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일 주일낮 설교 (나의 죄 때문에)
- Details
-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Wednesday, 04 April 2012 08:34
- Hits: 1621
나의 죄 때문에
고난주일
4. 1, 2012
本文:이사야53:1-6
說敎:崔仁根牧師
오늘은 2012년도 고난주일입니다. 고난주일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기념하며 주님의 그 고난이 헛되지 않도록 믿음으로 거듭나고 변화를 받도록 특별히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사람이 원래 지음을 받았을 때는 고통과 고난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 무상으로 불하해 주신 천국과 같은 에덴동산에서 영원복락을 누리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에덴에서 쫓겨나고 살벌한 세상에서 지금과 같은 고난을 당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죄 때문입니다. 그토록 놀라운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인생들이 그와 같은 놀라운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배신하고 사탄 마귀와 짝하며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인생들은 엄청난 고통을 당하며 살아야만 했고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이와 같은 사건의 배경을 성경으로 돌아가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3:16-19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 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 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것이 오늘날 우리 인생들이 당하는 고난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당하는 인생의 숱한 고난과 고통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들이 조물주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를 범하므로 당하는 무서운 죄에 대한 형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와 같은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 는 영생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처럼 비참하게 고통당하다가 죽어야만 할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들의 모든 죄악의 형벌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들은 그 무서운 죄에서 자유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처럼 소중한 우리들의 구원과 예수님의 고난을 대비시켜 기록해 놓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결론은 우리 때문에 아니 “나의 죄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도 무서운 고통과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 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 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처럼 무서운 고통을 당하셔야 했던 것은 오직 오늘 우리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이와 같은 사실을 명문화 해 두었습니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고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고통당하신 이유가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2012년도 고난주일을 맞아서 우리 때문에 당하신 우리 주님의 고난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고 우리들의 삶에 끊임없이 닥쳐오는 고통의 문제를 능히 해결 받는 말씀의 진리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거룩한 부활로 승리하고 거듭나는 그런 놀라운 축복 받은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지난 2월 24일 시카고에서 발행된 [크리스챤 저널] 사설에 [하나님은 미국을 버리시는가?] 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게재 되었습니다. “지난 2월 13일 워싱턴 주에서 미국에서 7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 시키고 주지사 그레과이어가 동성애 후원자들과 입법자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 ‘오늘은 워싱턴 주의 역사적인 날이며 매우 자랑스러운 날이다. 워싱턴 주는 서로 사랑하는 시민들이 사랑 할 기회를 더 이상 거부하지 않는 주가 되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워싱턴 주의 대표적인 기업들인 스타박스, 마이크로소프트, 나이키와 같은 기업들이 동성애자들을 돕고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인디에나 주의 한 학교에서는 창조론을 아예 가르치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하였다.” 일리노이 시카고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우리 워싱턴 주의 타락한 동성결혼 입법이 사설로 등장한 사실이 참으로 당혹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격노하시는 엄청난 죄악을 법으로 합법화시키면서도 축배를 들고 자랑스러운 날이라 선언하는 주지사를 우리가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또한 가슴 아프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 시대는 더 이상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무서운 시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암이 왜 무섭습니까? 내 몸을 죽음에까지 몰아가고 있는데도 우리 스스로 그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악이 사망으로 형벌을 받게 되는데도 죄를 죄로 알지조차 못한다면 결국은 죽음에 이르고 마는 것이기에 무서운 것입니다. 동성애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어떠한 심판을 받았는지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인생들은 그와 같은 끔찍한 형벌을 이미 잊어버리고 법으로 합당하게 죄를 저지르겠다고 하니 이 시대가 바로 말세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끔찍한 세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현실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직시하고 모든 것이 “나의 죄 때문입니다.”고 선언하고 죄악과 전쟁을 벌여나가는 용기 있는 성도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주님과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 바로 이처럼 끔직한 죄가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요인은 죄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를 조용히 들여다보면 전쟁과 가난과 재난과 질병으로 거의 모든 인류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서나 선지서의 내용들도 또한 한결 같이 인생들이 전생으로 인해 죽거나 질병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인류의 역사는 공통적으로 고통 받는 인생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전쟁과 질병의 요인은 과연 무엇일까요? 인생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육신대로 짐승처럼 양육강식하고 살아가는 인생들을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므로 고통과 죽음이 난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무엇입니까? 도대체 죄가 무엇이기에 이처럼 인류의 역사가 고통으로 넘쳐나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이에 대한 해답을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력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일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고 말입니다. 참으로 이보다 더 명료하고 분명한 해답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죄이고 이 세상의 법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다. 사람들이 왜 자기 마음대로 활동하고 살 수 없도록 무서운 감옥에 갇히게 됩니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이름은 공통적입니다. “죄수”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죄를 짓고 감옥에 수감되어야 할 존재라는 뜻입니다. 죄는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요 형벌은 고통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 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 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손과 발에 못을 박히시며 거룩하신 그 몸이 만신창이로 상하셨습니다. 왜입니까? 바로 우리들의 죄와 허물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죄의 양태를 보게 됩니다. 하나는 ‘허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죄악’입니다. 원래 “죄”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에 하마르티아(άμαρτία)입니다. 이는 ‘과녁을 맞추다'는 뜻인데 과녁을 향하여 화살을 날리면 과녁의 정확한 표적을 벗어나서 어떤 것은 과녁에 아예 미치지 못하게 되고 어떤 것은 과녁을 넘어 더 멀리 날아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과녁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허물, 즉 소극적인 죄이고, 과녁을 넘어가버리는 것을 죄악, 즉 적극적인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두 가지로 명령을 주십니다. 하나는 “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죄이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은 적극적인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이처럼 우리들이 저지른 모든 죄 때문에 그 귀하신 몸이 찢기시고 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당하셨던 그 고난은 오직 “나의 죄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은 죄를 짓고 우리 주님께서 고난당하시도록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은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남겨두었습니다.
히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 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 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 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서 욕을 당하도록 죄악에 머물며 육신대로 살아가게 되면 다시는 회복의 은총을 누릴 수 없는 무서운 형벌에 빠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가시도록 자신의 삶을 육신에 빠져 죄악에 방치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죄는 고통을 몰고 온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죄를 미워하고 죄를 멀리하며 죄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 주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죄는 주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죄 문제를 우리 주님께서만 해결하실 수 있다는 말씀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죄 문제를 위한 법절차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먼저 읽어보신다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 말씀이 우리들의 죄를 씻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에서는 우리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흠없는 어린 양을 끌고 제사장에게로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양의 머리에 손을 얹고 나의 죄를 전가시킨 다음 그 양을 죽여 피를 흘리고 그 피를 제단에 뿌려야 했습니다.
레4:32-35 그가 만일 어린 양을 속죄 제물로 가져 오려거든 흠 없는 암컷을 끌 어다가 그 속죄제 희생의 머리에 안수하고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아 속죄제를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손가락 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전부를 단 밑에 쏟고 그 모 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취한 것 같이 취하여 단 위 여 호와의 화제물 위에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의 범한 죄에 대 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제도가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의 피로 대신하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들의 죄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이 말씀은 우리들을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들의 모든 죄 문제를 다 해결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예수님께서 살을 찢고 피를 쏟아 우리들의 죄를 해결해 주신 다음에는 누구든지 그와 같은 우리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되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행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행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우리 주님 외에는 우리들을 우리들의 그 무서운 죄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신 인물이 없기 때문이요 그렇게 우리 죄를 대신 씻어 줄 수 있는 죄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언합니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 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예수님을 알고 그와 같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다 배설물과 같이 과감하게 버렸던 것입니다.
빌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 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 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 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 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진정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면 이처럼 우리들이 소중하게 여기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을 정도의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육신적인 삶을 넘어 영적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령한 삶을 추구하는 의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1년에 한 번 만이라도 고난주일을 지키며 영적인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주일은 연 중 행사로 치루고 마는 습관적인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가장 소중하던 그것을 과감하게 던져버리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비장한 결단과 각오로 변화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축복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고난을 통하여서 연단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누가복음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입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탕자는 참으로 망나니였고 건방진 놈이었고 고생을 모르던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습니다.
눅15: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이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아들입니까? 아직도 아버지가 건재하신데 자기가 무엇을 했다고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까? 달라는 믿음 즉, “내게 주소서” 하는 믿음은 참으로 초보적인 믿음이요 성장하지 못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많은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가 없는 먼 곳으로 가서 허랑방탕하며 다 탕진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가 어떻게 됩니까? 문자 그대로 죽도록 고생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먹고 살기 위하여 돼지가 먹는 것을 먹으며 돼지와 함께 비참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가 깨달은 것은 “아버지께로 돌아가 아버지 집에서 종들과 같이 배라도 굶지 말아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디에서 아버지의 소중함을 깨닫습니까? 고통 가운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이 겪어야 할 과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싫어하거나 고통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결단코 하나님의 사람이 되거나 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몇몇 말씀들을 묵상해 보신다면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보다 더 깊이 터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 나이다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40:12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신원하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이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상의 말씀들은 한결 같이 고난의 유익을 선언하고 있는 귀한 말씀들입니다. 미국 말에,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녀일수록 징계를 주시며 그와 같은 징계의 고통을 통하여서 낮아지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도록 유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고통을 영광으로 삼고 고통을 축복의 통로로 삼으며 신선한 변화의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죄를 지어 고통과 고난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도전을 주십니다.
벧전2:19-25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 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 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 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 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 니라
고 말입니다. 참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은혜가 되고 도전이 되는 귀한 말씀입니다. 죄가 있어서 고난을 당하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같이 죄와 상관없이 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의 상급과 위로가 함께 할 것입니다. 어리석고 불쌍한 이웃들이 당하는 고난을 우리들이 대신 지고 사도 바울과 같이 장차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기대하며 고난을 당한다면 이렇게 사셨던 주님께서 친히 아시고 하늘 상급과 땅의 축복으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2012년도 복된 고난주일을 맞아서 우리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배경과 그 고난으로 인해 우리들에게 임하게 될 놀라운 은총을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무서운 고난과 형벌을 대신 받으시므로 오늘 우리들이 죄와 형벌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주님께서 그렇게 고난당하시도록 죄 가운데 머물고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도리어 죄와 담을 쌓고 죄와 상관없는 고난을 당하므로 주님처럼 이웃을 살리고 하늘의 축복을 만들어 내는 멋들어진 성도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렇게 살라고 우리 주님께서 그토록 무서운 고난을 대신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복되고 귀한 날 아버지께 예배로 영광을 돌려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주님의 고난을 바울처럼 가슴에 담고 천국의 상급을 바라보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헌신하는 그런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리는 바입니다. 아멘
주후 2012년 4월 1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