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8일 주일낮설교 (복된 만남의 특징)
- Details
-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8 December 2016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 Hits: 1355
복된 만남의 특징
12. 18, 2016
本文:디모데후서1:15-18
說敎:崔 仁 根 牧師
겨울이 오면 기러기들이 대 이동을 합니다. 추운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 서식지를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기러기들의 이동을 통해 우리들이 배워야 할 몇 가지 대목이 있습니다. 서로 협력하고 함께 하는 정신입니다. 기러기들은 이동을 할 때 반드시 V자를 형성하고 날라 갑니다. 이렇게 하면 먼 여행길에 힘을 70%나 절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작은 새들이 에너지를 절약하는 방법을 알았을까요? 뿐만 아니라 맨 앞에 가는 새는 다른 새들보다 공기 저항을 더 많이 받아 쉬 피곤해 짐으로 교대로 앞에서 난다는 사실과 그들 중에 누군가가 아프거나 다치면 두 세 마리 새들이 함께 내려 앉아 회복과 치료를 도운 다음 같이 목적지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라고 하는 교회와 가정과 직장과 사업장에서 이와 같이 함께 하는 정신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는 하늘의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친히 모범을 보여 주신 귀한 삶의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창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엡4:4-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진정한 만남은 서로 협력하고 함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겪게 되는 가장 안타까운 모습은 서로 협력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교회에 다니는 신앙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서로 얽히고 섞이어 함께 하고 협력할 줄 모른다면 결코 아름답고 복된 만남을 이루어 갈 수 없습니다. 결국은 외톨이가 되고 왕따를 당하고 스스로 몸을 숨기고 비참하게 영육이 병들어 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함께 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시기 위해 혈족보다 더 귀하게 영적인 관계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마12:46-50)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실로 파격이요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혈연을 초월한 신앙관계를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된 만남의 특징
예수님은 결코 혈연의 가족을 무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더 성숙시켜 협력하고 함께하는 중요성을 이처럼 강조하신 것입니다. 함께 하지 못하는 만남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고 사랑하는 것은 “함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는 만남은 서로에게 고통일 뿐입니다. 원래 “함께”라는 말은 헬라 원문에 사게이네이(σαγηνη)인데 이는 고기 잡을 때 그물을 치는 경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배와 배 사이에 그물을 끼고 물고기를 잡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배와 배가 협력하지 않으면 결코 이와 같은 예망을 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도 좋은 사람들이 만나 인생을 함께 살아가야 풍성한 열매를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만남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특징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함께하는 아름다운 만남의 특징이 무엇인지 함께 공부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들을 귀를 열고 풍성한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복된 만남의 특징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외롭고 힘든 인생 여정을 걸었던 순례자였습니다. 그는 가족도 없었고 생사고락을 함께 할 절친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복음을 온 땅에 전하기 위해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정처 없이 그렇게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매도 많이 맞고 배척도 많이 받았으며 때로는 죽을 뻔 한 위험도 숱하게 겪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삶의 위로와 주님의 뜻을 잘 이루어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와 같은 좋은 만남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마감하면서 그와 같은 소종한 사람들을 일일이 열거해 두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쓰여졌습니다. 그 중에 또 한 사람 오네시보로를 잊지 못한 채 칭찬하며 성경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에베소교회의 연세가 드신 성도로서 사도 바울을 많이 돕고 위로했던 인물입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을 때 그곳까지도 찾아가서 위로하고 도와주었으므로 사도 바울이 잊지 못하고 그의 수제자 디모데에게 그의 사랑을 소개해 주고 섬기도록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네시보로를 만나 어떠한 도움을 받았으며 어떠한 관계로 두 사람의 만남이 유지되었는지를 간략하면서도 분명하게 기록해 둔 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오네시보로를 만나 자신이 크게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딤후1:16)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사도 바울은 오네시보로를 만나 유쾌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그는 자주 나에게 용기를 돋우어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유쾌하게 되고 서로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그 만남은 최상의 만남이라는 뜻입니다. 과연 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본 받고 진정한 만남의 역사를 어떻게 이루어야 하겠는지에 대한 해답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서로 만나 유쾌하게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만나고 나서 용기가 나고 신이 나고 뭔가가 잘 될 것만 같은 그런 감정이 솟아 올라야 합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놀라운 만남의 역사를 서로에게 만들어 주고 있는지 재확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행여 언짢고 불안하고 걱정되며 신경이 곤두서고 짜증이 나는 만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한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은 환경지배적인 존재라 가장 가까이서 만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모두가 다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만나는 사람에 의해 그 감정이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문학적으로는 전이감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만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들의 하루 생활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만남은 이처럼 상대방을 유쾌하고 하고 용기를 줄 수 있는 그런 만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외롭고 힘든 사역을 감당해 나가면서도 참으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 같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도 그는 기분 좋은 사람들을 만났었는데 그들은 사도 바울을 시원케 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고전16:17-18)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사도 바울을 시원케 하였을까요? 오늘 인용한 말씀에 약간의 힌트가 들어 있는데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고린도교회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었다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돈에 인색함이 없었고 이웃들의 어려움을 모르는 척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가족들이 한 자리에 앉아 가족회의를 하는데 아버지가 막내가 요즘 사업을 실패해서 재기를 꿈꾸며 동분서주 하고 있는데 우리들이 십시일반 좀 도와야 하지 않겠나? 하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을 때 둘째 아들이 일어나 “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막내의 사업자금은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고 하였다면 그 둘째는 아버지와 걱정하는 온 가족들의 마음을 시원케 한 것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처럼 돈에 인색함이 없고 이웃의 어려움을 자신의 어려움처럼 함께 걱정하고 걱정할 일을 해결하고 적절하게 몸과 마음과 돈과 시간을 쏟아 해결하는 사람이라면 이웃을 시원케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오네시보로와 같이 용기를 주고 마음을 유쾌하게 해 주는 사람을 만났는가 하면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같이 재물을 아끼지 아니하고 어려움을 보충해 줌으로서 바울과 고린도교회를 시원케 해 주는 귀한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면 참으로 축복이요 감사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이런 사람이 되시고 또한 이런 사람을 만나시기를 축복 드립니다.
길자연목사님이 시애틀 연합집회에 오서서 한 가지 간증을 주셨는데 신림동이라는 가난한 곳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너무나도 재정적으로 힘이 들고 어려워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기를, “하나님, 나에게도 돈 많은 성도님들을 만나게 해 주셔서 최소한 주님의 일 하면서 돈 때문에 신경 쓰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매달렸더니 더니 진짜로 돈 많은 성도들을 보내주셔서 평생에 돈 걱정 하지 않고 목회를 잘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면 용기도 나고 유쾌하기도 하고 또한 마음이 시원케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멋진 만남을 만들어 이 세상에서 가장 다복한 인생을 살아가시게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복된 만남의 특징은 늘 자랑스러워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들이 만나는 사람들이 유명인사이고 인기가 있고 돈이 많은 부자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면 어디에 가든지 그 사람들을 자랑하게 됩니다. 가장 이런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목사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자기 교인들이 세상에서 유명하기를 바라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끊임없이 자랑을 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족들이나 성도들이나 친구들이 어려움에 빠져 있고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되면 결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누가 알세라 쉬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좋은 관계나 좋은 만남이 아닙니다. 상대가 그 어떤 상황에 빠져 있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하고 도와줄 줄 알아야 진정한 좋은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보로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까지 들어갔으나 그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감옥까지 찾아 가서 도와주고 위로해 줄 정도로 그는 바울 사랑하기를 중단 없이 계속하였던 것입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이와 같은 사랑을 잊지 못하여 성경에 기록하여 두었던 것입니다.
(딤후1:16-17)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사랑하고 교제하다가도 상대가 잘못 되기만 하면 거의가 다 실망하고 돌아서게 됩니다. 하지만 진정한 만남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 못합니다. 잘못 되었을 때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약이 되어 주고 스승이 되어 준다면 반드시 다시 회복 되고 더 좋은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욕을 하고 등을 돌리고 멀어져 가버리고 맙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을 한 번 보십시오. 백성들이 뽑아 놓은 대통령을 몇 가지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하루아침에 옆집 아줌마 욕하듯이 대놓고 저주하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들춰내서 욕을 하며 비난하고 등을 돌리고 있지 않습니까? 국민성과 인간성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는 예수님이라도 버티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한 순간에 일국의 대통령이 온 국민들과 전 세계 앞에서 초라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펜실베이니아 주 콤버랜드에 로버트 베어라는 50살 먹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메노나이트교회에 속한 신자였습니다. 한 번은 교회 감독의 뜻을 거역하였다는 죄로 메노나이트교회의 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징벌은 “회피”(Shunning)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벌을 받게 되면 해벌이 될 때까지 일정 기간 동안 그 누구도 그를 아는 체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피하고 돌아서고 상대를 할 수 없도록 하는 징벌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 벌을 받고 있는 동안 그는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몸에 살이 다 빠지고 심지어는 음성까지 변하는 엄청난 변화를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회피의 징벌이 끝나고 온 성도들이 따뜻한 손을 내 밀어 “너무나도 잘 참았습니다. 벌을 잘 견뎌 내셨습니다. 이제 새롭게 신앙생활을 같이 하십시다!” 하면서 격려하고 사랑하고 칭찬해 주자 그와 같은 비참한 몰골에서 다시 정상인으로 회복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함께 하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순간의 실수와 잘못으로 모든 사람들이 욕을 하고 비난을 하고 떠나 가버린다면 그 사람은 다시는 회복하지 못한 채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네시보로와 같이 사도 바울이 곁에서 그를 보살펴 줄 때나, 감옥으로 끌려가 갇히게 되는 때를 막론하고 한결 같이 사랑하고 섬기고 함께 하는 그런 지속적인 만남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지금 뜻이 있는 한국의 많은 소시민들은 한 때 박근혜 대통령을 대통령 만드는데 가장 앞장섰던 김무성씨나 박근혜 대통령을 졸졸 따라다니다가 결국은 국회의원까지 된 나경원씨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욱 격렬하게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는 배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런 가치관과 인격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배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관계, 복된 만남은 언제 어떤 경우에도 배신하지 아니하고 또 다른 기회를 바라보고 기다리는 그런 은근과 끈기의 신뢰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의 모든 허물을 다 아시면서도 모르시는 척 우리들을 한결 같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라면 우리 모두 하나님의 그와 같은 사랑을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가치관으로 사람을 사귀고 만나는 그런 멋쟁이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좋은 승용차는 사고가 나 봐야 알 수 있고 좋은 사람은 실패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실패는 우리 곁에 머무는 사람들이 진정한 나의 사람인가를 판가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환경을 이겨 내는 멋들어진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복된 만남의 특징은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만나는 것은 함께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만남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께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하고 싶은 열정이 너무나도 뜨거워 밤과 낮으로 함께 있고 싶으니까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남의 최고봉은 결혼인 것입니다. 오네비보로라는 사람이 사도 바울과 만나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랑을 하였으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서로를 찾았고 또한 만났겠습니까? 그것을 가슴으로 잊지 못했던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이 세상에 남겨 두었습니다.
(딤후1:16-17)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함께 하려고 결혼까지 했다가도 1/3이 넘는 커플들이 다시는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이혼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나 결혼하고 절반이 넘는 커플들이 이혼을 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을 보면 함께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귀고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하는 가치관과 훈련을 받는 것은 인생을 복되게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복음 7장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을 찾아가 병든 하인을 고쳐달라는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그를 보신 예수님은 “백부장을 예수님께서 만난 가장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극찬을 하셨습니다. 그는 과연 어떻게 하였기에 예수님으로부터 그토록 놀라운 칭찬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누가복음 7:1-10의 말씀을 분석해 보면 거기에 서나 가지의 중요한 진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백부장이 당대에 권세가 엄청난 백부장이었으나 하잘 것 없는 하인과의 관계를 그토록 귀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도 그 먼 길을 예수님을 찾아와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가셔서 고쳐주겠다고 하셨으나 여기에서도 말씀만 하시면 집에 있는 하인이 나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함께 하는 가장 소중한 내면적인 요건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신분을 막론하고 상대를 존귀하게 여기는 이 백부장의 가치관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계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와 같은 가치관이라면 반드시 문제를 해결하고 진정한 만남의 아름다운 역사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 가수인 John Lennon이 피살 되고 수만 명의 팬들이 열렬이 조의를 표하며 가슴 아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눈물과 비통 속에서 장례식을 끝내고 부인 Yoko ono Lennon이 뉴욕 타임지에, 함께 슬퍼해 주고 위로해 주는 팬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발표하였습니다.
우리가 서로 염려해 주는 마음만 있다면 모든 일은 잘 될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양육합니다. 우리가 서로 염려해 주는 사랑만이 우리들 서로를 곁길로 가지 않도록 방어해 줄 것입니다. 죄는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에 있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위로하고 격려해 준 그 사랑 때문에 저는 이 절망에서 소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늘 2층에서 일 하시고 저는 1층에서 일했는데 그분은 이제 조금 더 높고 넓은 2층으로 옮겨 가 계신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남과 이별에는 이처럼 속사람의 가치관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행하게도 이처럼 소중한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미와 부귀를 더 소중하게 여기다가 진정한 만남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만나시기 위해 하늘 보좌도 버리시고 이 땅에까지 강림하셨습니다. 우리들을 만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토록 소중한 희생과 사랑을 몸소 보여 주셨는데 우리는 어디에서 성탄의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습니까?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바로 그 분의 중심에 살아 있는 사랑을 본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우리 서로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진정한 만남으로 행복해 질 때 비로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이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인생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잘 만났다가 불행하게 헤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이는 만남의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보로를 통하여서 진정한 만남의 특징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만남으로 상대에게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자꾸만 맥이 빠지게 하고 의기소침하게 만듭니다. 이와 같은 만남은 결코 복된 열매를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좋은 만남의 특징은 늘 용기를 주고 위로를 주며 마음에 자유를 줍니다. 그러므로 그 만남은 지속 될 수밖에 없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된 만남은 상대방에 대해 모든 것을 수용하고 감내하고 기뻐하며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식들은 초라한 부모님을 부끄러워합니다. 또한 어리석은 부모들은 못난 자식을 부끄러워합니다. 하지만 잘 만난 사람은 자신이 만나는 사람에 대해 언제나 당당하고 자랑스러워합니다. 잘하고 잘났을 때만 좋아하고 삶 속에서 그릇되게 되는 경우에는 부끄러워하고 원망한다면 결코 복된 만남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된 만남은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 주례를 하는 사람은 서약을 꼭 하게 하고 그 서약은 병들 때나 가난할 때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모든 상황 속에서 함께 하고 기뻐하고 사랑하겠느냐고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만남이고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특징을 가슴에 새기고 기왕에 만났으니 행복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힐 수 있도록 복된 만남의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와 같은 고귀한 말씀으로 무장하시고 끝까지 아름답고 복된 만남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를 축복 드립니다. 우리들만의 힘으로는 안 될 때가 많으니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행복하고 풍성한 만남의 기적을 만들어 가시기를 좋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6년 12월 18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