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28일 주일낮설교 (예수님을 찾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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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8 April 2019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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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찾으라!
4. 28, 2019
本文:마태복음8:5-13
說敎:崔 仁 根 牧師
브라질 쌍카를로스에서 있었던 한 이야기는 말없이 가슴에 전율이 흐르는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동물애호가인 루시아라는 여성이 우연히 자신의 집 앞을 서성이는 낯선 개 한 마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직감적으로 배가 고픈 유실견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루시아는 먹을 것을 봉지에 담아가지고 나와 그 개 앞에다 펼쳐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개는 조금 음식을 먹는 척 하더니 더 이상 먹지 않자 그 봉지를 묶어 개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개는 즉시 그 봉지를 물고 어디론가 급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날마다 루시아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 때마다 루시아는 음식을 넣은 봉지를 개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시아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개에게 음식을 물려주고 뒤따라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개는 위험한 도로를 건너고 산을 넘어서 무려 3km 이상을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자동차 폐차장이 있는 으슥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버려진 고양이, 닭, 노쇠 등 여러 짐승들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음식을 가지고 간 개가 음식을 내려놓자 굶주렸던 짐승들이 달려들어 그 음식을 먹고 있었고 개는 멀찌감치 앉아서 마치 어머니처럼 흐뭇하게 음식을 먹는 동료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루시아는 그 날 이후 버려진 짐승들을 위해 매일 같이 음식을 준비하고 특별히 그 개를 위해서는 따로 음식을 준비하여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그 기특한 개에게 릴리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루시아는 3년을 그렇게 릴리카와 버려진 불상한 동물들을 먹이며 보살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릴리카가 그곳으로 찾아 온 뱀에게 물려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루시아는 눈물로 릴리카를 조용한 곳에 묻어주었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이렇게 매일 찾아오니 그것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루리아는 귀찮고 돈 들어가고 힘들지만 3년이란 긴 세월을 그렇게 섬겼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을 위해 독생자도 아낌없이 보내주시고 그 귀한 독생자를 십자가에까지 내어 주신 우리 하나님께서 찾아 온 우리들을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 하나님을 찾는 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교회는 텅텅 비어가고 세상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술집이 되기도 하고 창고가 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겸손하게 우리 예수님을 찾아갑시다! 엄마를 찾는 어린 아이처럼 간절하게 예수님을 찾아갑시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기뻐하시며 풍성한 은총으로 맞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이 예수님을 찾았다가 기적을 본 사람들을 소개해 드리면서 우리들도 그와 같은 기적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말씀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풍성한 깨달음과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찾으라!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찾으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만족하고 사는 인생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음을 예상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 아이만큼도 엄마를 찾지 않고 예수님을 어리석은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을 찾지 않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간절히 찾으면 만날 것이라.”고 귀띔해 주셨겠습니까?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렘29: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되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절히”, “전심으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의 절절함이 결여된 무성의를 이미도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적당하게 찾는 것이 아니라, 필요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 한 간절하고도 절절한 정성을 다 하라고 조건을 붙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하여 찾고 또 찾으면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겠다고 친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찾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만나 주겠다고, 그리고 죽지 않고 살게 하겠다고 보장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찾는 만큼 찾아 얻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암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마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 결국 성경의 주인공이 되었던 위대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섰던 백부장
오늘 본문은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백부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군사를 100명이나 거느리고 있는 군대의 장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이렇게 군대를 지휘하고 100명이나 휘하에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면 거칠고 거만하고 권위적일 것으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에게서 그와 같은 어리석은 모습은 전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마8:5-7)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는 말씀과 같이 그는 자기가 부리고 있는 하인 하나가 병들었다고 예수님을 친히 찾아와 좀 고쳐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온 인생 여정에서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린 지휘관이 과연 이렇게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까요? 명령 한 마디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군사들이 백이나 있는데 그들의 지취관인 자신이 직접 그 먼 곳까지 불편한 교통편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들이 쉽게 이해 할 수가 있겠습니까? 감동,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우리들과 동일한 감동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두 말씀 하지 않으시고 즉석에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입니다. 이 백부장이야 말로 예수님을 찾아 나선 정성과 간절함이 절절히 묻어나오게 하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는 진정 간절함이 있는 사람이었고, 사랑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2천 년 전에는 분명 오늘날처럼 예수님을 찾아 나서기가 용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단은 교통수단이 없는 시대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자신이 데리고 있는 백 명의 군사들 중에 믿을만한 한 사람을 선택하여 보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직접 자신이 예수님을 찾아 갔던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하인을 고쳐주실 예수님에 대한 예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함입니다. 조금 더 주님께 간절함을 보여드려 하인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인에게까지 깊은 애정을 쏟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인은 주인의 극진한 사랑을 받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그 하인을 위해 자신이 몸소 나서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찾아가면 100% 나음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백부장이 친히 예수님을 찾아가 간청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감동은 그 다음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서 고쳐주겠다고 나섰지만 그는 그 주님을 막아섰습니다. 주님께서 그곳까지 가시지 않고 여기에서 말씀만 하셔도 하인이 나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8:8-9)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크게 감동을 받으시고 이에 대해 칭찬을 하셨던 것입니다.
(마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고 말입니다. 이렇듯 백부장은 병든 하인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 나왔다가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하게 백부장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는 하인을 위해 사랑을 심었고 예수님 앞에서는 믿음을 심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과 칭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언제나 기적이 흘러넘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주 작은 일로도 예수님을 찾아 나서는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
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의 사건은 참으로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기적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에는 모든 유대인들 특별히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고 질투가 넘쳐 죽이려고까지 모의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가장 가증스럽게 여겼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공회 의원이었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뉴스거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는 한 밤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예수님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막연하게 찾아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놀라운 고백을 하였습니다.
(요3:1-2)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고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예수님을 하늘의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그는 예수님의 행하시는 놀라운 사실들을 들었습니다. 과연 그랬습니다. 그는 실로 사려 깊고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의원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와 같은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을 보장 받고 그것에 관한 상담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변 환경 따위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기를 원한다면 주변의 여건을 무시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들은 주변 환경과 여건으로 인해 발목이 잡히고 당당하게 예수님께로 나아오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를 많이 범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짜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최소한 니고데모만큼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기독교는 체험적인 종교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체험이 없으므로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고 그와 같은 확신이 없으므로 주변의 환경에 발목이 잡히고 마는 것입니다. 어쨌든 과감하게 예수님을 찾아 나왔던 니고데모는 실로 놀라운 사실을 배우게 되고 끝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던 니고데모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듣지 못했던 놀라운 진리를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감히 이 놀라운 진리를 선뜻 깨닫지 못했던 니고데모는 그 누구도 듣지 못했던 구원의 진리를 책망을 받아가며 무려 10절에 가까운 긴 설명으로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그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는 멋들어진 제자로 영원히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7:50-51)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고 그는 당당하게 공회에서 예수님을 대변하였습니다. 이는 당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용기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예수님의 몸에 바를 향유를 무려 백 근이나 내 놓는 놀라운 헌신도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요19:39-40)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만약 이것저것 따지고 생각하며 용기 내어 예수님을 찾아 나오지 못했더라면 그는 육신으로 세상적인 부귀나 누리며 살다가 이슬처럼 역사 속으로 살아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찾아 나왔다가 그는 역사적인 위대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왔던 사건을 대단하게 여기고 니고데모를 소개할 때 지체 없이 “전에 예수님께 찾아 왔던 니고데모”라고 반듯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니고데모와 같이 용기와 결단을 내리고 거침없이 예수님을 찾아나서는 그런 멋들어진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니고데모와 같이 구원의 확신과 기적처럼 헌신하는 고귀한 인물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영원히 두고도 변치 않는 축복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찾았다가 대박 난 삭개오
또 한 사람 예수님을 찾았다가 인생의 대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던 사람 삭개오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삭개오에 대해 사도 누가는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습니다. “삭개오의 직업은 세리장이요 그로 인해 많은 돈을 모아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키가 작아서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앞을 내다 볼 수조차 없을 정도였습니다.”고 말입니다.
(눅19:2-3)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이것은 단 두 줄에 불과한 문장이지만 내용은 실로 놀라운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할 뿐더러 가장 혐오하는 죄인들과 동일시하는 정도였습니다.
(마9:10-11)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세리에 대해서는 아주 죄인과 같은 저질의 인간들로 인정하셨습니다.
(마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당시 세리들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나라를 정복하고 있는 로마에 빌붙어서 자국 백성들의 피를 짜고 세금을 각출하여 적국에 바치고 자신들도 착취를 하며 살았던 악랄한 인간들이 바로 세리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삭개오는 바로 그와 같은 세리들을 관장하는 책임자인 세리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돈을 많이 모아 큰 부자가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찾아 나갔으니 뉴스거리가 되었고 또한 성경에 기록되는 역사를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물론 키도 작아서 무리들 틈에 끼일 수 없었겠지만 위에 언급된 상황을 종합해 보면 감히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타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소원을 미리 아시기라도 하신 듯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뽕나무 아래에까지 오셔서 삭개오를 우러러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내가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눅19:5-7)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삭개오와 주변 사람들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먼발치에서라도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기만을 소원하였으나 예수님은 친히 그를 찾아오셨고 뜻밖에도 집에까지 오시겠다고 하시니 깜짝 놀랄 만큼 충격을 받아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기뻐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노골적으로 수군거리며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어떻게 삭개오와 같은 죄인의 집에 유하러 가실 수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욕하는 사람은 욕을 하더라도 삭개오와 예수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향해 일언반구도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남이 뭐라고 한다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흐트러뜨리지 마십시오.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경청하십시오. 그러면 삭개오와 같이 욕하고 수군거리는 사람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눅19:9-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찾아가고 예수님을 만나야 할 가장 소중한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인 삭개오를 따라가신다고 그렇게도 수군거리고 욕하던 그들은 과연 무엇을 얻었습니까? Nothing, Nothing at All이었습니다. 그들이 얻은 것은 초라하고도 부끄러운 육신의 아집, 그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대부분의 인생들의 자화상입니다. 제 앞도 보지 못하면서 이웃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고 욕하고 비난하는 그들, 그것도 모자라 예수님까지도 서슴없이 비판하고 판단하던 그들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삭개오는 변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에는 돈이 최고이고 권세가 최고인 줄 알고 오로지 그것만 얻기 위해 세상 사람들과 담을 쌓고 욕을 먹어도 비난을 받아도 개의치 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리장도 되었고 부자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그 모든 것을 과감하게 내 놓을 만큼 변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고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결단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해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 성경에 기록된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삭개오와 같이 예수님을 찾아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삭개오와 같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이렇게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다이몬드의 가치를 알면 손에 잡았단 그 어떤 것도 내버리고 다이아몬드를 취하는 인간들처럼 예수님의 가치를 알게 되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과감하게 내버리고 예수님의 손을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삭개오와 같이 인생 최고의 선물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9년도 4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고통스러운 고난주간과 영광스러운 부활주일을 보내고 오늘은 그와 같은 은혜를 가슴에 품고 신선하고 새로운 영적인 삶으로 변화를 만들어 가기 위해 예수님을 찾으라는 말씀으로 재무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불교신자들이 Made in China인 불상 앞에 엎드려 복을 달라고 절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죽은 신을 섬기는 종교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사랑과 권세가 넘치는 생명의 주님을 섬기는 참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구원의 참 길과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었던 니고데모와 같이, 예수님을 찾아 나셨다가 평생 모은 재산보다 더 값진 예수님을 만나고 삶의 전환을 이루었던 식개오와 같이 우리는 이제 제대로 된 참 신자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이스라엘 치대의 믿음의 주인공으로 칭찬을 받고 성경에 기록된 복된 인물인 백부장과 같이 우리들도 역사의 주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거룩한 성전으로 올라와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채 만들어지는 변화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변화의 근원은 오직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귀하신 부활의 주님을 똑바로 만나 진정한 변화와 구원을 맛보시는 그런 귀한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9년 4월 28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