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2 주일낮설교 (성령이 임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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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2 January 2020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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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임하시면!
선교주일
1. 12, 2020
本文:사도행전1:8
說敎:崔 仁 根 牧師
대한민국이 수립된 바로 다음해인 1949년 3월 17일 오후였습니다. 연희 대학촌에 있는 원한경(Horace Horton Underwood II 언더우드 2세)박사 집에서는 선교사의 부인과 연대 교수부인들이 모여서 다과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전해인 1948년 12월 9일에 프랑스의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 총회에서 46대 6표로 대한민국이 승인된 것을 축하하고, 그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던 모윤숙 여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장소가 언더우드 2세의 집이어서 모 여사가 백낙준박사 부인과 함께 회의장에 오후 2시경 도착하고, 주객의 인사가 끝난 후, 각각 자리에 앉아 홍차를 한 잔씩 들고 있는데, 별안간 밖에서 총소리가 나면서, 와르르 하고 유리창이 깨어져 내렸습니다. 탄환은 다행히 맞은 편 벽을 뚫고 나갔기 때문에 사람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부인들은 혼비백산하여 각기 살 구멍을 찾기에 바빴습니다. 모 여사도 부엌으로 뛰어 들어 갔으나 집 주인인 언더우드 부인만은 주인 된 도리를 다 하려고 해서였던지, "누구냐?"고 소리치며, 밖으로 뛰어 나갔는데, 다시 총소리가 요란히 나면서 언더우드 부인은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누군가 부인을 노리고서 총을 쏜 것이었습니다. 범인은 젊은 청년 네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언더우드 부인이 방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다과회는 갑자기 수라장이 되었고, 언더우드 부인은 즉시 병원으로 운반되었으나, 영영 소생하지 못하고 61세를 일기로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서 일생을 우리나라를 위해 힘써 오다가 공산주의자의 총탄에 쓰러진 것입니다. 그 때의 세상 형편은, 대한민국을 무슨 방법으로든지 파괴하기위해 갖은 방법을 썼는데 선교사들까지 오해하여 죽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복음의 대적, 그것은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해의 첫 선교주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도 피를 흘리며 목숨을 버린 위대한 선교사님들의 은총으로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엄격히 복음에 빚을 진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빚을 갚아야 하는 우리들의 의무인 것입니다. 희망찬 2020년 새해에 우리 모두 꼭 한 사람이라도 전도하여 이 거룩한 빚을 갚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시기 바랍니다.
선교의 원동력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선교는 우리들이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님이 우리들에게 임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열정과 돈과 지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줄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전혀 신앙생활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처음도 나중도 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가능한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대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행20:22-24)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선교에 올인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으로 인한 심령의 매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의 결단과 헌신이 아니라 성령님의 강력한 인도하심을 따라 죽음의 길이라도 기꺼이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하려면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숨을 걸 수 있을 만큼의 희생정신도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완악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도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도 베드로가 한 번 설교를 하고 예수님을 전했는데 무려 3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베드로는 결코 그러한 능력과 지식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그 누구도 감히 할 수 없었던 역사를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행2:37-41)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얼마 전만 해도 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도망가 버렸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직업은 바다에서 물고기나 잡는 어부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한 번의 메시지에 3천 명씩이나 회개하고 돌아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성령님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승천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 성령 충만을 받고 나서 이렇게도 놀라운 능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심령에 매임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와 같은 성령을 충만하게 받을 수가 있을까요? 다행히도 우리는 지난 주간 새벽기도회를 통하셔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공부를 하였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이 임재하십니다. 베드로처럼 성령 받기를 사모하며 전혀 기도에 힘쓸 때 받을 수 있습니다. 안수 받은 주의 종들의 안수를 통하여서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계명인 사랑으로 무장하고 사랑할 때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우리들도 성령 충만을 받고 하나님의 지상명령이신 전도와 선교에 최선을 다하여 단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올 해가 다 가기 전에 주님께도 인도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령님은 권세와 능력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성령님은 권세와 능력이라고 선포해 주셨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혼란하고 힘이 있는 자들이 지배하는 약자의 지옥과 같은 곳입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이 외롭게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곳이 이 세상입니다. 이와 같은 형편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셨던 하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사 이들의 친구와 구원자가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친히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사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스스로 약하고 가난하고 눌리고 병들고 힘들고 외롭다고 느끼시거든 오늘 이를 해결해 주시려고 이 땅에까지 내려오신 우리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이 종도 20살부터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오늘날까지 참으로 숱하게도 많은 피눈물을 흘리며 가난과 외로움과 아픔과 고통 속에서 이와 같은 예수님의 손을 잡고 지금까지 넘어지지 아니하고 승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성령님으로 우리들에게 임재하시고 세상의 권세와 비교도 되지 않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의 지상명령인 가서 제자 삼는 일에 헌신하기만 하면 이처럼 엄청난 능력으로 우리들과 함께 해 주십니다.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스스로 죄악된 이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도 능력이 필요하고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도 능력이 필요하며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 와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도 능력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도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놀라운 능력이 바로 성령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 주님께서 친히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말씀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성령 충만을 받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는 곧 성령님의 사람이니 권세와 능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엄청난 신분변화를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롬8:14-15)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절대로 연약한 자들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은 결코 무능한 자들이 아닙니다. 감히 세상이 범접치 못할 하늘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받는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확신 하나로 전 세계를 복음화 시키는데 소중한 생명을 다 내놓고 당당하게 승리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는 단순히 기도를 드리는데도 성령님이 도우신다고 확신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엄청난 권세를 주십니다. 제자들을 한 번 보십시오. 그들이 이처럼 성령 충만을 받지 못했을 때에는 그의 사랑하는 스승이요 친구였던 예수님께서 악당들에게 잡히시자, 걸음아 날 살리라며 도망 가벼렸습니다. 참으로 한심하고 안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마26:55-56)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권세 있는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에는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그렇게 도망갔던 자 중에 하나였던 베드로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잔악한 유대인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서 외쳤습니다.
(행2:22-24)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고 말입니다. 언제는 그들이 무서워 스승이신 예수님도 버리고 도망갔으나 성령님으로부터 권세를 받고 나서는 바로 그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예수님을 죽인 살인마들이야!”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권능인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한 번 보십시오. 담대하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잔인한 그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돌로 그를 쳐 죽였으나 당당하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안았습니까?
(행7:51-60)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는 말씀과 같이 그는 비록 집사에 불과하였으나 그 얼마나 당당하게 한 목숨을 내어 놓고 복음을 증거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자의 권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약하다고 기죽지 말고 가난하다고 뒤로 물러서지 말며 그 어떤 핸디캡이 있을지라도 성령 충만만 받으면 권세 있는 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성령 충만을 소망하며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선교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은 지역적으로 예루살렘과 땅 끝이고 인종적으로는 유대와 사마리아로 택함 받은 자들이나 이방인을 막론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선교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딱히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한다는 생각을 넘어야 합니다. 언어와 문화가 있기에 단순하게 한국 사람을 먼저 생각은 하지만 엄격하게 복음은 그 대상에 제한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은 가정에서 이웃으로 이웃에서 전국으로 전국에서 타국으로 그 범위를 넓혀가며 감당해야만 합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전도보다 어리석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와 같은 어리석어 보이는 전도를 통하여서 그 잘난 사람들이 굴복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행9:17-22)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처음에는 이러니저러니 말도 많고 평판도 많았으니 끝에 가보면 그들을 다 굴복시키고 예수님의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기사가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거느리고 살았던 형편없는 여자가 온 동네사람을 다 복음화 시키는 역사도 성경에는 분명하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요4:39-42)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여자는 스스로 자신의 행실을 아는 고로 남부끄러워 사람들이 다 오수를 즐기는 한 낮에 우물가로 물을 기르러 나왔던 덕스럽지 못한 자였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 예수님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요4:28-30)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자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 여인처럼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이렇게 별도로 선교주일을 정해 놓고 복음을 전하자고 외치지 않아도 이 여인과 같이 당당하게 자신이 만났던 예수님을 이웃들에게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우리들의 입을 가만히 다물고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종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 입구에 예배당이 있어서 그런지 60명 한 반에 거의 20-30명이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졸업할 때까지 6년 동안 나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 만약 누군가가 전도하고 같이 교회에 나가자고 했더라면 누구보다 귀가 얇은 제가 분명히 따라 갔을 것입니다. 이처럼 같이 놀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샤핑은 해도 절대로 예수님은 전하지 않는 엉터리 교인들이 지금도 많이 있는 줄 압니다. 오늘 귀가 열리고 영혼이 열려서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권세에 이끌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진정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