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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7년 4월 16일 주일낮설교 (어찌하여 우느냐?)

2017년 4월 16일 주일낮설교 (어찌하여 우느냐?)

어찌하여 우느냐?

부활주일

4. 16, 2017

本文:요한복음20:11-18

:

오늘은 2017년 부활주일입니다. 오늘 새벽에는 새벽에 무덤을 찾은 여인이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무덤에는 시신이 들어 있기 마련인데 그것도 날도 밝지 않은 새벽 미명에 무덤으로 찾아간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다는 기록이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그만큼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그대로 지속이 되었던 것입니다.

(20: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들이 배워야 할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덤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의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오직 죽은 사람만이 묻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소망 없는 곳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와 같이 소망 없는 무덤이었지만 값진 향유를 들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그것도 새벽 미명에 찾아 갔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 것입니다.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세상의 사랑은 너무나도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회장님의 개가 아파도 병문안을 하며 회장님의 눈에 들기를 기대하였던 임직원들이 정작 회장이 돌아가면 찾아오지도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사람이 죽어버리면 더 이상의 소망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막달라 마리아는 돌아가신 예수님의 무덤을 이렇게도 일찍 찾아 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먼저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고난과 부활을 예언하셨던 예수님의 한 말씀이 성경에 남아 있습니다.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막달라 마리아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 같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유익을 추구하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예수님을 따르고 그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고 시신이 되어 돌아왔는데도 끝까지 그 예수님의 무덤에까지 값비싼 향유를 들고 찾아 갔던 그 사랑과 행위는 예수님의 인정과 복을 받기에 너무나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활주일 아침에 우리 모두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진정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진정으로 복된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없는 우리들의 모든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리기 위해 향유를 준비하고 이른 새벽 미명에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는 슬픔과 절망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시신이 그곳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즉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로 달려가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을 알리고 그들을 무덤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역시 그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습니다. 이상하다고 여긴 제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다 제 집으로 돌아가 버렸으나 마리아는 그 무덤 곁에 움츠리고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마리아의 심정을 오늘 우리는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슬픔이요, 그것은 절망이요, 그것은 고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잃어버린, 가슴이 텅 비어버린 바로 그와 같은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무덤 곁을 떠나지 못한 채 그렇게 넋을 잃고 서서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울면서도 틈틈이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텅 비어 있는 무덤을 들여다보았습니다.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울면서 예수님을 찾고 또 기다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거짓말과 같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20: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놀라운 교훈이 있습니다. 연중행사로 부활절을 지킬 것이 아니라 빈 가슴으로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망하는 진정한 부활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오늘 아침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비밀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이 들린 미친 여인이었습니다. 그것도 귀신이 자그마치 일곱이나 뒤집어 씌워져 있었던, 사람이 아닐 정도의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8:1-3)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가 과연 어떤 여자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에 눌려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 그 모든 귀신들로부터 해방 되고 고침을 받은 체험적인 신앙을 가진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체험을 가졌던 그녀는 그 때부터 예수님을 쫓아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위의 본문에서도 3절 말씀을 보면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체험적인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삶 속에서 예수님의 은총과 능력을 체험한 성도들은 결코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 주님의 부활을 천 번 만 번 외친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고 나면 그 누구도 주님을 향한 그 마음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체험적인 신앙을 가져야만 진정한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체험 중에 가장 큰 체험이 바로 십자가의 체험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바로 나 때문에 그 모진 십자가의 고난을 다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막달라 마리아는 참으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지극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바치는 인물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호주머니를 굳게 닫아 놓은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는고로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본다면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사랑은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값진 재물로 헌신을 하였던 여인이었습니다.

(8:2-3)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16:1-2)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라는 말씀들과 같이 말입니다. 향품은 당시나 지금이라 값비싼 특수품입니다. 그 옛날 마리아가 값비싼 나드 한 근을 들고 예수님께로 와서 그것을 온통 발에 붓고 머리를 풀어 주님의 발을 씻긴 유명한 이야기도 이와 같은 주님을 향한 값비싼 헌신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나드 한 근은 장년의 1년 연봉과 같은 금액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렇듯 돈을 아끼지 않고 쏟아 부어 예수님을 섬기고 사랑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시든 사람이든 사랑에는 값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사랑의 사도 요한이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자고 호소하였겠습니까?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그것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할 때 사람이든 하나님이시든 감동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겠습니까? 그리고 구하지 않았던 부귀와 장수까지도 아낌 없이 내려주셨겠습니까? 거기에는 솔로몬의 일 천 번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어찌하여 우느냐?”고 다가서신 부활의 예수님을 인류 최초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아낌이 없는 사랑으로 주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루카케의 아주 특별한 사랑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이제 겨우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은 예쁜 딸이 있었습니다. 그 딸은 아빠를 지극히 사랑하였습니다. 물론 아빠도 그 딸을 너무나도 사랑하였습니다. 날마다 아빠는 그 딸에게 성경책을 읽어주며 잠들 때 까지 곁에서 지켜주었습니다. 어느 날 밤 잠들기 전에 아빠가 여느 날과 같이 성경책을 읽어 주고 이불을 덮어 주며 잠을 청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은 모조품 진주 목걸이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 목걸이를 24시간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아빠가 그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딸에게 물었습니다. “제니퍼, 너 아빠 많이 사랑하지?” 하니까, “그럼요, 저는 아빠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을걸요.” “그래, 아빠도 우리 제니퍼가 아빠를 많이 사랑하는 줄 알아. 그런데 말이야 아빠를 정말 사랑한다면 우리 제니퍼가 가장 좋아하는 이 진주 목걸이를 아빠에게 줄 수 있겠니?” 하며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딸은 금방 울상이 되어서 말했습니다. “아빠, 아빠를 많이 사랑하지만, 그렇지만 그것은...?”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아빠가 딸을 달래주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제니퍼, 걱정하지 마. 그냥 아빠가 한 번 말해 본 것뿐이야.” 하면서 뽀뽀해주고 딸의 방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니퍼는 그날 밤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갈등하며 고민하였습니다. 아빠를 사랑하는데, 하지만 그 진주 목걸이를 주기는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이튿날 제니퍼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아빠는 이미 일 나가고 없었습니다. 제니퍼는 또 다시 하루 종일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결심을 하였습니다. 최고로 좋아하는 진주 목걸이지만 아빠가 오시면 아빠에게 드리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아빠가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빠가 대문을 들어서자 말자 달려 나가 목에서 진주 목걸이를 빼내 아빠에게 드렸습니다. “아빠, 하루 종일 생각해 보았는데 이 목걸이를 아빠에게 드리기로 했어요. 제니퍼는 아빠를 제일 많이 사랑하니까요.” 아빠는 눈물이 글썽거리며 딸의 작은 손에서 진주 목걸이를 받았습니다. “제니퍼야, 너는 정말로 아빠를 사랑하는구나! 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그래서 그 목에서 한 번도 빼는 적이 없었던 진주 목걸이도 이 아빠에게 주는 것을 보니까 말이야!” 하면서 딸을 꼭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빠는 진짜 진주로 된 목걸이를 사와 딸의 목에다 걸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최고의 것을 아끼지 않고 주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최고의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최고의 것으로 주님을 섬겨야 할 차례입니다. 이것을 결단하는 날이 바로 우리 위해 죽으시고 우리 위해 다시 사신 부활절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일곱 사귀를 쫓아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그 날부터 그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님 가시는 곳이면 그 어디든지 따르며 각양 귀한 것으로 섬겼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그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 당하러 가시게 되자 가슴을 치며 더욱 가까이 따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는 말씀이 이를 잘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그곳에 마리아가 있었구나 하고 말겠지만 실상은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잔인하게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을 박고 처형하는 무리들이라면 그를 추종하던 자들도 결코 안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나 생명을 단 하나 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두렵고 무섭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모두가 다 도망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키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빈 무덤까지도 끝까지 지키고 있었습니다.

(20:10-11)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주일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리기 위해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는 그곳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제자들에게로 달려가서 그들을 데리고 와 다시 한 번 더 주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무덤에 나왔던 제자들은 그 길로 다시 자기 집으로 가버렸으나 막달라 마리아는 혼자서 빈 무덤을 지키며 그 무덤을 보고 또 보며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떠나 버린 빈 무덤 옆에 서서 울면서 주님을 찾는 이 여인을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친히 나타나시어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때 마리아가 그 주님께 한 대답을 오늘 우리는 가슴으로 새기기를 원합니다.

(20:15-16)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이는 선생님이라)

울던 눈물에 가려 마리아는 자기 곁에 서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주님을 향한 변함 없는 이 사랑을 한 번 상상해 보셨습니까? 끝까지 시신이 되어 아무런 소망이 없어 죽어 있어도 마이라는 끝까지 그런 주님이라도 가지고 가겠다고 울먹이며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신 주님께서 목이 메어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그제서야 마리아는 그 분이 그렇게도 목이 메어 찾던 예수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이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이 보다 더 가슴 찡한 장면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때의 마리의 기쁨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찾으라! 두드리라! 구하라! 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보지 못한 부활의 주님을 최초로 바라 본 최고의 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주님이 죽으셨다 해도, 더 이상의 소망이 없는 시신으로 변해버렸다 해도, 우리는 마리아처럼 끝까지 그 주님을 찾아 그 주님 곁에 머물고 있어야 합니다. 비록 주님께서 떠나버리신 빈 무덤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을 찾으면 마리아처럼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솔하게 주님을 쉽게 떠나는 우를 버리고 끝까지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을 가르쳐 주시는 계절이 바로 부활절입니다. 이 복된 부활절에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기쁨과 소망으로 회복되는 기적을 보시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7년도 부활주일입니다. 우리들의 나이만큼 우리는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슴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만났던 부활하신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그만큼 우리는 예수님을 온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그 예수님을 마음 바쳐 재물 바쳐 사랑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오늘 우리들의 결정적인 핸디캡은 시시때때로 그 주님을 떠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기다리고 있겠다고 약속하시고 친히 기다리시는 그 성전으로 우리는 온갖 핑계를 대면서 찾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게 하는 우리들과 주님을 찾아 빈 무덤을 지키며 울고 섰던 마리아 사이에는 태평양만큼이나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우리들일지라도 마음을 돌이키고 믿음을 회복하여 주님을 찾으면 만나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부활절이라는 특별한 날을 허락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복된 계절에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기쁨과 소망을 회복하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모두 우리 위해 죽으시고 우리 위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거룩한 성찬식을 통하여서 우리들의 영육이 신령한 은혜를 받고 부활의 주님을 마리아처럼 증거 하는 진정한 멋쟁이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렇게 되도록 우리 주님께서 그토록 모진 십자가의 고난도 친히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2017년도 부활절을 맞아 예배로 영광을 돌려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성도님들이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시게 되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7416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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