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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9년 3월 10일 주일낮설교 (함께 갑시다!)

2019년 3월 10일 주일낮설교 (함께 갑시다!)

      

       함께 갑시다!

 

 

3. 10, 2019

本文:히브리서10:19-25

     : 牧師

 

 

 

   [2005년 11월 일본 후쿠이현(福井県)오오노시(大野市)에 있는 화장장 소각로에서 2명의 유해가 발견됩니다. 이 화장장은 30년 넘게 사용하지 않았던 곳이었습니다. 유해에서 어렵게 찾아낸 치아의 치과기록 등을 살펴본 결과 이 유해의 주인은 80세 남성과 82세의 그의 아내로 확인됐습니다. 30년 넘게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이곳에서 이들은 어떻게 유해로 발견됐을까요. 화장장 부근엔 승용차 한 대가 시동이 걸린 채 놓여있었습니다. 차 안에서 클래식 음악이 큰 소리로 흘러나오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한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찾아갔는데요. 차 안에는 주유소 영수증 뒷면에, 이들 부부가 집을 나온 뒤 취했던 행동이 상세하게 적혀있었습니다.

오후 4시 30분, 차에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다

오후 8시, 아내와 함께 집을 나왔다

차로 형제의 집과 추억의 장소를 돌아본 뒤 화장장에 도착했다

아내는 아무런 말없이 차에서 기다리고 있다

, 땔감으로 화장을 준비 한다

오전 0시 45분에 점화한다. 안녕

경찰은 노부부가 화장터에서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으로 결론지었습니다. 또 이들이 로프를 이용해 문을 닫았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부부가 소각로에 나란히 누워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합니다.(2017년 10월 1일 중앙일보에서 발췌) 일본은 노인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노인이 노인을 돌보아야 하는 현실이 되어 이렇게 말년을 비참하게 자살로 마감하는 일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연로한 노인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60%가 노인이라고 하니 참으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이 비단 일본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너무나도 이와 같은 안타까운 소식들이 많이 들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은 좀 있고 말년이 외로운 노인들은 안락사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스위스에 가서 조용하게 생을 마감하기를 원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두 사람이 그렇게 하였고 지금도 107명이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현실을 직시하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사명과 삶의 방향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함께 사는 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이렇게 혼자 살다가 비참하게 죽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를 뒤져보아도 혼자서 행복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은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항상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고 더불어 사랑하며 살도록 명령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꼭 둘씩 짝을 지어 내어 보내셨습니다.

 

(막6:7)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눅10:1)

이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함께 사는 인생과 함께 하는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혼자서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잘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진정한 예수님의 사람이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갑시다!


  

   한 랍비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랍비는 이 제자에게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하는 기도문을 외우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은 처음 몇 줄밖에 외우지 못했습니다. 다른 기도문에 대해서도 모두 그랬고, 지금까지 가르친 것도 거의 외우지 못했습니다. 랍비는 그 제자를 나무랐습니다. 젊은이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갔습니다. 며칠 뒤 랍비는 이 젊은이가, 앓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 가서 거들어 주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일해 돈을 보내는 등 많은 선행을 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랍비는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에 생각한 건 이내 행위로 들어간다. 그러나 여러 권의 책을 읽어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마음을 밭갈지 않는다면 알고 있는데 머물고 만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성경을 다 알고 외우고 터득하였다고 할지라도 이처럼 아름다운 선행으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으로 무섭도록 경고하고 계십니다.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새롭게 장로로 권사로 안수집사로 피택을 받은 사명자 여러분,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이웃들에게 유익을 주고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들에게 축복을 만들어 내는 값지고 아름다운 헌신자로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가슴으로 말씀을 받고 온 몸으로 실천하여 값진 일꾼들로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로 거듭나시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히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는 말씀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구체적으로 해 나가야 할는지에 대한 해답입니다.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겨 두고 주님 곁으로 가는 날까지 순종하고 지켜나가는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함께 가려면 무엇보다도 함께 가야 할 대상인 이웃들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공감대를 형성하여야 합니다. 그와 같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결코 같이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실라가 단짝이 되어 그렇게도 복음증거에 하나가 되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만 서로 헤어져 따로 다니게 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 사이에 마가라는 사람이 끼어서 그 마가에 대한 생각이 서로 엇갈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행15:36-41)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함께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당대에 두 번째 가려면 서러워 할 만큼 위대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인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둘 사아에 마가라는 사람이 끼이게 되니 의견이 대립되고 결국은 갈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자세입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고 양보하고 참으면 함께 갈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게 되면 결국 갈라지게 되고 함께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돌아보는 것은 고도의 인격과 신앙을 겸비해야만 가능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 여러분, 본능적으로 먹이를 찾아다니며 사냥감을 찾는 곰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까마귀를 보았다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이게 웬 떡인가 하고 잡아먹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곰이 허우적거리는 까마귀에게 다가가 건져주고 잡아먹지 않는 모습이 누군가의 카메라에 잡혀 유투브에 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이지 않습니까?(유투브 동영상 감상) 말 못하는 짐승들도 이처럼 이웃을 돌보며 함께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그 하나님을 섬긴다는 성도들이 이웃에 대해 이만큼의 긍휼이나 돌봄이 없다면 우리들이 어찌 예수님의 제자라 일컬음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서로 돌아보는 일에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초대교회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행2: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자세가 서로 돌아보는 삶인 것입니다. 이번에 장로와 권사, 안수집사로 피택된 여러분들이 반드시 가슴에 되새기고 지켜나가야 할 섬김의 자세가 바로 이러해야 함을 순간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마지막 때에 이처럼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서로 돌아보는 일꾼들이 되기를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랑과 선행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가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사랑과 선행으로 헌신해야만 합니다. 모든 것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한 목표로 달려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한 배로 태어난 형제들도 함께 가기가 어려운 시대인데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남이 함께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적과 기적으로 그들에게 굶주린 배를 채워주시고 온갖 질병을 고쳐주시니 벌떼처럼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복음을 전하시고 함께 하늘나라를 이룩해 나가자고 외치시니 모두가 입을 삐죽이며 떠나가 버렸습니다. 수천수만 명이 운집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금까지 따랐던 것은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요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이기적인 정신으로는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선행입니다. 서로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헌신하게 될 때 비로소 어려움도 극복하고 자신의 유익을 양보하면서 함께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왕이 어떤 사나이에게 사람을 보내어, 즉시 자기에게로 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나이에게는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그가 몹시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 그 친구를 자기의 제일 다정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친구 역시 사랑하고는 있었지만 첫 번째 친구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친구는 친구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왕의 명령을 받자 그는 자기가 어떤 악한 짓을 하여 벌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여 두려웠기 때문에, 혼자서 왕에게 갈 용기가 나지 않아 세 친구들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이유도 말하지 않고 일언지하에 싫다고 거절을 하였습니다. 두 번째 친구에게 부탁하자, 궁궐 문까지는 함께 가지만 그 이상은 갈 수 없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친구는 의외로. , 함께 가주지. 자네는 아무 것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조금도 두려워 할 것이 없네. 내가 함께 가서 임금님께 그렇게 말씀드려주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왜 세 친구들은 각각 그렇게 말했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 번째 친구란 곧 재산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돈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지라도 죽을 때에는 고스란히 남겨두고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친구는 곧 친척이요 친구들입니다. 무덤까지는 따라가 주지만 그를 거기에 남겨 두고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세 번째 친구는 선행입니다. 착한 행실은 평소에는 별로 눈을 끌지 못하지만, 죽은 뒤에는 영원히 그와 함께 있기 마련입니다. 함께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놀라운 축복과 면류관으로 보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이와 같은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 격려하며 끝까지 함께 가는 멋진 동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결코 포기하거나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들의 이와 같은 연약함을 아시고 소중한 진리 하나를 우리 곁에 남겨 두셨습니다.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상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빼어나고 뛰어나야만 그들 앞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상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시고 우리들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그 소중한 상을 바라보고 끝까지 사랑과 선행으로 연약한 이웃들과 동행하며 함께 가는 멋들어진 일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미국 알칸소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전동차를 타고 다니는 핸디켑을 가진 급우 브렌든을 유심히 본 학생이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브렌든의 전동차가 너무 낡아서 힘들어 하는 것을 본 그는 그를 돕기 위해 무려 2년 동안이나 알바를 해서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새 전동차를 사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선행이 매스컴을 타고 온 세계에 퍼져 결국 한국의 뉴스체널 글로벌 TV에까지 나왔습니다. 참으로 함께 갈 좋은 친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함께 가려면 누군가가 사랑과 선행으로 이끌어 주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은혜 받은 진정한 성도들은 일단 모이기를 힘쓰는 자들입니다. 초대교회에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이와 같은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행2:44-4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는 바와 같은 은혜 받은 성도들의 특징은 이처럼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기를 힘쓰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는 이 종이 평생 목회하면서 경험한 바와도 일치합니다. 믿음에 굳게 선 성도들은 교회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함께 모여 협력하고 예배드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음을 지금껏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들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히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이란 바로 사탄 마귀에 붙잡힌 자들을 뜻합니다. 교회에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모이는 것을 방해하고 거부반응을 가지도록 종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렇게 함께 모이지 못하고 무리에게서 오히려 떨어져 나가는 자들을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비판하셨던 것입니다.

 

(잠18:1)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함께 모이는 자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이는 자들에게는 늘 함께 하시면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함께 모이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도 친히 함께 하시겠다고 친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또 그렇게 하라고 친히 명령하고 계십니다. 단순하게 명령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모이는 곳에는 우리들만 모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해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모이는 것은 그 자체로 축복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임을 폐하고 방해하고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탄 마귀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 된 우리 모든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모이기를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도 체험하고 성도들과 어우러져 복된 사랑과 교제도 이루며 함께 힘을 모아 사탄 마귀를 대적하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신앙생활은 깨달음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먼저 자신의 신분을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시고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고귀한 직분을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며 충성을 다 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음의 반대는 무지함입니다. 신앙생활은 고사하고 험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무지해서는 결코 성고하지 못합니다. 최고의 깨달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똑 바로 이해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獨不將軍(독불장군)은 없다고 했습니다. 혼자서 잘나고 혼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해도 그 혼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인생을 바로 살아가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못났지만 끝까지 제자들을 데리고 공생애를 감당하셨던 예수님처럼 더불어, 함께 가는 지혜를 터득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는 사랑과 선행으로 풍성함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조건 없이 이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님과 스승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늘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에 실패하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모이려면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모임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모임을 유지하기 위해서 양보하고 또한 헌신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이고 믿음이고 멋들어진 영적인 덕목입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시고 세상 사람들의 모범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신 우리 모든 빌립보의 성도님들이 이처럼 소중한 진리로 무장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림으로 풍성하고도 넘치는 은총으로 충만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9년 3월 10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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