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심으라! (2020년 4월 12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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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2 April 2020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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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심으라!
부활주일
4. 12, 2020
本文:열왕기하4:32-37
說敎:崔仁根牧師
수넴이라는 동네에 자식 하나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나마 남편마저도 늙어서 더 이상 자식에 대한 소망을 접은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 동네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여인이 엘리사를 간절히 집으로 청하고 정성을 다해 식사 대접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여인은 남편에게 부탁을 하여 엘리사로 하여금 그곳을 방문 할 때마다 들러서 먹고 쉴 수 있도록 엘리사의 전용 방을 하나 마련하여 주게 하였습니다. 남편도 선하게 여겨서 망을 하나 만들고 그곳에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들여 거기에서 엘리사가 불편하지 않게 머물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왕하4:8-10)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 저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 유하리이다 하였더라
는 말씀이 바로 그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놓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용히 자신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과연 이와 같은 상황이었더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하고 말입니다. ‘어떤 낯선 사람이 종종 우리 동네를 지나가네.’ 하고 말았겠습니까? 아니면 이 여인처럼 간권하여 집으로 모시고 정성을 다해 대접을 하였겠습니까? 남자들은 아내가 그 낯선 남자를 위해 방을 만들고 이렇게 신혼 방처럼 깨끗하게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들여 놓고 마음 놓고 편안하게 사용하도록 아내의 부탁을 들어 방을 만들어 주었겠습니까? 아니면 ‘이 여자가, 정신이 나갔나. 낯선 남자를 집으로 들이게?’ 하면서 짜증을 냈을까요? 이것은 실로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에 따라 우리들의 삶에 현장에서 기적 같은 축복이 임할 수도 있고 평범하게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가는 인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루디아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우연히 강가에서 만난 사도 바울을 강권하여 자기 집으로 모셔다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힘입어 빌립보교회를 세우는 초석을 만들어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집 앞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 나그네를 강권하여 집으로 모시고 대접을 잘 하였다가 무자하던 집안에 이삭이라는 보물을 얻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는 축복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관심 한 곳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단적인 실례들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2020년도 부활주일을 맞아 부활절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부활이라는 그 엄청난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가 있을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부활의 축복을 얻으려면 먼저 거기에 부합되는 행동을 심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수넴 여인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소중한 진리를 깨닫고 부활을 축복으로 누리는 거룩한 은총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조건 없는 섬김이 기적을 만듭니다
(왕하4:8-10)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 저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 유하리이다 하였더라
성경은 조건 없이 엘리사를 섬긴 그 여인을 “귀한 여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8절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섬겨서 “귀한 여인”이 되었는지, 귀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엘리사를 섬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후자인 것 같습니다. 그 여인은 엘리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와 같은 총명을 가지고 아낌없이 헌신한 그 여인을 “귀한 여인”이라고 표현하시는 것 같습니다.
(왕하4:9)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아 하나님께 귀한 예배를 드리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도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성도”라는 칭송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이 종의 작은 경험으로 볼 때, 세상 모든 사실들은 다 알고 누구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줄줄이 꿰고 흉보고 욕하면서 하나님도 주의 종도 멋진 사람들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인들이 의외로 많이 있음을 잘 압니다. 이런 여인들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사치하며 아름답게 꾸미고 다녀도 전혀 “귀한 여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 하나의 진리를 꼭 가슴에 새겨야 될 줄 믿습니다. 여인이 지혜롭고 현숙하고 말씀과 기도로 무장 되어 있으면 그 여인은 바로 복 받은 여인이고 남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값지게 쓰임 받게 만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정하시는 “귀한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잠31:10-12)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여인이 지혜롭고 헌신적이어서 길가는 엘리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알고 조건 없이 대접하고 섬긴 결과 그 가정의 소원을 이루는 기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왕하4:11-13)
하루는 엘리사가 거기 이르러 그 방에 들어가서 누웠더니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이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곧 부르매 여인이 그 앞에 선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너는 저에게 이르라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생각이 주밀하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왕에게나 군대장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여인이 가로되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나이다 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어느 순간에 엘리사의 마음에 ‘저 여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솟아났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불러 물어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그 어떤 조건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조건 없이 순수하게 섬겼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이 여인과 같은 진정어린 섬김과 헌신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람도 이렇게 감동을 받아 해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해주겠다고 결단하는데 사랑덩어리이신 하늘의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께 조건 없는 진심을 다하는 생활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교회에도 나오지 못한 채 온라인으로 집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럭저럭 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드리고는 있지만 성도들이 함께 찬송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며 하나님 전으로 나아오지 못하니 사실 예배도 아닌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배는 드리는 것인데, 예배에서 가장 소중한 드림의 표현인 예물을 드리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님들이 헌금이 줄어들고 있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제때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면 나중에는 마음이 변해 예배당에 나올 때에도 온전한 예물을 드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도 또한 인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하니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지난 수요일 교회 헌금함에 헌금을 하고 돌아가신 성도들의 헌금을 수거하면서 이 종은 참으로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지 못한지가 이제 겨우 주일을 두 번밖에 보내지 않았는데 고무줄로 묶어 드린 헌금봉투가 한 가족 당 7-8개가 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각 종 헌금을 정성껏 준비해 두었다가 하나님께 갖다 바친 것이었습니다. 이 종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실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정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이 이렇게도 하나님 앞에 진실 되고 정직하다는 사실이 정말 흐뭇할 정도로 감사가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헌금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일찌감치 선포해 두셨습니다.
(고후9:6-7)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 말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종은 하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을 붙잡고 평생을 통해 최선을 다해오고 있습니다. 정말 거짓말처럼 이 종의 삶에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모자람이 없도록 풍성하게 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 드리고 하나님의 풍족한 축복을 자손대대로 받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어쨌든 이 여인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섬겼는데 일부러 불러서 물어 보아도 소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이제 스스로 알아서 그 집안에 축복을 주려고 하는데 마침 그 집안에 아들이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남편은 이미 늙었기에 더 이상 아들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그 여인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선포해줍니다.
(왕하4:14-17)
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저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꼬 게하시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 가로되 다시 부르라 부르매 여인이 문에 서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돐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인이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돐이 돌아오매 엘리사의 말한 대로 아들을 낳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떠오릅니까?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생각이 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고후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여인은 전혀 아들 같은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인 줄 알고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이처럼 보상해 주셨던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 여인의 진심어린 섬김과 헌신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가치관과 믿음으로 인생도 하나님도 섬기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에게 치명적인 약함이 있고 마음의 소원이 간절하면 할수록 말입니다. 할렐루야!
간절한 믿음이 부활의 기적을 봅니다
(왕하4:18-20)
그 아이가 저으기 자라매 하루는 곡식 베는 자에게 나가서 그 아비에게 이르렀더니 그 아비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 아비가 사환에게 명하여 그 어미에게로 데려가라 하매 곧 어미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은지라
뜻밖에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이렇게 갑자기 죽었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들이라면 과연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 하였을 것 같습니까?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거의 삶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늙어서 꿈에도 소원하던 아들을 얻었었는데, 그리고 그 아들이 아름답게 잘 자라났는데 이렇게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갑자기 죽었다면 거의 실신상태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식을 향한 오늘의 부모님의 상식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어떤 엄마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 여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놀랍도록 침착하고 무서울 정도로 주도면밀하게 움직였습니다.
(왕하4:21-23)
그 어미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서 그 남편을 불러 이르되 청컨대 한 사환과 한 나귀를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그 남편이 가로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어늘 그대가 오늘날 어찌하여 저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뇨 여인이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어떻게 이 여인은 이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에게 대한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주셨을 때도 하나님의 기적인 줄 알았었고 아들이 죽었을 때도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면 무슨 방도가 있을 것임을 그 여인은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믿음과 기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예수님의 말씀 하나를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요11:39-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 예수님은 길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하면서도 놀라울 만큼 확신에 찬 한 마디말씀을 주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기적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바로 이와 같은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하늘의 기적입니다. 나사로가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마르다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11:25-2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람이 죽어 이미 썩은 냄새가 나는데 그 사람이 다시 살아서 부활 할 줄을 이 땅에 있는 그 누구라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을 믿을 때 냄새나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믿음만이 줄 수 있는 기적 중의 기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환난도 떠나가게 되고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게 되고 이 세상 떠났을 때 천국으로 직행하는 구원을 누리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권세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와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대할 때 이 세상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고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시37: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 여인에게는 이와 같은 믿음과 기대가 가슴에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여인은 그렇게도 소중한 아들이 죽었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아니하고 죽은 아들을 엘리사의 방에다 눕혀 놓고 남편의 만류에도 “평안이니이다.”는 말 한 마디만 남기고 홀연히 엘리사에게도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에게만 알려드리면 틀림없이 무슨 방도가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기대하며 단숨에 엘리사에게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왕하4:24)
이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몰아 앞으로 나아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의 달려가기를 천천하게 하지 말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도 정신없이 달려가는 수넴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 엘리사에게만 가면 무슨 역사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이 여인은 엘리사를 모시고 왔고 엘리사는 거짓말 같이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냈습니다.
(왕하4:32-35)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죽은 아들이 이렇게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부활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여인의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기대가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여인과 같은 확고부동한 믿음이 있어야 하겠고 또한 하나님을 향한 기대가 식어지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절망적인 일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능히 역사해 주실 것이라는 이런 믿음과 확신이 있을 때 죽은 자도 다시 사는 부활의 기적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