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31일 주일낮설교 (착하고 충성된 종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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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31 December 2017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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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고 충성된 종아!
송년주일 직원임명식
12. 31, 2017
本文:마테복음25:14-30
說敎:崔 仁 根 牧師
서양역사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의 전쟁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한번은 알렉산더 대왕이 전쟁에 패하여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왕이 전쟁에 패하고 도망을 가야 하니 얼마나 가련한 신세가 되었겠습니까? 그때 다른 군사들은 슬금슬금 자기 살 길을 찾아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도망을 가면서 말안장에 무거운 짐을 실어 사병 하나에게 끌고 가게 했습니다. 그 짐은 무척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금덩이였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에 알렉산더 대왕이 위기를 모면하고 다시 전쟁에 크게 승리하여 나라를 되찾고 부귀영화를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왕은 그 병사를 불렀습니다. 왕은 그 병사를 칭찬하고 그 병사가 짊어지고 왔던 짐을 전부 그 병사에게 주었습니다. 모든 병사들이 다 제 살길을 찾아 도망가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 병사는 끝까지 금덩이가 담긴 짐을 끌고 왕의 명령을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끝까지 충성한 자에게는 보상이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명령하고 계십니다.
(계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순종하며 끝까지 충성하는 그런 신실한 일꾼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환경 따라 형편 따라 해바라기처럼 기회를 찾아 머리를 조아리며 오늘만 사는 미련한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래서 기록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반드시 종말이 오는데 바로 그때 죽도록 충성한 종들에게는 상금과 칭찬이 따르지만 악하고 게으른 종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해 주신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리고 기대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가슴에 담고 2017년도를 마무리 하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는 진정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우리들이 어릴 때는 한 학기를 마치는 날 종업식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성실하게 공부하고 열심히 결석 않고 학교에 나온 아이들은 우등상과 개근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 성실하게 공부하고 등교하였던 학생들은 기대와 꿈으로 상을 기다리게 되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부러움과 탄식을 자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그와 같은 상을 우연하게 혹은 엉뚱하게 받지 않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중간고사, 기말고사와 평소 숙제와 평가를 종합하여 석차를 매기고 그것이 교장선생님께 상신 되어 상이 되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인생도 꼭 이와 같습니다. 하루 하루가 그냥 지나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 하루 하루를 평가하시고 마지막 날 바로 그 때에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착하고 충성된 종인지, 악하고 게으른 종인지 평가하여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늘 상급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평생에 결혼조차도 하지 않고 온 몸과 마음과 생명을 다 바쳐 충성하였던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겨 오늘 우리들에게 커다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빌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누구나 맞이하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담대하고도 엄숙하게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딤후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는 이렇듯 처음도 나중도 끝까지 상을 바라본 삶을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장 아름답고 후회 없는 멋진 인생입니다. 우리는 결국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과연 그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판단을 받게 될까요?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일 일까요?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비참한 심판일까요? 오늘은 2017년 한 해를 다 보내는 12월 31일 마지막 날을 맞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생명도 그 마지막 때가 다가옵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칭찬 받고 상 받을 수 있도록 마지막 순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 없이 기뻐하며 하나님과 함께 영원 영원히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함께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달란트(은사)를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묵상해 보면 모든 성도들은 다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달란트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성도들을 지도하다 보면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의외로 많은 성도들이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은사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그 사람에게 적당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는 오늘 본문 말씀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다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다섯과, 둘과 하나를 양으로 보는데 은사는 이렇듯 양보다는 그 중심과 질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누구든지 받은 것에서 갑절만 남기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가 보다는 받은 것에서 얼마나 충성스럽게 수고하여 이를 남겼는가가 평가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사는 많은 양으로 평가되지 아니하고 받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그것으로 충성하여 거기에 합당한 이를 남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스스로 받은 은사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를 모른 채 갑절이라는 열매를 들고 나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을 통하여서 이와 같은 은사에 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두었습니다. 우리 몸의 지체 가운데 슬데 없이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라는 한 몸에서 지체가 된 우리 모든 성도들은 단 한 사람도 소용없는, 다시 말해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각양 성도들이 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고 열매를 맺히도록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합당한 은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교회에서 이와 같은 은사에 관한 말씀을 증거하고 난 다음에 여성도 한 분이 찾아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받은 은사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의 핵심인 “서로 돕는 은사”에 관해 말씀 드렸습니다. “아무리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 해도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도움을 줄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여성도는 아주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그거야 제가 가장 잘 하는 일입니다. 저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줍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최고로 좋은 은사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눈이 몹시 내리고 추운 어느 날,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 한 분이 가구점 안을 기웃기웃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점원은 추운 날씨에 할머니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 안으로 들어오시게 하고 따뜻한 차도 한잔 대접해 드렸습니다. 심심하던 차에 가구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명도 해드렸습니다. 이윽고 버스가 오자 점원은 할머니를 잘 부축하여 버스에 태워 드렸습니다. 할머니가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손을 흔들며 떠나갔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나 지났을까? 점원은 특별한 편지 하나를 받았습니다. 발신인은 미국의 강철 재벌 카네기였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점원이 편지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내용인즉, 카네기씨는 지난 아무 날 자기 어머니에게 친절하게 해준 데 대하여 고맙다고 말하고, 이번에 자신이 새로 지은 회사에 책임자로 와 줄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웃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라면 회사를 맡겨도 충분히 감당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선행을 베풀어 주고 사랑을 베풀어 주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딱히 은사니 뭐니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이웃을 위해 사랑을 베풀어 따뜻한 마음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까지도 하나님은 귀히 보시고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생활습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달란트(은사)를 묻어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떠한 달란트를 받았는지 조차 모르거나 그 달란트를 오늘 본문의 주인공처럼 땅에 고이 묻어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재앙이 된다는 사실을 오늘 두려운 마음으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마25:24-30)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무시하거나 묻어 두게 되면 이처럼 비참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를 하나님은 “악하고 게으른 자”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의외로 이와 같은 교인들이 많이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긴 세월 목회하면서 이렇게 교회에만 다니면서 가장 지혜로운 척 하는 교인들을 어렵지 않게 많이 만나보았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해 스스로만 잘 난 사람들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교회나 이웃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 없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챙기며 살아가는 부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척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경고를 이미 남겨 두셨기 때문입니다.
(렘48:10)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당할 것이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영원히 죽어야 마땅한 우리들을 선택하시고 예수님의 생명을 담보로 구원하여 주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명을 던져버리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그것은 엄격히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달란트를 맡겨주시고 저마다 최선을 다해 열매를 맺히도록 명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악하고 게으른 자와 같이 온갖 변명으로 늘어놓지만 주님은 그 중의 단 한 마디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고 단칼에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맡기신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그와 같은 초라한 변명이 아니라 충성이기 때문입니다.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눅13:6-7)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더 이상 어리석게 세월만 낭비하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어리석은 삶을 두려운 마음으로 청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나무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사 또 다시 새로운 한 해를 기회로 주셨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도록 충성하는 지혜로운 심령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잠18:1)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의 속 깊은 곳까지도 다 들여다보시고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미련하고 게으름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도움을 청마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값진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는 자는 복된 자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영국 런던의 워커 미술관에는 콘트러라는 화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그 그림은 폼페이라는 도시가 베스비우스 화산의 폭발로 인해 그 화산재에 묻혀 전멸당하는 비참한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화산재와 용암이 비와 눈처럼 폼페이 성에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화산재와 불을 피해 성 밖으로 몰려 나갔습니다. 이들로 인해 대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도 성문 곁에서 묵묵히 서 있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그 성의 문지기였습니다. 뜨거운 화산재와 불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그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맡은 일에 충성하고자 그는 서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바로 '충성'입니다. 충성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잃어버리지 않는, 다시 말해서 죽음을 이기는 사명감인 것입니다.
그 달란트로 이를 남겨야 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주신 달란트를 오늘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받은 달란트로 이를 남기고 열매를 맺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을 받았으면 또 다시 다섯을 남겨야 하고 둘을 받았으면 또 다시 둘을 남겨야 합니다. 비록 하나를 받았을지라도 하나를 더 남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은 오늘 우리 성도들의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데 두 가지 필수적인 우리들의 준비사항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착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충성을 다하는 열정입니다. 왜 착하여야 하는고 하니 착한 마음의 소유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열매를 맺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눅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신경 쓰고 사모하고 또 준비해야 하는 가장 소중한 한 가지는 바로 이처럼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이처럼 착하고 좋지 못하면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열매를 맺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먼저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착한 마음에다 한 가지를 더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자들의 호칭이 바로 이처럼 착하고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마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충성”이란 헬라 원문에는 “믿음”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왜 충성이 믿음으로 번역이 되었을까요? 결국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충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주인이 맡기신 달란트로 열매를 맺히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충성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제대로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김활란 박사께서 63세에 이화여대 총장직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퇴임 후 그가 처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감리교의 감독인 목사님이었습니다. "제가 이제 목사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될 수는 없습니까?" 그때 김 박사는 63세였으므로 감리교 헌법으로는 목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을 길이 없자 김 박사는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 가서 두 학기 동안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비록 목사 안수는 받지 못했지만 돌아오셔서 강원도와 충청도로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분은 억압받고 무시당하는 여성들의 교육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습니다. 자신은 비록 첩의 딸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복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이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며 강원도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생명이 다할 때까지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려는 때에 제자와 친구들이 모여 슬퍼하자, "여러분,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소. 내가 죽거든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할렐루야' 코러스를 불러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면서 위대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어떤 흔적을 남기고 갈 것인가? 내 죽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가?'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는 하루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7년도가 마지막 저무는 그 끝 날입니다. 새롭게 달력을 받았을 때는 제법 두툼하고 많은 날들을 받은 것 같았는데 어느새 그 모든 날들이 다 지나가버리고 오늘 그 마지막 날을 맞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생도 꽤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 그 날들이 부질없이 다 지나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마지막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 마지막 날에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기대하며 당당하게 떠날 수 있으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 종이 45년 동안 경험한 인생들의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그렇게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거의 모두가 후회하고 안타까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이 헛되지 않도록 누구나에게 다 같이 달란트를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달란트를 꽁꽁 묻어두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바로 그렇게 했던 사람이 엄청 무서운 심판을 받고 쫓겨난 것을 오늘 본문에서 똑똑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이익을 남겨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주어진 인생을 낭비하고 초라하게 홀로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남들이 죽는 것을 목도하게 하고 오늘처럼 한 해의 마지막을 주시며 교훈으로 삼게 하시는 것입니다. 깊은 깨달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우리들도 복을 받고 우리들의 자손들도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멋들어진 남은 삶을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하나님께 이 날을 거룩히 구별하고 몸과 마음과 예물을 드리며 예배로 헌신하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과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7년 12월 31일
송년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