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6월 3일 주일낮 설교 (살려고 죽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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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Tuesday, 05 June 2012 14:45
- Written by 최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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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고 죽은 사람
6. 3, 2012
本文:갈라디아2:15-21
說敎:崔仁根牧師
어느 날 주일에 두 젊은이가 뉴저지 컬드웰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걸어가다가 그들은 어느 교회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한 청년이 말했습니다. “야, 우리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가자.” 그러자 한 친구는 딱 잘라 말했습니다. “나는 관심 없네. 자네가 원하면 들어가서 예배드리게.” 그래서 그들은 교회당 앞에서 헤어졌습니다. 한 친구는 교회당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다른 친구는 혼자서 걷다가 술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셨습니다.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드렸던 청년은 나중에 미국의 22대, 24대 대통령이 되었던 Grover Cleveland 였습니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에 두 번씩이나 당선됐고 “깨끗한 대통령”이라는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다른 한 청년도 머리가 좋아 법대에 갔었고 변호사가 되었으나 뇌물과 거짓과 범죄에 연관되어 감옥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훗날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이런 위대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아 주실 때 딴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의 근간을 만들어 주는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우리들이 잘 나서 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 많고 허물 많은 우리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받아주셨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갈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고 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살기 위해서 죽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도 깊고 의미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들의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죽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도 바울과 같이 진정 살기 위해 죽는 놀라운 결단으로 자신을 죽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은 이와 같은 주제를 앞에 놓고 우리들의 인생과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깊이 한번 묵상해 보는 복된 말씀을 기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 진정 바른 믿음으로 가는 축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살려고 죽은 사람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가 즐겨 쓰던 말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Accept the fact that you are accepted." 어떻습니까? 우리는 오늘 어떻게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다 뒤로 하고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교회당에 나와 이처럼 온 정성을 모아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매우 현명하셔서, 이것이 이 땅에서 가장 복되고 귀한 일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우리는 부족하고 무엇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는데 하늘의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사랑으로 우리들을 불러주셨기 때문입니까? 여기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짜 신자가 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진짜 신자가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들이 진실로 바로 고백해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엡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 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잘나서 신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해 두셨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쓸데없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해 주시고 세상과 구별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는 이 사실을 믿고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애쓰고 힘쓰는 삶,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백하고 감사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놀라운 관계를 바로 알고 감격할 줄 아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신자인 것입니다. 이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믿음생활의 근본이 되는 진리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진리를 중심으로 믿음의 근본을 찾아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 놀라운 비유 하나를 남겨두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는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받아 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가서 마음껏 살았습니다. 손에 돈이 있으니 친구도 생기고 멋진 일들, 재미있는 일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는 세월이 가는지? 돈이 다 날아가는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그 돈으로 마음껏 즐겼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허랑방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눅15: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가 그렇게 허랑방탕하여 돈을 다 탕진한 후에 생각도 못했던 흉년이 들고 그는 순식간에 비참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눅15:14-15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지혜롭게, 있을 때 절약하고 없을 때를 대비하지 못하는 인생의 최후는 언제나 이러하였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하여 그렇게도 젊은 나이 30에 대국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습니까? 이 탕자와 정 반대로 그는 있을 때 흉년을 대비하여 왕에게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똑 같은 상황인데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의 모습이 무엇인지 성경은 이렇게 극명하게 우리들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탕자는 굶어죽게 되자 결국은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무슨 염치로 그는 돌아옵니까? 아들이라는 신분을 포기한 채 아버지의 집에서 배불리 먹고 일하는 일꾼의 하나가 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돌아옵니다.
눅15:18-19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 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하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을 놀라게 하는 광경이 벌어집니다. 아무리 본인이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자신을 격하시키고 돌아왔어도 아버지는 그를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눅15:20-24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 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 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 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 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 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 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무엇입니까? 이 탕자의 신분이 아들이 되고 종이 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손에 달려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로 받아들이고 지난날을 다 용서하시고 새롭게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데 아들이 거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우리들이 무슨 공로가 있어 아들이 되고 자녀가 되고 천국을 상속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 바로 그것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이처럼 신자가 되어 이 날을 하나님의 날로 구별하고 온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진리를 또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를 청산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이 의롭게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정의를 해 놓았습니다.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 가 없느니라
여기에 기록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인다.”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우리는 원래 죄인이었고 그 때문에 늘 죄를 짓고 사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그 무서운 모든 죄를 해결해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고 희생의 제물이 되어 주셨으므로 그 주님을 믿는 자는 다 죄를 용서 받고 새롭게 되었으니 그것을 신학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하나님께로 되돌아 와서 관계를 새롭게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비유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교훈하시고자 하는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면 탕자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이처럼 멀리 떠났던 탕자의 길에서 아버지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단순한 논리를 알지 못해 세상에서 그릇된 사상과 생각으로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칩니다. “21세기 과학과 지식의 시대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착하고 바르게 살면 천국 가는 것이지 꼭 교회에 가고 하나님을 믿어야만 천국에 가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장례식에 가보면 영적인 철이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었던 사람이야, 저렇게 착하게 올바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오히려 남을 도왔으니 틀림없이 천국에 갔을거야, 저런 사람이 천국 안 가면 누가 가겠나?” 이 모든 것은 잘못된 사상이요 그릇된 신앙입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천하 만국에 예수님이라는 이름 외에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덧입고 천국에 가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탕자와 같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 결단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려면 항상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잘 살 때는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곤란에 처했을 때만 하나님을 찾으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관계를 유지한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평소에는 안부 전화 한 번 없다가 자기가 어려울 때 갑자기 나타나 돈 꾸어달라고 한다면 그 관계가 과연 좋은 관계로 발전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사랑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나가야 할 것입니다. 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자세는 결코 아름다운 관계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첨부한다면 자기 자신의 의로는 결단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잘못된 자세를 강력하게 규탄하였던 것입니다.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 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신앙 자세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좋은 일을 많이 했으니까... 헌금을 많이 했으니까, 불쌍한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많이 도왔으니까... 등으로 자신의 행위와 의를 앞세우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알아주시고 복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거야 하는 등의 신앙은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엄격히 금지한 내용과 같이 결단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에 감격하여 구원의 결과물로서 살아가야 할 성도들의 덕목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란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삶의 모습이 어떠하여야 하는지? 아주 분명하게 기록에 남겨 오늘 우리들을 감격시키고 있습니다. 그 말씀부터 먼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 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참으로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주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도 영이신 하나님과 같이 우리들의 육체를 버리고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육신적인 가치나 사고나 관념으로서는 결단코 영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 말입니다. 이는 우리 예수님의 명령과는 일맥상통하는 가장 아름다운 영적인 결단입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 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좀 죽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살아 있으니 자존심을 논하고 자신의 유익을 찾고 자기주장을 내 세우며 부끄러움과 믿음 없음을 만 천하에 선포하면서 인생도 신앙생활도 잘못 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노회나 총회나 교회에서 우리들이 가장 많이 상처입고 실망하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죽지 못하고 자신을 다스리지 못함으로 인해 남에게 실망을 주고 자신의 삶에 먹칠을 하는 이런 일들을 이제 더는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주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선언하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진정한 신자의 길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목요일 조선일보에 게재된 보도를 보니 대한민국은 술로 말미암아 망국병에 걸렸다고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600만 명이 술을 마시고 있고 그들이 하루 동안에 마시는 술은 소주, 맥주를 합해 1800만병이라고 하니 참으로 문제가 아니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술을 먹고 취하여서 벌어지는 일들은 감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가정 폭력의 거의 절반이 그렇게 술에 취한 채 일어나고 있고 살인 사건의 38%가 그렇게 만취한 상태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국가 중요 기밀조차도 만취상태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니 더 할 말이 없어집니다. 우리 미국에서도 연간 알코올로 인한 교통사고로 6만 명 이상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자기 절제가 제대로 되지 못한 고로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과 사고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기독교에서는 일체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여 이처럼 어리석인 우를 범하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교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다시 살아야 합니다. 그 길만이 신령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고 사는”, 참으로 놀라운 진리를 터득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평생을 통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갈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들도 이제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 죽음으로 다시 사는 참 아름다운 지혜를 터득해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8장에서 세리와 죄인의 기도를 실례를 들으시고 무엇이 진정한 신앙이고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받아주시는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 말씀을 잔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눅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 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 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 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 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 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누구를 옳다 하겠습니까? 얼핏 보면 세리는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누가 이 시대에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시대에 누가 세리처럼 도덕적으로 전혀 흠이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거기에다 십일조까지 드리니 그야말로 완벽한 이 시대의 모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그 세리를 받아주시지 않고 보잘 것 없는 죄인을 받아주셨습니까? 바로 여기에 “자기 의의 폐해”와 죄인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리는 누가 봐도 칭찬 할 만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모든 초점을 사람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춘다는 이 기본 논리를 모르면 오늘 우리들도 세리처럼 살고 세리처럼 자기 의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어리석은 자리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나는 죄인인데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그 앞에 엎드러져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참으로 오늘 우리들과 같이 허물이 많았습니다. 부족함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면 시키는 대로 순종하며 하나님께 자신도 자신의 자식도 다 맡겨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축복하시는 믿음의 진정한 모습인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믿음, 바로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 죽고 하나님 품안에서 다시 살며, 육신은 죽고 영으로 다시 사는 가장 놀라운 믿음의 자세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큼 6월이 왔습니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소중한 목숨을 버린 그런 복된 계절에 우리는 지금 서 있습니다. 미국은 지난 5월 25일이 현충일이고 한국은 6월 6일이 현충일입니다. 이 땅에 있는 나라나 국가는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세웠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과 우리들의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는 좋은 나라와 국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의 세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가서 영원히 살아갈 천국을 예비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 성자 예수님을 내어 놓으셨고 우리 예수님은 그 소중한 몸을 찢고 물과 피를 쏟아 그 천국을 완성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그런 복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천국이 만들어져 있어도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사랑의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가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을 가져아만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가슴에 담고 하나님과 신선한 관계를 회복하여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고 죽어 세상 떠나는 날 진정한 천국에서 영원복락을 누리시는 그런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2년 6월 3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