로의 길이 다르고 목표가 다르면 결코 끝까지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만남의 목표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처음으로 아프리카 기니에 단독선교사로 파송했던 김진봉, 정순영선교사님은 이처럼 목표를 같이 한 귀한 만남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함께 오지로 나가 선교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순영선교사님은 대한민국 굴지의 재벌 인 벽산그룹의 외손녀였습니다. 반면 김진봉선교사님은 가난한 목사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목표로 선교훈련원에서 만나 함께 하나님의 그 크신 뜻을 이루어 드리자고 다짐하였습니다. 정순영선교사님의 부모님들이 그 꿈을 이루라고 허락해 주실 리 만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둘이서 조용히 외롭고 초라하지만 진지한 결혼식을 올리고 선교지로 떠났습니다. 지금까지 그분들은 가장 아름답게 가장 복된 만남의 역사를 함께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총신신대원 75회 동기동창이었던 김 모 목사는 부부가 함께 미국까지 왔으나 사모님이 세상으로 향하여 돈을 벌어 잘 사는데 목표를 두고 돈을 벌지 못하는 남편 목사를 원망했습니다. 자기는 가난한 목사의 생활이 너무나도 지겹다며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미국 생활을 헤쳐 나갔습니다. 그들은 끝내 결혼까지 했던 아름다운 만남을 서로 다른 목표로 인해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 친구는 제대로 된 목회조차 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만남에 있어서 같은 목표는 이렇게도 중요한 결과를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복된 만남의 조건은 서로에게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서로 만나는 것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사랑 되게 하는 것은 상대가 자신의 삶에 유익을 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은 자신을 희생해서 상대를 행복하게 해 준다는 등의 플라토닉 사랑은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시작했던 사랑이라도 그 결과가 자신의 삶에 유익은 커녕 해가 된다면 가차 없이 그 만남은 끝이 나고 맙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이는 비록 예수님께서 친히 뽑으셨고 하늘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3년씩이나 훈련 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과 유익에 반하게 되면 인정사정없이 갈라서고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대한민국의 박근혜대통령 탄핵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던 현상입니다. 같은 한나라당 의원이었지만 앞날에 자신들에게 유익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되면 야당과 손잡고 자기들이 섬겼던 대통령도 순간에 버리고 떠나는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현주소입니다. 오로지 자신에게 유익이 있어야만 만남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마지막 때 인간의 불문율처럼 정확하게 나타나는 서글픈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폐일언하고 복된 만남을 유지해 가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상대방에게 유익과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망각하고 옛 추억에 젖어 우리는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위해 왔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잘 될 것이라는 상상 속에 빠져 있다가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다 끝나고 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오늘날의 현상을 미리 내다보시고 이에 대한 진리 하나를 남겨 두셨습니다.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고 말입니다. 바로 이 한 말씀 속에 만남을 어떻게 유지하고 복되게 만들어 갈 수 있는가에 대한 모든 해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먼저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고 꿈을 주고 기쁨을 주어야만 그 관계가 유지되고 그 만남이 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이와 같은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또한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몸소 실천해 주시면서 만남을 회복하시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입니다.

(21:4-9)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 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이 말씀이 주는 의미와 교훈을 우리는 잘 깨달아야 합니다. 이미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원점으로 되돌아가 물고기나 잡고 있었습니다. 이는 엄연한 배신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씩이나 데리고 다니시며 가르쳐 주시고 보여주시고 훈련하셨건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내려가 있는 동안 그 삼일조차도 기다리지 못하고 원점으로 되돌아가 물고기나 잡고 있었으니 이보다 더 큰 실망과 배신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빈 배를 만선으로 채워주시고 밤새도록 허기진 그들에게 떡과 생선을 구워 아침 조반을 마련하고 그들을 먹이셨던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만남의 열매를 맺히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복된 만남은 간섭이나 잔소리나 교훈이나 가르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된 만남은 상대방에게 풍성한 유익을 만들어 주면 언제나 유지 되는 것임을 우리 주님께서 친히 이처럼 큰 사랑으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만남은 사는 날 동안 지속해 가야 할 영원한 숙제입니다. 이 만남이 행복과 사랑으로 가득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나의 유익보다 상대의 유익을 먼저 챙길 줄 아는 이 기본훈련부터 바로 해야 합니다. 자동차나 컴퓨터나 날마다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 폰이나 다 정하게 다루고 귀하게 여기면 오래 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다루고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상대를 이용한다면 그 만남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의 유익보다는 상대의 유익을 더 챙기는 작은 마음부터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먼 인생 여정의 목표를 함께 이루어 갈 수 있는 멋들어진 만남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벌써 성탄의 달 12월의 중순에 와 있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세월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들을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떠나야 하는 순간까지 밀어붙일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우리들의 삶이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고 멋들어질 수 있도록 복된 만남의 역사를 잘 유지해 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교훈을 삼고 지혜를 얻어 마음을 함께 하는 따뜻한 사랑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가장 감동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외형적인 어떤 물질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미래지향적인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목표가 같을 때 의합투기하게 되고 더욱 더 만남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엉뚱하거나 자기중심적인 목표를 지양하고 서로에게 유익을 줄 수 있고 미래지향적인 아름다운 목표를 설정하고 함께 달려 갈 수 있다면 인생은 한번 쯤 살아볼 만한 가치 있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만남의 아름다운 지속은 서로에게 유익을 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불행하게도 타락한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본능을 뛰어 넘어 언제나 상대방의 유익을 먼저 챙길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유익이 없는 만남을 지속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대의 유익을 먼저 챙기면 결국 자신에게도 풍성한 유익이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을 미국 사람들은 Give & Take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것은 성경적인 사상이기도 합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성탄입니다. 인색한 마음과 자기중심적인 가치를 과감하게 내어버리고 하나님께도 이웃들에게도 유익을 주는 삶을 이 계절에 회복할 수 있다면 최상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로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섬기시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이와 같은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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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20161211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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