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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일 주일낮설교 (네 소원이 무엇이냐?)

네 소원이 무엇이냐?

3. 1, 2020

本文:마가복음10:46-52

:崔仁根牧師

 

데이빗 리빙스턴은 세기의 위대한 기독교인이요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아 그의 시신이 영국으로 옮겨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시키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수많은 군중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노인 한 사람이 외로이 혼자서 군중들 후미에 홀로 서서 가슴을 조이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다름 아닌 리빙스턴의 친구 윌리엄이었습니다. 그는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 선교하러 가겠다고 나섰을 때 "미친 사람"이라고 욕을 한 장본인이었습니다. 윌리암은 리빙스턴이 아프리카로 떠난 후 런던에서 큰 부자가 되었으며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윌리암은 리빙스턴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고생하고 살았지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명성을 떨치며 이 세상을 떠나가는구나."하고 감탄하고, "그러나 나는 비록 부자라고 말할 수 있으나 소망 없는 세상을 위해서만 살았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가?"라고 말입니다. 비록 리빙스턴은 가난하고 고생하며 선교지에서 보잘 것 없는 인생처럼 살았지만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윌리엄은 부자요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이 살았지만 그는 소망 없는 인생을 누렸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디에 소망을 두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에머슨은 외쳤습니다. “너 자신을 누구에게 필요한 존재로 만들라 누구에게든 인생을 고되게 만들지 말라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삼일절입니다. 191931, 목숨을 건 독립군들과 온 나라 백성들이 손에손에 태극기를 들고 일제 앞에 항거하며 일어나 삼천리 방방곡곡에 만세를 외치며 분연히 일어났던 역사적인 날입니다. 그들의 목숨을 건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의 소망은 오직 하나 독립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소원이 있으면 어느 날엔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주인공은 앞을 보지 못하는 참으로 불쌍한 소경이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니 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 누구 하나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외롭고도 힘든 나날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는 놀라운 말씀을 듣고 서슴없이 보기를 원합니다.”고 외쳐 기적처럼 눈을 뜨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오늘 우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인생을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는지, 깊은 깨달음과 결단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인생 여정에 절박감이 있어야 합니다

(10:46-47)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한국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절박함에 대한 가장 좋은 표현이 될 것입니다. 간절한 소원은 바로 이와 같은 절박함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다들 가난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학교에 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는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등록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편이 안 되는 줄을 알면서도 죽도록 공부해서 일류대학에 합격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아까와서도 어떻게든 등록금을 마련해 주었고 결국에는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대학에 안 갈까봐 부모님들이 더 안달하시고 밤을 새워가며 대학가는 공부를 뒷바라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대학에 다니면서도 장차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지에 대한 꿈과 해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절박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셨는데 얼마나 절박하게 기도를 드렸던지 땀방울이 피가 되어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우리 주님의 기도는 절박하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못이 박혀 죽는 것을 상상만 한 번 해 보십시오. 이렇듯 절박하지 않겠습니까?

(22:41-44)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절박감은 또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고난입니다. 고통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인생 여정에 뜻하지 않는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때에는 소경 바디매오와 같이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변의 어떤 방해가 있더라도 개의치 말고 주님을 찾아 외쳐야 합니다.

(10:47-48)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만약 그 소경에게 예수님을 만나 눈을 떠야 한다는 절박함이 없었다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꾸짖고 무시할 때 그만 기가 죽어서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모든 방해에 개의치 아니하고 더욱 심히 소리 질러 예수님을 찾았다가 결국에는 기적을 보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당한 고통으로 인생의 절박감을 만들고 끝내는 주님의 기적을 보는 소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돌을 깨고 다듬는 자신의 일에 불만스러워하며 신세 한탄을 하며 지내는 석공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도 자신의 신세를 탄식하며 투덜거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팔자가 좋아 대청마루에 모기장 치고 모시 홑이불 덮고 잠자는데 도대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하고 말입니다. 그 때 천사가 내려와 "그대의 소원이 이루어지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석공은 순삭 간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나라의 권력자가 우아한 비단옷을 입고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지나갔습니다. 석공은 "나도 저런 권력자가 되어 봤으면..."하고 탄식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또 다시 천사가 내려와 "그대의 소원이 이루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시에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뜨거운 햇볕에 땀을 흘리게 되자 해님이 되기를 원했고 그것 또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슬그머니 끼어든 구름을 보고 자신이 쏘아대는 햇빛이 구름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 분하여 구름이 되길 원했고 그는 곧 구름이 되었습니다. 구름은 햇볕을 붙잡았고 비로 내려 폭포를 뛰어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폭포에도 꼼짝 않는 거만한 바위 때문에 "이 바위가 나를 지배 하는구나 바위가 되고 싶다."라고 한탄하였습니다. 그는 금새 바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족함도 잠깐이었습니다. 한 석공이 나타나 그의 가슴에 날카로운 정을 대고 망치로 내려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나는 석공이 될 테야."라고 외쳤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다시 석공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풍자한 이야기겠지만 오늘 우리들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절박함이 없는 경솔함은 결코 제대로 된 소원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간절한 소망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10:48-49)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 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이 소경은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미친 듯이 그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무시하고 학대하고 비난하는 따위의 소리는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외침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고 그 주님의 부르심을 입는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은 거지 소경이 얼마나 예수님에 대해 큰 소망을 품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소망이 있는 사람은 환경에 굴하지 않고 참고 견디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들의 소망은 무엇일까요? 윌리엄과 같이 부자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잘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리빙스턴과 같이 이 땅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주님의 기쁨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삶을 바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소경 바디매오를 통하여서 그 소망의 구체적인 해답을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했던 그는 예수님을 찾아 어디든지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학수고대 자신이 머물고 있는 그 땅으로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이것 보다 더 막연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소경은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리도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10:46-47)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란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가 그 어떤 방해에도 주님 부르기를 멈출 수 없었던 것은 그토록 긴 세월 예수님을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종은 확신합니다. “진정한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100년 전 애굽에서 3천년 된 고분을 발굴했는데 미이라가 나왔고 그 옆에 꽃병이 하나있었습니다. 이 꽃병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는데 사람의 실수로 떨어뜨려졌고 그만 깨지고 말았습니다. 꽃병이 깨지자 바닥에 몇 개의 완두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겉이 쭈글쭈글했고 차돌처럼 딱딱했습니다. 전문가들이 연구 검토한 후 땅에 심었더니 30일 후 새파란 싹이 돋아났습니다. 3천 년간 침묵을 지킨 생명이 잠에서 깨어났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는 분명히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은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이뤄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세계 제 2차대던 때 독일 콜론의 지하실에는 "나는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않을 때도 그 태양을 믿으며,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해도 그 사랑이 있음을 믿으며,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도 그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쓴 글이 있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어떤 전쟁 포로가 장차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조국으로 무사히 돌아갈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글일 것입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10:51-52)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끈질긴 소망으로 예수님을 기다린 끝에, 온갖 방해와 모욕과 비난이 쏟아지는 절박한 현실 앞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찾아 부르짖은 끝에 결국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친히 그 불쌍한 사람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말입니다. 이것을 거의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소경의 입장에서 들으면, “네 소원이 무엇이냐?”인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궁금해집니다. 평생 앞을 보지 못하여 거지가 되고 소외가 되어 너무나도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 소경이 과연 예수님께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하고 말입니다. 마침내 그 소경은 주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합니다.”고 말입니다. 그뿐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첫 대지에서 절박함을 말씀 드렸습니다. 바로 이 소경에게는 보는 것 보다 더 절박한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보지 못하는 그것 때문에 그의 인생은 거지로, 비참함으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도 아니도 덜도 아닌 보기를 원합니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소경에게 너무나도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보기를 원한다고 고백한 것을 예수님은 믿음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단순하게 눈을 떴다는 이상의 그 무엇이 여기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소경은 육신의 눈을 뜨는 것 이상의 신령한 눈을 뜨기를 소망하였던, 주님만이 보실 수 있었던 그 소경의 내면적이고도 영적인 눈을 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결국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소경의 내면에는 육적인 눈을 뜨고 영적인 눈도 열려 예수님을 쫓았던 것입니다. 마가가 오늘 우리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눈물 나도록 간절한 소망은 바로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보는 눈이 열려 그 예수님을 좇아가는 삶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였습니다. 어떤 어머니와 그녀의 어린 아들이 기독교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 되어 로마의 원형극장에 던져졌습니다. 잠시 뒤에 사자 굴의 문이 열렸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은 으르렁거리면서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아들은 무섭게 달려드는 사자를 보고서 어머니의 품에 꼭 안기면서 울부짖었습니다. “엄마! 무서워요!” 어머니는 아들의 몸을 꼭 안아 주면서 조용히 위로해 주었습니다. “얘야! 눈을 꼭 감고 조금만 참아라. 그러면 곧 눈앞이 환하게 밝아 올 거야!”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을 받아 감옥에 끌려가면서도, 또 매를 맞으면서도, 심지어는 사자굴 속으로 던져지면서도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이는 저들의 마음속에 천국에 대한 소망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삶에만 너무 치중하고 있지 않나 우려됩니다. 이 세상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리의 복된 영적 시야가 가리워져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식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생을 길가는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거쳐 가는 곳이요, 우리에게는 영원한 본향이 따로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주를 인하여 당하는 핍박과 환난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주신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음을 생각하고 그 주님을 위해 더욱 충성하며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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