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7일 주일낮설교 (일어나라 함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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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7 January 2019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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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함께 가자!
1. 27, 2019
本文:마태복음26:36-46
說敎:崔 仁 根 牧師
함께 하는 삶, 함께 사는 세계를 두 세기 전에 눈 뜨게 해준 "요한 웨슬리의 일 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삶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준 어떤 사람의 권면이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며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면 명심하세요. 당신 혼자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동지를 찾으십시오. 없으면 동지를 만드십시오. 성경은 혼자서 고독하게 믿는 종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웨슬리는 이런 고백도 하였습니다. "나는 마틴 루터의 생애라는 작품의 번역을 마쳤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하나님의 붙잡으신 축복된 도구였다. 그러나 아!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그는 충실한 친구가 한명도 없었다. 어떤 위험을 무릎 쓰고라도 하나님의 일에 크게 방해가 되는 그의 거칠고 다루기 힘든 정신과 영혼에 대해서 지독하게 열정을 갖는 그런 것을 명백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꾸짖어 줄 친구가 없다는 것이 정말 애석하였다." 우리는 혼자서는 안 됩니다. 모두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참으로 이기(利己)로 가득 찬 오늘 우리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귀한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진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민하고 슬퍼하다가 마침내 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고 등 3명을 선별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들 3명은 아마도 열 두 제자들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 가장 마음에 두셨던 제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다가 돌아보시니 기도는커녕 그들은 하나 같이 다 졸고 있었습니다. 섭섭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오셔서 그들을 깨워두고 다시 나가셔서 기도하시다가 돌아와 보니 아예 그들은 쓰러져 자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얼마나 실망하셨겠습니까? 얼마나 주님은 홀로 외롭고 힘드셨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로 다가 오셔서 짧지만 굵은 한 마디를 하시면서 다시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일어나라 함께 가자!”는 말씀이었습니다. 잠시 동안도 주님과 함께 깨어 있지 못한 채 졸다가 자고 만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은 왜 “함께 가자!”며 데리고 가셨을까요? 주님은 하나님이시고 이 세상에서 못하실 일이 없으신데 왜 이렇게도 초라하고 무능한 제자들을 끝까지 데리고 가셨을까요? 참으로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함께 오늘 말씀을 통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는지,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로서 승리하며 살아갈 수가 있겠는지, 깊은 깨달음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하나님께서 최초로 사람을 만드셨을 때 아담 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여자인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하와를 만드신 이유가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하나의 팁이 되고 있습니다. 함께 그 이유를 성경으로 돌아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창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바로 이것이 홀로 살고 있던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하나님의 이 한 마디가 오늘 우리 인생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제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불어 어우러져 살아가야 함을 이 한 마디와 하와를 만드신 이유를 통하여서 오늘 우리들을 지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현상은 어떻습니까? 혼자 사는 것을 점점 더 선호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 남성들의 25% 이상이 결혼을 기피하고 있다는 증거와 우리 조국에서 혼족들이 수백만 명이나 되고 그들을 위한 상품이 새롭게 개발 되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말세임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구동성으로 하는 고백이 “너무 편하고 좋다.”는 것입니다.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팽배한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삶을 추구하는 현실을 잘 반영해 주고 있는 고백들입니다. 실제로 부산에서는 이렇게 홀로 살다가 죽었는데 거의 4개월 동안 아무도 몰라 백골로 발견된 사건이 최근 일어났습니다. 동아일보의 보도를 보면 최근 혼족들의 삶이 참으로 끔찍하고도 무섭습니다.
[부산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던 50대 여성이 숨진 지 수개월 만에 백골상태로 발견됐다. 지난 금요일인 25일 부산 기장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24일 오전 10시께 기장군의 한 아파트 A(50·여)씨의 집 화장실에서 A씨가 숨져 있는 것을 119와 주민 센터 직원이 발견했다. 발견 당시 A씨는 화장실 바닥에 깔아 놓은 이불 위에서 옆으로 누워 있었고, 백골 상태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이 A씨가 수개월 동안 관리비를 미납하고 연락이 되지 않자 관할 주민센터에 연락했고, 현장을 방문한 주민 센터 직원은 119에 신고해 A씨의 집 출입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 숨져 있던 A씨를 발견했다. 경찰은 A씨가 지난해 10월 초 숨진 것으로 추정했다.](동아일보 1월 25일자에서 발췌)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더불어 사랑하고 함께 가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잠시 동안도 주님과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하지 못한 채 졸고 자던 어리석은 제자들이지만 다시 한 번 더 손을 내 미시고 “함께 가자!”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가슴으로 배워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은 결코 실망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끝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만이 미운 사람, 좋은 사람 구별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같이 가는 지름길이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의 가슴을 심쿵하게 하는 “일어나라 함께 가자!”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션인 것입니다. 함께 그 의미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사람을 알아보려면 위기에 처해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어려울 때, 실패 하였을 때, 병들고 망하였을 때 비로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진실을 알아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예수님 생애에서 지금처럼 절박한 순간은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하늘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초라한 제자들 앞에서도 서슴지 않으시고 마음을 열어 친히 보여주셨을까요?
(마26:37-38)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주님의 그와 같은 절박한 심정을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위로도, 힘도, 기도도 보태 드리지를 못했습니다. 졸다가 자고 마는 초라한 모습으로 주님을 실망시켜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그들의 연약한 육신을 인정하시고 이해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실망하고 역정을 내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연약한 육신의 한계를 인정하시고 이해해 주시는 그 마음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님처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정과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미워하고 절교하고 돌아서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이 연약하여 남의 말을 너무나도 잘 합니다. 우리는 욕심이 많아 선뜻 손을 내밀고 호주머니를 열지 못합니다. 우리는 식견이 좁아 상대를 충분히 잘 알지도 못하고 또한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만든 관계를 너무나도 쉽게 깨뜨려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도 실망시켜 드렸는데도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또 다시 손을 내미시며,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따뜻하게 다가서시던 예수님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외로운 인생 여정을 홀로 외롭게 걸어가지 말고 함께 가는 친구를 만들고 사랑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그렇게 하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우리 예수님의 사랑은 “이해해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던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가정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병들어 죽자 마르다와 마리아는 너무나도 슬퍼하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들에게 찾아가신 예수님은 말없이 그들과 함께 울어주셨습니다. 하이틴일 때 이 종은 이 광경에 너무나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함께 울어주실 수가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외로운 목회 길에 눈물 날 일 많았지만 주님께서 함께 울어주실 것이란 사실에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 말씀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요11:33-36)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렇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이해해 주고 공감하며 눈물을 함께 흘려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키우셨던 것입니다.
대개 아이들이란 상처가 아물 날이 없기 마련입니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서랍사이에 손가락이 끼이고... 심지어 종이에도 베여서 손가락에 상처가 나기도 합니다. 한 번은 현관 시멘트 바닥을 무지무지 좋아하는 밝은이(생후11개월)가 엄마 아빠가 잠시 딴 곳에 신경을 쓰는 동안 어느새 기어가서 맘껏(?) 시멘트 바닥에서 뒹굴며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얼 잘못 하였는지 '으앙!'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게 아닙니까! 소꿉놀이를 하고 있던 언니(5살) 좋은이가 뛰어 가더니 "밝은아, 울지마, 어휴~ 조심하지..." 하면서 동생을 달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어찌하나 보려고 숨어 있었지요. 동생은 언니가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 참 뒤에 언니는 동생을 감싸 안고 눈물이 그렁그렁 해져 있었습니다. 자기는 아무 상처도 입지 않았지만 동생이 우는 것을 보곤 달래도 안 되니 함께 울어버린 것입니다. 눈물범벅이 된 두 녀석을 보니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하고, 이것이 혈육이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동생의 아픔을 훌륭하게 함께 나누는 언니 좋은이가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는 사람에게는 함께 울어주는 것이 최고의 위로가 됩니다. 다른 구구한 말없이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이 정말 고맙고 감사한 법입니다. 누군가가 울고 있나요? 백 마디의 말보다 함께 마음을 나누며 눈물을 흘려 보세요. 두 사람의 관계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될 것입니다(어느 엄마의 글에서 발췌).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상대를 이해해 주고 공감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음만으로도 만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도 자기와 함께 깨어 있어 기도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고 함께 나누지도 못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제자들이었지만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손을 내 밀어 주시며 사랑으로 다가서 주신 이유는 연약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읽으시고 비록 행동하지 못한 채 가슴에 머물고만 있었던 마음이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초라한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마음에는 있으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연약함의 소유자들인 우리들은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외톨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나타난 것이 없는 마음은 인정하려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비록 나타나지 못한 마음일지라도 능히 그 마음까지도 헤아리시고 인정해 주시고 받아주시는 엄청난 사랑으로 늘 언제나 한결 같이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들을 감동시켜 주시고 그 능력으로 오늘날까지 우리들을 인도해 주시고 계십니다.
통계적인 수치로 따지면, 한국사람 네 명 가운데 한 사람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크리스챤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모두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매주 주일을 지켜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마, 이전까지의 삶으로부터 크게 변화되지 못한, 미숙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미숙한 그리스도인,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 생명으로 인해 삶이 변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 사람은, 세상을 향해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닙니다. 왜냐면 주님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숙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영적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표시가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강력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중보의 기도를 멈추지 않으시고, 우리와 순간순간 교제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심으로, 우리가 그분을 따를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주님을 닮아가는 것은, 말하는 것보다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숙함에 이르기 원하는 우리들에게 로마서 12장 11절로 16절에 있는 바울 사도의 권면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먼저 이 말씀부터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롬12:11-16)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이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어느새 성숙한 그리스도인에 이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작은 변화가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아십니까? 우리 자신이 변화하기 시작함으로써, 우리가 속한 세상의 한 귀퉁이가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시면, 우리는 분명 변화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전보다 나은 사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일에 소망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가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함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바르게 행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하십시다. 우리들이 이렇게 될 수 있도록, 비록 지금은 졸고 자면서 주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우리들이 그렇게 성숙하여 마음에서 행동으로 발전하고 변화 되는 역사를 이루기를 기대하시며 이렇게 지금은 마음만이라도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우리들의 이웃들과 자녀들에게 우리 주님과 같은 이런 가슴 따뜻한 사랑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마음뿐이지만 내일은 행동하고 열매를 맺히는 멋들어진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의 제자들이 될 줄 믿고 기다리는 넉넉한 가슴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도 똥오줌도 못 가리는 미숙아입니다. 하지만 그가 자라나면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과 인내가 있다면 머잖아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풍성한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어야 예수님을 닮아갈 수가 있고 사랑이 있어야 마음만이라도 받아주고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서 특별히 다시 뽑아내신 세 명의 제자들이 비록 지금은 이토록 연약하고 미련하여 자신과 공감하지 못한 채 졸며 자고 있을지라도 때가 되고 훈련이 되어 성숙하게 자라나면 훌륭한 제자들이 될 줄로 믿고 사랑으로 기다리신 것입니다. 훗날 그들은 주님의 기대에 결코 어긋나지 않은 멋들어진 제자들로 거듭나 놀라운 역사를 이 땅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현실의 모습만 보지 말고 능력 받고 거듭나고 변화된 내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주님과 같은 지극한 사랑으로 기다리며 지금은 마음만이라도 훈훈하게 받아주는 멋진 심령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한심한 제자들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으시고 또 다시 손을 내어 미시고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그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는 지금은 한심하고 실망스럽지만 내일에는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새롭게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 포기하지 않으시고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데리고 가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본 받고 배워야 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종은 32살에 우리 교회를 개척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주님께서 취하셨던 이와 같은 놀라운 지도력을 그때 이 종이 가질 수 있었다면 얼마나 놀라운 제자들을 많이 만들어 놓았을까? 싶은 후회가 많습니다. 늘 눈앞에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포기하고 절망하고 돌아서버렸던 어리석음이 지금에 와서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역사해 주신다면 이 세상에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놓을 수 있습니다. 살인마 사도 바울을 불러 복음역사의 획을 그어 놓으신 예수님의 안목을 보시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을 거꾸러뜨리시고 아나니아를 보내실 때 예수님의 제자 아나니아가 뭐라고 반문했습니까? “예수님, 그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 죽이는 잔인한 살인마입니다. 지금도 그런 권세를 받아서 손에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고 항변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처럼 혼비백산하고 따지는 아나니아에게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오냐, 내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쓰려고 택한 특별한 그릇이 되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살인마이지만 나중에는 주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실 복음의 큰 그릇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이 안목을 오늘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 이것이 우리 인생들과 예수님의 다른 점이기 때문입니다. 이 종을 닮아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판단합니다. “목사님, 그 사람 믿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엉망진창입니다. 저런 사람에게 직분을 주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라고 말입니다. 아마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상대가 목사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을지라도 아나니아와 같이 항변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그렇게 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함께 가자!”고 손 내미시는데 우리들이 가로 막아서야 쓰겠습니까? 그리고 나중에 그 사람을 주님께서 우리들보다 더 귀하게 사용하시고 역사를 이루시면 오늘 우리들이 너무나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이 종은 지금 우리교회의 젊은 일꾼들을 바라보면서 너무나도 감사하고 흐뭇하고 기쁩니다. 한 때는 “저게 인간이 되겠나?” 싶었는데 이렇게도 변화를 받아 교회의 허리가 되고 중심이 되는 것을 보니 참으로 감격스럽고 흐뭇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말에 3일 동안 전교인 수련회를 하였습니다. 그 모든 프로그램 진행과 찬양과 식사를 누가 다 감당하였습니까? 저들끼리 의논하고 준비하고 진행하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35년의 수고가 헛되지 않아서 전에는 초라하고 무능한 것 같았으나 이제는 의젓하고 든든하여 교회의 모든 일들을 감당하고 저마다 십일조도 풍성하게 바치니 재정도 배로 더 늘어나 교회가 단단하게 자라는 것을 바라보면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 같아 참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또 다시 기회를 주어보는 것, 이것이 우리 예수님의 마음이요 오늘 우리들의 마음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결코 실망하지 아니하고 기회를 주고 또 주며 기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스탠리 스타인은 불행하게도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는 루이지애나주 카아벌에 살고 있는데 나환자 수용소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병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나병이 더욱 악화되면서 완전히 눈이 멀어져 버렸습니다. 그도 한 때는 죽기를 바랐는데 그것까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에 놀라운 마음의 변화를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게 남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없을까? 그러자 자기에는 아직도 정상적인 정신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그 정신으로 책을 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도서실에 가서 작가가 되는 법에 관한 책을 빌려 왔습니다. 책을 가지고 더듬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어떤 의사와 마주쳤습니다. 그 의사는 스탠리에게 "스탠리, 그 책은 눈먼 사람에게는 좀 이상한 책이 아니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적극적 사고를 하게 된 스탠리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모든 장애물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기 병을 소재로 하여 다른 사람들이 자기 책을 쓰게 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는 녹음기를 마련해서 거기에다 다 녹음을 해서, 누군가에게 그걸 써달라고 부탁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는 장황하게 의사에게 설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사실상 생죽음 상태에 있을 때 그는, "삶에다 마음을 걸고, 인류와 재회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앞도 보이지 않는 얼굴을 의사를 향해 돌리고 자신어린 목소리로 선언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아직도 정신은 건전합니다. 그래서 그 정신을 이용할 작정입니다." 그리고서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가 그 모든 난관을 딛고 책을 써 냈기 때문입니다. 그 책이 바로 [이제는 외롭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그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불행을 기회로 삼아 책을 쓰는 작가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덧 축복과 희망을 안고 시작했던 1월도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남은 삶을 복되게 승리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당당하게 이웃들 앞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참으로 아름다운 모범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던 제자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새롭게 세우심으로 역사에 길이 남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이해해 주시는 사랑이었으며 마음만이라도 가슴으로 받아주시는 사랑이었으며 또 다시 기회를 주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사랑으로 남은 삶을 승리하며 예수님의 자랑스러운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천사와 같은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몸을 불살라 줄 만큼 헌신적이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13:1-3). 힘을 다해 이해해 주고 마음만이라도 감격하며 넉넉하게 받아주고 한 번 더 기회를 주며 기다려 주는 가슴 따뜻한 사랑이 우리들에게 있을 때 우리들도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과 같이 승리하는 일꾼들이 될 수 있고 또 다른 재자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일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만나시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하나님의 풍성케 하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영혼가득 넘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9년 1월 27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