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5일 주일낮설교 (나의 죄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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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5 March 2018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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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죄 때문에
고난주일
3. 25, 2018
本文:이사야53:1-6
說敎:崔 仁 根 牧師
최초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이 누군지 혹시 아십니까? 그리고 그렇게 성경을 번역한 대가는 또한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잘 아시다시피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은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박사님이십니다. 신구약 성경을 그대로 베껴 써도 몇 년이 걸릴 것인데 그것을 번역을 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 써 놓은 성경을 읽기만 하려 해도 하루에 석장씩 읽어야 겨우 1년에 한 번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방대한 책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틴데일 박사님은 그것을 다 번역을 하였다고 하니 그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 놀라운 작업을 완성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그렇게 성경을 번역하였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형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영국의 경건운동과 개혁운동에 불을 당긴 그는 1536년 10월 6일 금요일에 성경을 영어로 옮겼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거룩한 너무나도 거룩한 성경을 감히 세속적인 말로 바꾸어 놓았다는 참으로 어이없는 죄목으로 그는 그렇게 비참하게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75년이 지난 1611년에 그의 번역을 기초로 하여 흠정역(The Aythouized Version)성경이 제임스 왕(King James)의 출판 인허에 의하여 발행되었습니다. 그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려 900여개의 서로 다른 언어와 방언으로 성경이 번역되고 인쇄되었는데, 이 일에 있어서 틴데일 그는 참으로 선구자로 우뚝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당시 성경을 번역하면 죽게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목숨을 내 놓고 후세대의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서 초개같이 희생의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희생은 언제나 고귀한 역사를 이 땅에 남겨 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은 희생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거룩한 대명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그 소중한 몸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가룟 유다에게 팔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없어서 악당들에게 붙잡히신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와 같은 인간들을 순식간에 멸하실 수 있는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마26:53-54)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 지리요 하시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에서 비참한 고통을 감래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왜 주님은 그렇게도 허망하게 말할 수 없는 그 무서운 고통을 다 짊어지시고 죽으시기까지 희생을 하셨을까요? 그 해답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사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말씀을 곱씹으며 묵상해 보신다면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희생이 무엇 때문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은 2018년도 고난주일입니다. 우리 주님의 고난과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되새겨보면서 신선한 변화와 결단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나의 죄 때문에
고난주간은 매년마다 우리들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고난을 그때마다 늘 전하고 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들에게는 그 어떤 변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이나 삶에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특별한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관념적인 신앙, 피상적인 신앙인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이 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새롭게 결단하고 달라지고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직장 다니듯 그렇게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고만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올 해 우리교회의 목표가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는 길은 결코 목표만 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고난주일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대신해서 죽으시기까지 희생하셔서 우리들을 죽을죄에서 건져내시고 풍성하고도 놀라운 축복으로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이제는 우리도 결단하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이 이렇게 새롭게 출발하는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축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앞서 틴데일 박사님의 거룩한 희생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성경을 번역하느라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는데 기다리고 있었던 결과는 화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와 같은 고난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900가지 이상의 다른 성경으로 번역이 되고 전파 되는 기적을 이루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가 어이없게도 그 죄인들의 손에 잡혀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셨습니다. 말은 이렇게도 간단합니다. 하지만 고난은 현실입니다. 결코 말이나 이론으로 이해되어지거나 설명 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선 성경에서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에 관한 예언과 현실을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에서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시22:11-21)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하시게 될 고난을 예언해 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십자가에 달리시고 하신 말씀들이 거의 다 이 예언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고난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반드시 겪으셔야만 했던 피할 수 없었던 고난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에 예언 되어진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사탄 마귀와 예수님의 대결이 이렇게 예언 되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탄 마귀는 우리들을 죄인 되게 한 요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는 사탄 마귀와 그것들로 인해 임하게 된 사망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발꿈치를 상하시고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에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죄를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상하고 찔리시는 엄청난 역사를 만들어 놓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죄의 두 가지 종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허물이요 또 다른 하나는 죄악이 바로 그렇습니다. 허물은 소극적인 죄요 죄악은 적극적인 죄입니다. 소극적인 죄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거역하고 하지 않는 죄를 일컫는 말이요 적극적인 죄는 그 반대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어기고 하지 않는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죄의 현실입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덕지덕지 앉은 우리들의 죄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이 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와 희생이 필수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도 무서운 십자가를 지시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허리에는 창에 찔리심으로 물과 피를 쏟으시고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와 같은 우리 예수님의 고난을 기리며 고난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영적으로 거듭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도 우리들을 죄에서 건지시고 죄의 형벌에서 해방시켜 주시려고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셨건만 그것을 인식하고 감사하며 그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이는 그와 같은 주님의 희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식하면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무식보다 더 무서운 죄는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스승의 가르침을 잊어버린 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인간들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님의 공과 스승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눈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실제로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와 같은 희생과 고난을 설명하고 그것이 바로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하신 것이라고 설명해 보십시오. 당장에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모르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분명한 한 가지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도 모진 고난을 다 감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요일4:7-10)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들이 고백하든 말든 이렇게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렇게도 모진 고난을 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을 우리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고 사망에서 건져 천국으로 인도해 가시는 길이 오직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이처럼 놀라운 숨은 진리를 깨닫는 자는 오직 영적으로 거듭나야만 가능하니 오늘 우리들이 반드시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제목 : 아이의 헌물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차를 타고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이스크림을 파는 상점 옆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열 살 된 그의 아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면 더위를 식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차를 멈추고 다임(10센트, 약 1100원)을 하나 건네주면서 빨리 가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오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순식간에 아이스크림 상점에 뛰어갔다가 잠시 후 거의 울상이 다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아직도 다임(10센트)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아이스크림을 팔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차에서 내려 상점으로 가서 웬 일입니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상점주인이 말하기를 우리는 9센트짜리 아이스크림은 팔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아들은 9센트짜리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목사인 아버지는 사태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이미 그 마음속에 10센트 가운데 1센트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차에서 상점까지 가는 순간에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도의 숨을 내쉬고 상점주인에게 그 모든 사실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로 신경을 쓰게 해드려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였습니다. 상점주인이 네가 1센트로 하나님께 바치기로 원했단 말이냐? 고 물으면서 자, 네가 가진 10센트 전체를 네 하나님께 드리거라. 내가 아이스크림을 거져 주마!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이 한 스쿱, 두 스쿱, 세 스쿱을 뜨더니 철철 넘치는 아이스크림을 그 아이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 아이는 아직 10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화답하려는 마음 자세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이렇게도 놀라운 우리 주님의 희생과 사랑을 제대로 깨닫는 성도들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은 본능적인 욕구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자신의 본능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화답하는 일을 더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교회에 나가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오로지 자신의 유익과 영달을 위하는 교인들이 많으니 피 흘리신 예수님의 탄식이 들리는 듯합니다. 이것이 다 육신에 젖은 까닭이니 우리들이 영적으로 거듭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에 화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제대로 된 신앙생활의 본질에 접근해 봐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인격을 갖춘 인간이라면 그 기본이 받은 바 은혜에 보답하고 화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잊어버린 자는 금수보다 더 못하기에 깨닫고 일어나 변화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Tip을 놓는 것은 미국에서 사는 우리 모두의 지극히 정상적인 상식입니다. 한 번은 타코마에서 한국인끼리 식당 앞에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떠난 손님들이 파킹장까지 나왔는데 웨이츄레스가 그곳까지 따라 나와 팁을 달라고 하여 생긴 싸움이었습니다. 싸움도 멋진 싸움이 있고 부끄러운 싸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싸움은 부끄러운 싸움이었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상식도 지키지 못해 벌어진 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벨뷰에서 한 식당에서는 79불어치 식사를 하고 천불의 팁을 놓고 간 손님이 있어 웨이터가 따라 나가 파킹장에서 잘 못 놓고 가신 것이 아니냐며 팁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사는 웃으면서 “당신은 충분히 그것을 받을만한 서비스를 제공하였습니다.” 하면서 다시 그 팁을 웨이터에게 주고 가서 시애틀타임즈 신문에 기사화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어떤 멋을 지니고 있는지요? 팁은 상대방의 섬김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결코 말로만 “감사합니다.”하고 나올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을 위해 희생하시고 섬기시기를 피를 흘리고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께 과연 우리는 어떻게 화답해야 하겠습니까? 최근 한국 신문에 목사들이 서로 다투듯 기고하여 성도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니 지금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감사의 표시요 사랑의 화답인 것입니다. 야곱이 부모형제를 떠나 머나먼 외삼촌댁으로 도망을 갈 때 뜻밖에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풍성한 축복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여행경비요 생명 같이 소중한 기름을 그 하나님께 다 부어드리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함께 하시고 무사히 돌아오도록 도와주신다면 반드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며 화답하겠다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창28:18-22)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그 누가 십일조를 율법이니, 안 해도 되느니 하는 말로 야곱의 십일조를 가지고 장난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섬김과 희생에도 감동을 받으면 천불이라도 아끼지 않고 주고 가거늘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고 생명을 받은 우리들이 어떻게 예물 드리는 일로 시비를 걸고 따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인간들의 인색하고 타락하고 자기중심적인 탐욕을 너무나도 안타깝게 여기시는 하나님은 아예 명령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막12:30)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고 말입니다. 무엇으로 사랑할 것입니까? 무엇으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습니까? 바로 예물입니다. 돈입니다. 그러므로 돈주머니를 굳게 잠가 두고서 사랑을 운운하는 것은 語不成說(어불성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생명 주신 우리 예수님께 돈으로 섬기며 사랑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최고로 여기는 것이 바로 그 돈이기 때문입니다.
노르웨이의 어느 도시에 커다란 건물이 하나 있는데 시계탑이 이 건물에 붙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시계탑 밑에 한 마리의 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일꾼이 잘못하여 높은 데서 미끄러져 떨어졌습니다. 까마득한 아래는 단단한 아스팔트였습니다. 떨어지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은 뻔 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바로 그 밑을 양치기가 이끄는 양떼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모여선 사람들이 "저런!", "저런!"하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양떼 위에 "퍽"하고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꾼은 벌떡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데도 다친 곳이 없었습니다. 아프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쌍하게도 한 마리의 양이 그의 밑에 깔려서 죽어 있었습니다. 그 일꾼은 자기의 목숨을 대신하여 죽은 양을 두고두고 기념하기 위하여 시계탑 밑에다 그 양의 조각을 하여 감사의 뜻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살리시려고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섬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나이만큼 주님 죽으신 고난주일은 지나갔건만 우리는 아직까지도 그 주님을 기념할 만한 그 어떤 흔적도 이 땅에 남겨 놓지를 못했습니다. 건축하다 떨어진 일꾼을 살린 양은 노르웨이의 한 도시 시계탑 밑에 새겨져 있는데 우리 주님의 희생은 과연 어디에 새겨져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믿음의 옷깃을 여미고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이 땅에 남겨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고난주일의 의미요 결단이 될 것이기에 말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8년도 고난주일입니다. 해마다 오는 연중행사가 되지 않도록 새롭게 믿음의 옷깃을 여미고 믿음의 변화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고난을 심장이 저미도록 가슴으로 느껴야 하겠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인격자이고 신앙인이라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에 화답하고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과 미물들도 주인의 구유를 아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 희생이 또한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죽 하면 “물에 빠진 사람 살려주었더니 내 보따리 내 놓으란다.”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도 背恩忘德(배은망덕)한 자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법인데 우리 신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희생에 화답하는 최상의 길이 바로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최고의 목적이 바로 우리들의 영혼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 돈 벌고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더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최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길인 줄 알아 힘을 다해 영적으로 다시 거듭나는 삶을 추구하고 또한 그 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오늘도 정성을 바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소중한 우리 모든 예배자들에게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영 육간에 충만 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8년 3월 25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