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1일 주일낮설교 (성품을 바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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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1 July 2019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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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을 바꾸어라!
7. 21, 2019
本文:베드로후서1:4-11
說敎:崔 仁 根 牧師
[잠을 설치게 했다는 이유로 4세 여자아이를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여중생에게 검찰이 소년법에서 정한 법정 최고형을 구형했다. 인천지법 형사합의 12부(부장판사 송현경) 심리로 9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 기소한 중학생 A 양(16)에게 장기 징역 10년∼단기 징역 5년을 구형했다. 검찰은 “이 사건의 배경, 법원의 양형 조사 결과, 피해자 부모 의사 등을 고려해 구형했다”고 밝혔다. A 양은 법정에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A 양의 변호인은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행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A 양은 2월 8일 오전 5시 반경 인천 부평구 한 교회 유아방에서 함께 잠을 자던 B 양(4)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A 양은 B 양이 잠을 자면서 뒤척이는 등 잠을 설치게 했다는 이유로 일으켜 세운 뒤 벽에 5차례 밀쳐 머리 등을 크게 다치게 한 것으로 조사됐다. A 양은 범행 당일 집이 아닌 교회 유아방에서 B 양과 B 양의 오빠(9)를 만나 함께 잠을 잤다. B 양의 어머니가 새벽 기도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폭행이 이뤄졌다. B 양은 폭행을 당한 후 119구급대에 의해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뇌사 판정을 받았다. B 양은 3월 17일 오전 2시경 끝내 병원에서 숨졌다. 검찰은 B 양이 사망함에 따라 공소장 변경을 통해 죄명을 중상해에서 ‘상해치사’로 바꿨다.](한국 신문에서 발췌)
우리는 안타까운 이 사건을 보면서 두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첫째는 교회에 건성으로 다니지 말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명세기 새벽기도에까지 나간 아이라면 최소한의 예수님의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부모를 따라 갔다 할지라도 그 부모가 새벽기도회에까지 나갈 정도라면 16살이나 먹은 아이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심어 주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아이들의 성품이 사랑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 가르치고 훈련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짜증이 좀 난다고 해서 그곳이 거룩한 성전일진데 그 어린 4살짜리 아이를 얼마나 모질게 학대하고 구타하였으면 죽었겠습니까? 이는 어려서부터 그 성품이 완악하고 모질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순간을 참지 못하고 성질을 부리고 아이를 구타하는 바람에 그 소중한 인생을 다 날려버린 그 소녀를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이 아파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사람됨의 성품으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남달리 그 성품이 급하고 과격하였던 베드로는 오늘 우리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벧후1:3-4)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와 같은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의 성품을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덕이 있는 성품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벧후1: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이 세 가지 믿음과 덕과 지식 중에서 우리들이 바꾸어야 할 성품은 바로 “덕”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자처하여도 이와 같은 덕이 없으면 그 믿음도 헛것이 되고 말기 때문에 하나님은 믿음 위에 덕을 세우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덕”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영어성경에서는 이 덕을 찾아보았더니, Praises(찬미,AV)나, Excellencies(탁월성,RV), 혹은 Goodness(선,NIV)로 번역해 두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덕이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인간다움의 극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믿음이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덕은 우리 스스로 내적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이웃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제대로 된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천국을 소유한 구원 받은 신자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기초로 우리들의 속사람을 덕이 있게 만들어야 가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게 되면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말과 행동이 경망스럽고 천박하여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우리 모두는 그 속사람이 부패하였기 때문에 아주 작은 일에도 이처럼 덕스럽지 못한 모습을 스스로 드러내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게 됩니다.
지난 한 주간 하와이에서 긴 시간 동안 총회에 소속된 리더들이 WMS선교회 연차 총회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50여명의 리더들과 한국 GMS에서 오신 이사장 및 게스트들이 함께 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아침에 식사를 끝내고 호텔 로비 소파에서 몇몇 목사들이 둘러 앉아 내년에 모일 장소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유스러운 자리에서 70대의 원로와 40대의 젊은 목사 간에 의견이 충돌하여 고성이 오가며 덕스럽지 못한 일이 순식간에 일어나 주변 사람들을 엄청 당황스럽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종이 그 선배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절대로 어른이 그렇게 화를 내거나 후배들에게 막무가내로 대하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어른들은 언제나 덕을 세워야 하고 후배들이 존경하도록 사랑으로 거꾸로 섬겨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혼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평생 이민목회를 하였지만 제대로 남겨 둔 것도 없고 평생 총회를 섬겼어도 총회장도 한 번 되지 못한, 한 같은 것이 그 내면에 도사리고 있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덕이라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삶 속에서 골수와 같이 내면 깊은 곳에 쌓이고 준비 되어 있어야만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징기스칸이 아직 그 명성을 떨치기 전에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이웃 동네에 있는 추장이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와서 자신의 아내를 납치해 가버렸습니다. 그 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눈물겹게 깨달았습니다. “힘이 없으면 소중한 것도 지킬 수 없구나!”하고 말입니다. 그 때부터 그는 무술을 익히고 친구를 만들고 군사를 만들며 힘을 키워나갔습니다. 밤낮을 쉬지 않고 오로지 한 가지 힘, 힘을 키웠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과 함께 힘을 키운 군사들을 이끌고 원한 맺힌 그 추장을 공격해 들어가서 아내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는 이미 그 추장의 아이를 잉태하고 배가 남산처럼 불러 있었습니다. 징기스칸은 그 아내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습니다. “나를 용서하시구려, 내가 힘이 없어서 그대가 이런 치욕을 당하게 되었소, 내 다시는 그대를 괴롭히는 사람이 곁에 머물지 못하도록 하겠소, 그리고 뱃속에 있는 아이는 내 족보에 올리고 내가 키우겠소!”하면서 말입니다. 바로 이런 징기스칸이야말로 덕이 있는 덕장이었던 것입니다. 범상한 사내로서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그런 용기 있는 덕으로 그는 아내를 위로하였으며 부하들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덕이 있는 사람이 되어 이웃들에게는 감동을 주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리는 진정 멋들어진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참을 줄 아는 성품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실로 사람이 덕이 있으려면 피눈물 나는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어야만 합니다. 이해심이 없거나 성격이 불같이 급하거나 작은 것 하나라도 양보하고 손해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이는 결코 덕이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식을 쌓으라고 하시고 지식이 풍부할지라도 경망스럽고 교만하게 그것을 나타내지 않도록 절제를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벧후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죽도록 배워야 합니다. 깊은 바다는 촐랑대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아는 사람은 결코 작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딘가에 무게감이 있고 경솔하지 않으며 생각이 깊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처럼 절제할 수 있어야 비로소 덕이 있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덕을 쌓아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리고 이웃들에게는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소중한 한 가지의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래 참는 것입니다. 절제는 곧 인내입니다. 스스로를 다스리려면 고도의 인내심이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에게 절제된 인내로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들보다 참는데 이력이 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히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이 세상 그 누가 우리 예수님과 같이 참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와 같이 우리들도 길이 참는 인내로서 우리 예수님을 배우고 닮으며 쫓아가야 하겠습니다. 이 종은 개인적으로 이렇게 길이 참지를 못하는 한계를 늘 느끼며 스스로 좌절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묵묵히 길이 참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성질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급한 성품으로 이루어 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급한 성품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성품입니다.
(잠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잠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급한 우리들의 성질을 바꾸어 길이 참고 인내하는 성품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와이에서 하루는 펄 하버를 투어 하였습니다. 진주만은 일본이 그곳을 공격하였다가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한 치명적인 곳이기도 합니다. 시간은 딱 30분이었는데 총회 서기가 이 종의 소매를 잡고 자기가 티켓을 끊어 올 테니 바깥에서 뜨거운데 시간만 보내지 말고 우리 둘이서 잠수함으로 견학을 가지고 하여 따라 가 보았습니다. 태어나서 잠수함 속에 처음 들어가 본 것입니다. 1940년대에 그렇게도 거대한 잠수함을 미국이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잠수함은 물속에 잠겨 있어야 하니 완전 폐쇄된 공간뿐이었습니다. 얼마나 좁은지 겨우 겨우 다닐 수 있는 정도로 비좁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장착 되어 있는 어뢰는 6기통 자동차만큼이나 무겁고 거대하였습니다. 그렇게 무겁고 큰 무기를 어떻게 그 비좁은 잠수함 속으로 옮겨 실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거대한 어뢰가 앞에와 뒤에 모두 16개나 장착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가슴으로 감동을 받은 것은 그런 폐쇄된 공간에서 군인들이 기본적으로 6개월 이상 갇혀서 작전을 나가야 했다는 것입니다. 바다 깊은 곳에서, 잠수함이라는 거대한 쇳덩어리 속의 좁은 공간에서 무려 6개월 이상을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인내심이 있어야 가능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가히 존경 그 이상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30분 정도 그 속에서 구경만 하는데도 가슴이 답답해 오는데 그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3층으로 된 침대와 침대 사이의 공간이 30-40cm밖에 안 되니 짐짝처럼 옆으로 집어넣어야만 침실에 들어갈 수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잘 보관한다 할지라도 6개월 동안 신선한 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니 식사라는 것이 통조림 정도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미군들은 희생하고 고생하면서 오늘의 미국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 어떤 환경에서도 불평하지 말고 참고 견뎌내면서 위대한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성품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벧후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하나님은 사람의 여러 성품가운데서 최고의 성품을 사랑에다 두셨습니다. 믿음에 덕, 덕에 지식, 지식에 절제, 절제에 인내, 인내에 경건, 경건에 형제 우애, 그 형제 우애에 사랑을 세우셨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해 두셨던 것입니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랑이 없다면 우리들의 그 어떤 외형적인 믿음이나 헌신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친히 천명해 두셨습니다.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일을 맡은 일꾼들로서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잘 새겨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따뜻한 가슴과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우리들의 돈과 능력과 봉사와 헌신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어 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그 보다 더 귀한 것은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과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있는 99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지금도 가이샤라 입구에 가면 예수님께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어깨에 둘러매시고 파한대소하시는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어떻게 교회를 섬겨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 없는 교훈인 것입니다.
(마18:12-14)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우리는 살아서 주님의 일을 하는 동안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유초등부, 중고등부, 청년대학부 선생님 여러분들도 이 말씀을 꼭 마음 판에 새겨두시기 바랍니다. 제 발로 찾아 온 자녀들만 가르치면 안 됩니다. 눈앞에 있는 자녀들보다 보이지 않는 자녀들에게 더 깊은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왜 못 나오는지, 무슨 어려운 일이 있는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고 들어주고 품어주면서 바로 그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존재하는 선생님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1907년 평양 대 부흥의 전초를 만드신 분이 누구인지 잘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평양에서는 기도와 말씀으로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던 교회 지도자들이 강원도에서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는 토마스 하디 선교사님을 부흥사로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기로 하였습니다. 토마스 하디 선교사는 토론토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엘리트로 잘 나가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조선으로 복음을 전하러 나와 강원도에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강단에 서자 말자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나는 강원도에서 3년 째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단 한 명도 아직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오늘 여기에 와서 비로소 성령님의 강력한 메시지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개하고 무식하고 초라한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늘 마음 한켠에는 그들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 불쌍한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고 회개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평양에서는 어마어마한 회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평양부흥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은 돈으로 하는 것도, 경력으로 하는 것도, 화려한 학벌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주님의 일은 한 영혼을 사랑하는 사랑으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