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26일 주일낮설교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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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6 February 2017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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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입니다!
2. 26, 2017
本文:마태복음22:34-40
說敎:崔 仁 根 牧師
최근 미국 갤럽조사기관인 바나리서치에서 미국인들을 상대로 조사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미국인 57%가 2017년 새해를 맞아 성경을 읽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성경을 읽는 이유는 신앙생활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잘 하기 위해서(67%)라고 응답하여 1위를 차지하였고, 2위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28%). 이는 참으로 미국의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미국인들의 정신이 곧 이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기독교 국가인 미국인들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인생의 내비게이션이고 문제 해결의 해답을 제공해 주는 인생의 안내서인 것을 미국인들은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인생들에게 구원을 주는 지혜가 있는 책입니다(딤후3:15). 신, 구약 성경은 각각 39권, 27권으로 총 66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장 수가 1,187장이고 절 수는 총 31,101절입니다. 이렇게도 방대한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평생을 통해 성경을 읽고 들었지만 성경 그 자체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표어를 내 걸고 시작한 2017년 새해도 벌써 두 달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성경의 핵심 주제가 무엇인지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게도 많고 많은 성경의 장과 절의 대표적인 핵심 주제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나버린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주시고 구원의 길을 집대성 해 놓은 책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경의 주제를 한 절에 담아 요악해 놓은 말씀이 있으니 요한복음 3:16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교회에 제대로 다닌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 한 절 만큼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체 성경의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까지 내어 주신 그 사랑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놀라운 희생이었고 그것은 오직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대한 성경의 진짜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그런데 사랑의 사도 요한은 그 성경을 기록하신 진짜 저자이신 하나님을 단도직입적으로 “사랑”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느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의 주제는 결국 “사랑”입니다. 이는 사랑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모르면 성경도 알 수 없고 성경을 모르면 결국 그 신앙은 허망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은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사랑이 메말라버린 말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최소한 인간이라면 자신을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부보님은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피를 받고 함께 태어나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된 가족만큼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서로 부모님을 모시지 않겠다고 싸우다가 형제를 살해하는 일이 일어나고 더 나아가서 직접 부모를 죽이는 무서운 살인마도 심심치 않게 세상을 놀라게 하며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두 살짜리 아들을 죽이고 가방에 넣어 산에 갖다 묻어 버린 26살의 아버지와 21살의 어머니가 경찰에 붙잡혀 구속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전라남도 여수 신덕동에 사는 젊은 부부가 저지른 죄악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세에 일어나는 가장 무섭고도 무정한 인간의 모습이요 이는 이미 성경이 예언해 놓은 사실이기도 합니다.
(딤후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예언하신 마지막 때의 인간의 추악하고 초라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우리들에게 만약 사랑이 없다면 그 어떤 믿음의 행위나 천사 같은 말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입니다.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남이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위하며 만족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믿음의 주체이신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인정해 주셔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서 친히 인정해 주시는 바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가장 대답하기 어렵고 복잡한 질문을 들고 나와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마22:35-36)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나이까
하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 중에서 가장 우리들이 기억하고 지켜야 할 대표적인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질문입니다. 성경에는 3만절이 넘는 방대한 말씀이 있고 그들이 지키고 따르는 유대인의 법전만 해도 수도 없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만 골라 ‘이것이다’ 하고 대답하기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망설임이나 주저하심이 없이 즉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마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성도들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최상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제쳐두고 하는 모든 것은 허상일 뿐,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앞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경고하신 바와 같이 우리들에게 사랑이 없으면 천사 같은 말도, 몸을 불살라 바치는 믿음도, 더 나아가서 모든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내어주는 희생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바 제대로 된 신앙생활의 바른 길을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어느 교회에든지 가서 공개적으로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고 묻는다면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서슴지 않고 대답할 것입니다. “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고 말입니다. 그만큼 사랑을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관념적이고 습관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진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말씀을 거울삼아 자가진단을 한 번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계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 질문에 정답부터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예수님께서 친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미 주님께서 주신 주님의 계명이 무엇인가를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디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천국으로 들어갈 자와 지옥으로 떨어질 자를 구별해 주셨습니다.
(마25:31-4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어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복된 말씀 속에서 마지막 심판 때에 심판을 받을 기준이 믿음도 아니고 소망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들을 마지막 심판하시어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으로 보내는 기준이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였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에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종말장인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신 말씀이기에 더 이상의 해석이나 주석이 필요 없는 기록된 그대로 될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실로 중대한 의무요 신앙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매우 어렵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치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구별해 놓은 것과 같이 말입니다.
(마22:37-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오늘날 그 누구도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우 단순한 한 절에 불과한 말씀인데도 이것이 신, 구약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냥 적당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어떻게 해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실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커서 우리들이 가슴으로 실감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명령하신 율법의 핵심이었습니다.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지금 친히 인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한 실제사건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스웨덴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폴란드의 귀족 출신인 케서린은 스웨덴의 왕자인 쟌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쟌과 형 에릭은 극심한 권력다툼에 휘말리게 되었고 결국 형 에릭이 권좌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형은 동생 쟌을 감옥에 집어넣고 말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쟌은 형 에릭이 국왕으로 있는 한 감옥에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케서린은 즉각 에릭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간청하였습니다. “폐하, 저를 제 남편이 갇혀 있는 감옥으로 보내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국왕 에릭은 이와 같은 케서린에게 냉담하게 말했습니다. “케서린, 그대의 남편이 평생 동안 다시는 햇빛을 못 보게 될 것인데 그대는 그것을 알고 지금 이와 같은 요청을 나에게 하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폐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영원히 있고자 이렇게 간청을 드리는 것이오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국왕 에릭은 측은하다는 듯 다시 케서린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쟌을 죽여 없애버릴 수 있어. 하지만 그가 나의 골육이기에 죽이지는 않고 평생을 감옥에 가두어 둔 것이네. 짐의 생각에는 케서린, 그대는 쟌을 포기하고 새 출발을 하게나. 쟌은 더 이상 그대의 남편이 아닐세.” 그러자 케서린은 자기가 끼고 있던 반지를 뽑아 국왕에게 내밀면서 “부디 그 속에 새겨진 글을 한 번 읽어 봐 주십시오.”하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죽음으로써만”이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죽음만이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케서린의 결심이 굳은 것을 인식한 국왕은 케서린의 요청을 들어 감옥으로 보내주었습니다. 그곳에서 케서린은 오로지 남편을 위해 일생을 바칠 각오로 함께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중 17년째가 되던 해에 국왕 에릭이 죽자 감옥에서 나와 권자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케서린이 선택하고 살아간 길이 오늘 우리들이 배우고 결단해야 할 하나님 사랑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시는 말씀을 이루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받으며 오늘날 까지 잘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케서린과 같이, 비록 고통스럽고 자유가 없고 힘들고 어렵지만 남편 쟌과 함께 하려고 감옥에라도 기꺼이 들어갔던 케서린과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과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며 동고동락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들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신 아름다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43:1-4)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성도의 도리요 사랑 받은 자의 지극한 의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사랑으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으로 돌아가는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참으로 단순하면서고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 사랑하라 하지 않으시고 또한 이웃들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마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극히 작은 이웃 하나에게 잘 해준 것을
곧 하나님께 잘 해 드리는 것이라고 해석해 주셨습니다. 앞서 배운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가 바로 그렇습니다. 이렇게 볼 때는 이웃이 곧 우리들의 하나님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의 이해를 돋우기 위해 친절하신 우리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실례를 하나 들어 주셨습니다.
(마18:23-35)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웃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연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몇 말씀을 더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예수님은 이렇게도 이웃들과 주의 종들에게 베푸는 사랑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기억하시고 보상해 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실제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시는 하나님은 그만큼 우리들을 사랑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강하게 보장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신앙생활은 별거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원하시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를 보면, 성도들을 보면, 전혀 이와는 별개로 살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주의 종을 자신의 가게에 고용한 종업원만큼도 섬기지 못하고 이웃들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단도직입적으로 이와 같은 그릇된 교인들을 향하여 외치고 있습니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고 말입니다. 백번 이는 옳은 말씀이요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렇듯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쳐놓고서는 결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바드대학교에 Hennry Nouen이라는 유명한 교수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나 학생들에게나 인기가 있어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인생을 살아가던 그런 덕망 있는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다 사표를 냈습니다. 깜짝 놀란 학교에서 더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강권하고 말렸지만 그는 한사코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사표를 냈는지, 그리고 사표를 내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기자가 그를 지속적으로 추적을 하여 결국에는 그를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초라하고 조그마한 시골의 양로원에 있었습니다. 허름한 옷을 입고 초라한 모습으로 그는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 환자들의 발을 씻기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원봉사자로 말입니다. 끈질기게 찾아온 기자를 물리치지 못하고 그는 자신의 심경을 털어 놓았습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은퇴를 하게 될 것인데 조금 앞당겼을 뿐입니다. 평생 나는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최고의 영광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늘 가슴 한켠에 예수님의 말씀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단 한 번도 누구를 섬겨 본적이 없습니다. 이제 이 세상 떠나기 전에 이웃을 한 번 섬겨보고 예수님을 만나야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아 결단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가슴 찡한 하나님의 종의 고백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음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토록 그렇게 벼르다가 결국은 그냥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하지만 누엔 박사님은 위대한 결단으로 그 좋은 하바드의 교수직을 내려놓고 양노원에서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듯 싶어 마음에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지금 명령하고 계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이 말씀을 제쳐두고 우리들이 성경으로 돌아가고 믿음으로 무장한들 과연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깊이 한 번 고민해야 봐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세월이 참으로 빠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출발한 새해도 어느 덧 두 달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흐르는 말세의 탁류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말씀으로 돌아서야 하겠습니다. 그 많은 말씀의 주제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모든 성경의 주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무엇에 더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겠습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숨을 내 놓고 사랑해야 하고 이웃은 우리들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에게 명령하시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제쳐놓고 하는 우리들의 모든 것은 다 허상일 뿐입니다.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전재산을 다 내 놓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 해도 천사와 같은 아름다운 말을 해도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될 수 없음은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요구하시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사랑의 진정한 의미와 의무를 바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결코 우리들의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긴 겨울도 가고 황홀한 봄날이 다가 오는 이 복된 계절에 우리들의 가슴에서도 사랑의 꽃이 피는 아름다운 변화를 만들어내야 하겠습니다. 복된 예배자로 성전에 올라오신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녕 축복의 열매가 될 수 있기를 좋으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7년 2월 26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