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6일 주일낮설교 (하나님의 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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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Monday, 27 November 2017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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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내
11. 26, 2017
本文:히브리서12:1-3
說敎:崔 仁 根 牧師
탕자에서 성자로 변화된 한 사람을 들라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어거스틴을 들 것입니다. 그는 16살에 집을 나가 32살에 돌아왔으니 16년을 방탕하며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탕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 모니카는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조차 모른 채 그 긴 세월을 하루 같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16년 동안을 말입니다. 그러했던 모니카의 무릎은 낙타의 그것보다 더 부풀어 올라 굳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긴 세월 낙심하지 않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 그 아들 어거스틴은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회록이라는 책을 내 놓고 오늘날까지 전 세계인들의 가슴에 감동과 깊은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의 어머니는 그렇게도 긴 세월 동안 단 하루도 잊지 않고 기다릴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아들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참고 기다리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이와 꼭 같은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히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오늘날까지 하나님을 거역하고 오직 우리 자신들의 유익만을 위해 살아온 수많은 날들을 참고 기다려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처럼 건강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감사의 달 마지막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리들의 공로가 아닙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 큰 사랑으로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기다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겨두었습니다. 감사의 달을 마지막 보내면서 다시 한 번 더 하나님의 사랑이신 하나님의 인내에 대해 공부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감사를 가슴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인내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별 받고 선택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께 등을 보였던 역사적인 사건들이 모세 오경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세세하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서도 그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하나님을 떠났던 그들의 모습은 미련한 오늘 우리들이 보아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 사건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전정이 무엇인지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민14:21-23)
그러나 진실로 나의 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으로 맹세하노니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가슴 섬뜩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의 전지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조리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신하고 범죄하는 모든 일들을 일일이 다 카운트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한 것이 “열 번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감히 죄악 된 인생들이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를 열 번이나 배신하고 거역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동안 그들의 모든 범죄를 다 알고 계시면서도 10번이나 참고 기다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은 끝내 회복의 기회를 10번이나 발길질 하고 반복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민수기 14장에서 잠깐 발견한 이와 같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바라보먼서 오늘 우리들은 깊은 깨달음과 결단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감사를 잊어버리고 배은망덕하게 살아가면 결국은 그 하나님과 영원한 원수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60만 명이라는 천문학적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내가 영원히 무한정으로 나타나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인내를 통해 신선한 두려움과 깨달음을 가지고 변화의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사랑입니다
(히12:2-3)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이 말씀을 믿음의 가슴으로 묵상해 보신다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왜 주시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사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그 무섭고 잔인한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그것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잔인한 유대인들의 그 모든 잔악한 범죄를 친히 다 참으시고 끝까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돌아가셨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들이 그 얼마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우리들의 유익을 위해 온갖 배신으로 그 하나님 앞에서 거짓되게 살아 왔는지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듯이 우리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늘 이 순간까지 참아 오신 것은 오직 하나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그 큰 사랑으로 인한 것임을 오늘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살인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죄악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바나바는 놓아달라고 아우성치고 빌라도가 친히 심문하고 아무런 잘못도 발견하지 못했노라고 선언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리라고 아우성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잔악한 모습을 상상해 보신다면 오늘 우리들의 죄악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27:20-23)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렇게도 잔인한 그들을 용서하시고 길이 참고 사랑으로 품어 안으셨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까지도 그들을 위해 축복하시고 용서를 빌으셨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내는 사랑이요 하나님의 그 사랑은 결국 죽을 죄인들을 살려내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오늘 본문은 참으로 완곡하고 점잖게 우리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히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우리들의 삶에 접목시켜야 하겠습니다. 오래 참지 못해 이루지 못한 우리들의 삶의 연약함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2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던 영국군이 어느 날 대패하고 몇 안 남은 병사들이 산지사방으로 도망을 가야만 했습니다. 산으로 숲속으로 도망가는 처량한 부하들을 바라보며 부스 장군도 도리 없이 산속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동굴에 들어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하고 수치스러웠습니다. 마침내 차고 있던 칼을 빼들고 자결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자식 같은 피 끓는 젊은 용사들을 다 죽이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숨어 있는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때 그의 눈에 동굴 입구에서 집을 짓고 있는 거미 한 마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몸을 날려 거미줄을 치다가 실패하고 또 올라가서 떨어지며 집을 지으려다 실패하기를 6번이나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일곱 번째 마침내 그 거미는 거미줄을 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것을 바라본 그의 심장에 미묘한 감동이 찾아 왔습니다. 저 거미는 여섯 번의 실패 끝에 마침내 일곱 번째 성공하였는데 나는 단 한 번의 실패로 이토록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높이 들었던 칼을 도로 집어넣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내어 패잔병들을 불러 모으고 재정비하여 대승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오늘날 하나님의 인내만 알고 우리들의 삶 속에 인내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도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인내로서 우리들을 기다라시고 참아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면 오늘 우리들도 그 인내로 하나님을 섬기고 능력을 받고 새 힘을 얻어서 이 세상을 정복하고 이기고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 그 무서운 십자가도 길이 참고 최후 승리를 거두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와 같이 말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인내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은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지극한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들의 허물과 교만이 경우에 맞지 아니하고 건방지고 오만할지라도 끝까지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는 것은 새로운 기회를 주시기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나 기드온을 보면 이와 같은 말씀의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해내려고 하나님께 애걸하는 모습은 차라리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창18:24-26)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아브라함은 소돔 땅에 의인 50만 있으면 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10인까지 조마조할 만큼 반복적으로 애결하며 부탁을 드렸습니다.
(창18: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토록 아브라함이 어린아이와 같이 치근대듯 하나님께 애걸하였지만, 그것도 50에서 10까지 다섯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적으로 내 놓았지만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답하시고 아브라함의 마음을 받아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내와 오래 참으심이 우리들에게 축복의 기회가 됨을 증거해 주는 귀한 사료가 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기드온은 더욱 심하게 하나님을 시험까지 하였습니다. 난세에 하나님은 숨어서 타작이나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기드온을 민족을 구원할 인물로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그와 같이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여 따라나서지 아니하고 감히 하나님을 시험하기까지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삿6:36-40)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여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번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이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온전히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르신 그 하나님을 참인가 하여 시험하여 보는 참으로 온전치 못한 행위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개의치 않으시고 끝까지 기드온의 부탁을 다 들어 응답하시고 친히 부르신 이가 사람이 할 수 없는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무례함과 오만함이 다소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1 길이 인내하시고 참으시며 기다려 주시는 것은 그와 같은 인물들을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종과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이처럼 고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정성껏 섬기며 충성할 수 있는 복된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결코 자격이 있거나 잘난 것이 있어서 하나님의 종이 되고 쓰임 받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들을 붙들어 주셨기에 지금 우리들이 이처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인내는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무한정으로 참으시고 기다리시며 인내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도록 기다려도 개전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심판하시고 인내를 거두어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인내에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부터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기회를 만드시고 그것을 유다가 인식할 수 있도록, 그리고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기다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주님의 그와 같은 바램을 무시하고 끝까지 자기의 계획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비참하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은 성경의 증거를 통해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6:70-7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마26:21-23)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마26:48-50)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이 말씀들을 조용히 묵상해 보면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엄청나게 인내하시면서 기회를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그와 같은 참으심을 감지하지 못한 채 끝까지 예수님을 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고야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와 같은 기회를 묵살하고 죄악의 자리에 버티고 앉은 그를 가장 비참하게 심판하시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스승을 팔아서까지 챙긴 돈을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도록 하시고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도록 하신 것입니다.
(마27:1-5)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한대로 인내하며 기다리시지는 않습니다. 기회를 주어도 하나님께서 길이 참고 기다려도 개전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마침내 하나님은 인내를 거두시고 무서운 심판을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우리 사람들처럼 악감을 품으시고 단번에 척결하신 것이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 때 홍수로 그들을 심판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무려 120년 동안을 기다리시며 그들이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는 의인이 단 10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심판의 대상이 된 소돔과 고모라 성에는 단 10명의 의인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최종 심판으로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의 인내심이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먹고 마시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사의 달이 저물고 있습니다. 부족하고 허물투성이인 우리들을 오늘날까지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고 인내해 주셔서 오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올라와 예배드릴 수 있도록 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더욱 심기일전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참으심이 축복이 될 수 있도록 말씀을 품고 믿음을 만들어 내는 복되고 귀한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감사의 달 11월이 주물어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감사드려야 할는지, 11월 한 달 동안 하나님의 품성에 관한 진리를 공부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침묵 그리고 인내하심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순간까지 우리들을 향하여 길이 참으시고 침묵하시며 긍휼과 사랑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는 한 순간도 잊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은혜를 덧입지 않고 이 순간까지 존재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금수만도 못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마음으로, 입술로 손과 발로 우리는 이처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 가슴으로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힘과 분에 넘치도록 감사 예물을 드리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을 이 종은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큰 사랑과 축복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힘을 다하여 감사제를 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풍성하게 채우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귀한 날 하나님 전에 올라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가족들에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안과 건강과 감사가 넘치는 삶이 날마다 새롭게 회복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7년 11월 26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