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5일 주일낮설교 (네 남편을 불러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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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5 March 2020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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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남편을 불러오라!
3. 15, 2020
本文:요한복음4:7-19
說敎:崔仁根牧師
이 세상은 잘나가는 사람, 함께 해서 유익이 있는 사람들 곁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넘쳐나지만 소위 별 볼일 없는 사람이나 손가락질을 받는 못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특별히 남자를 다섯이나 갈아치우며 살아가는 여자라면 그 누구도 함께 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는 바로 이런 여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남자를 다섯이나 갈아치우고 온 동네에 소문이 나 대중들이 있는 곳에는 나타나지를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애용하는 우물에 물을 길러 나가야 하는데 이것조차도 부담스러워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무더운 한 낮에 몰래 나와 물을 길러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우물가엔 예수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 우물에 나왔던 그 여자는 매우 당황하였습니다. 더욱 더 놀란 것은 그 예수님, 그 유대인이 당대에 사람취급조차 하지 않는 사마리아 여자인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요4:7-9)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이 여인을 만나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을 미리 마을로 음식을 구하기 위해 보내버렸고 혼자서 그 여인이 나타날 때를 기다리며 우물가에 머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소중한 몇 가지의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귀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시고 풍성한 은총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기다리시는 예수님
(요4:9-10)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시고 조용히 우물가에서 그 여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는 앞 뒤 문맥을 통해서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랬습니다. 행실이 옳지 못하고 세상에 빠져서 남자를 다섯이나 바꾸어 가며 살았던 이 못난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여인도 이와 같은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오수를 즐기는 한 낮에 조용히 우물가에 나아와 물을 길러가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요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성경에 이와 같은 말씀을 기록해 둔 것은 이와 같은 배경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려는 저자의 의도였던 것입니다. 유대 시간이 6시면 오늘 우리들의 시간은 낮 12시인 것입니다. 수가라 하는 동네는 아열대 지역입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사람들은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오수 즉 낮잠을 청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바로 이와 같은 때를 이용하여 아무도 없는 조용한 시간에 물을 길러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밖에도 유대인이신 예수님을 만났으니 그 여자도 엄청 놀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요4: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너무나도 뜻밖의 상황에 이 여자는 당황하였던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이 여자를 기다리고 계셨던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복음이요 축복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도무지 상종조차도 해주지 않아야 할 유대인이신 예수님을 만나 그 여자는 실로 엄청난 축복을 체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 여인은 성경에 기록되는 영광을 누렸고 세상에 푹 빠져 있던 삶에서 천국을 향하고 예배를 회복하는 신령한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를 입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토록 기뻐하시는 복음을 온 동네방네에 전하는 전도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을 만남으로 인해 그 여인은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고 말았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바로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온통 온 세계가 난리법썩인 이처럼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개의치 아니하고 힘을 다해 예수님께 나아와 몸과 마음과 예물을 바치며 예배를 드리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먼저 내려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은혜를 잊지 말고 그 은혜를 갚는 정신으로 인생도 신앙생활도 지속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자는 짐승만도 못하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부르심과 제자 삼아주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오히려 그 은혜의 주인공이신 스승을 몇 푼의 돈에 팔아버렸던 가룟 유다는 그래서 비참하게 망하였던 것입니다.
(행1:16-18)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은혜, 부모님의 은혜,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조선 중종조의 명신으로 성격이 온건 겸허했고 특별히 청백리로 유명했던 반석평(潘碩枰, ?-1540)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남의 집 종으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인간이로되 인간 취급을 못 받으며 살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 만 사람이 자기를 멸시하고 짓밟는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은 기어이 스스로를 키워야한다고 결심하고 어려서부터 악착스럽게 자신의 인격적인 성장과 학문적인 성장을 위하여 남모르는 수고를 거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새 삶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문자 그대로 주경야독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 가면서 익힌 그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 이 참판은 아무 조건 없이 그의 종 문서를 불태워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면서 아들 없고 재산 없는 어느 양반집 수양아들이 되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예전엔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그는 당당하게 급제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형조판서로까지 승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한양 거리를 지나다가 옛 주인 이 참판의 아들 이오성(李五成)이 거지 몰골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그 사람에게 큰 절을 하며 "어르신 저를 몰라보시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종 반석평이라는 놈이올시다."라고 했습니다. 백주 대낮 한양 대로에서 형조판서 대감이 거지같은 사람 앞에 넙죽 엎드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어찌 예사로운 일이겠습니까? 그 당시 관례에 의하면 자기의 옛 신분을 밝힌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의 피 눈물로 쌓아올린 자기의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군망상(欺君罔上-임금님을 속이고 윗사람을 놀락 함)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온갖 고초를 겪어야 하고 아울러 즉각 옛날의 신분으로 환원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찌 그만한 사리를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모든 것 이전에 은혜부터 갚아야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뒷날 이 엄청난 반 대감의 인격에 감동한 고관들의 주선과 임금의 특별한 배려로 그의 사표는 반려되었고 오히려 그가 추천한 이오성이 사옹원 별좌라는 벼슬을 얻게 되었다는 미담이 우리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를 애써 키우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받은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그의 삶과 인격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느낄 수 있는 멋진 영적 향취를 맡을 수가 있습니다.
조건 없이 진리를 전해 주신 예수님
(요4:10-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는 때때로 전도를 할 때 예수님과 진리에 관한 말씀을 전하려다가도 “저 사람이 이와 같은 예수님과 진리에 관한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하는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예수님의 진리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인간적인 위로와 소망을 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이 놀라게 되는 것은 이처럼 행실이 옳지 못하고 세속적이고 세상에 젖어 사는 여자에게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진리를 똑바로 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복음의 핵심인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바로 자신이 생수를 줄 수 있고 자신이 주는 그 생수를 마시게 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복음에 관한 한 그리고 영적인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우리들의 지식과 상식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친히 역사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과 같이 말입니다. 알아듣던지 못 알아듣던지 상관하지 말고 무조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 한 밤중에 나타난 유대 공회의 의원인 니고데모에게 역시 예수님은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그의 영혼을 위한 영적인 문제를 다루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요3:2-3)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오늘 우리들은 이와 같이 영적인 능력과 진리에 관해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고 또한 상대가 알아듣던지 못 알아듣던 지를 막론하고 정확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또 다른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뜻밖에도 그 여자가 주님께서 주시는 이 진리에 응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렇게도 낯선 사람이 이렇게도 뜻밖의 이야기를 하면 일단은 이상하게 여기고 저항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평생을 그 우물에서 물을 길러 마시며 살아 왔는데 뜻밖에도 이 낯선 사람은 생수를 말하고 있고 그 생수를 마시게 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도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호응을 한다는 것은 결코 일반적인 상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 여자가 어떻게 예수님께 반응하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4:14-15)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이 여자의 이와 같은 반응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에 과연 이런 생수에 관해 들어보았거나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이 여자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것을 기대하며 요구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상식을 뛰어 넘는 기이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찜해 두신 사람은 이처럼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오늘 우리들의 이성과 경험을 뛰어 넘도록 하는 오로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영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되 그 열매와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담대하게 전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빌1: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사도 바울도 인간의 어떤 방법이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을 전파하면 역사는 하나님께서 하시니 자신은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가장 신비로운 역사인 것입니다.
미국의 한 기독교 문서전도협회에서 문서전도를 위한 지원자들을 모집하여 훈련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훈련생들은 말을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말을 더듬는 말더듬이가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담당하는 한 간부가 정중히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감동시켜 이곳에 보내셨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어떻게 전도의 역사를 일으키시는지도 보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계속 훈련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그 말더듬이는 상상 할 수 없는 많은 책을 보내달라는 연락이 계속되었습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그처럼 많은 책을 팔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본부에서는 전도자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강요하며 책을 떠맡기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결국 본부에서는 본부 요원 하나를 파송해서 그 전도자와 함께 문서전도에 나서게 했습니다. 그 말더듬이 전도자는 시골길을 걸어서 한 집 한 집을 방문하며 전도 책자를 보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떤 집이든 그 집에 들어가기 전에 나무 밑이나 길가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성령께서 먼저 저 집을 방문하여 그 사람을 감동시켜 주시옵소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만 믿고 갑니다."라고 기도를 하고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방문하는 집마다 말더듬이의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듣고도 책자를 사기로 약속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처럼 전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자체가 우리 속에서 능력을 발하는 것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네 남편을 불러오라!
(요4:15-18)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참으로 뜻밖에도 생수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생수를 요구하는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처럼 극적으로 생수를 원하는 여자에게 뜻밖에도 예수님께서는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명령하십니다. 진짜 의외의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은 개인적으로 전하는 것이고 구원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인데 왜 예수님은 생뚱맞게도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을까요? 바로 여기에 우리 범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예수님만의 비밀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만 만나면 만사형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분이십니다. 다만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의 그릇된 삶을 청산하여야 되는 것이기에 우리 예수님은 “회개”에 깊은 초점을 맞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의 세금을 착취하여 부자가 된 삭개오를 예수님은 동일한 방법으로 회개시켜 그 엄청난 재산을 다 나누어주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예수님의 놀라운 구원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눅19:5-9)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는 말씀과 같이 삭개오는 참으로 놀라운 결단을 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화답이라도 하시듯 선포하셨습니다.
(눅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고 말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도 복음으로 한 걸음 소중한 발걸음을 내려놓은 여자에게 너무나도 황당한 명령을 하셨던 것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여자는 남편이 무려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차라리,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부끄러운 모든 것을 다 드러내고야 말았습니다.
(요4:17-1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관계의 최악이 벌어진 것입니다. 개인의 부끄러운 사생활을 몽땅 다 까발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보통 여자 같으면 화를 내면서 돌아서야 하는데 이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예수님의 실체를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4: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라고 말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 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하나인 베드로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비록 행실은 좋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보고 선지자로 알아보는 이 여인은 실로 대단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인격과 삶의 가치관이 이러해야 될 줄 믿습니다. 아주 작은 말 한마디에 토라지고 돌아서고 오해하며 관계를 단절시키는 옹졸한 인격이 아니라 이 여인처럼 자신의 치부를 다 까발리고 부끄럽게 하여도 오히려 그와 같은 일을 통하여서 그 분의 실체를 알아보는 제대로 된 인격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성경에 기록되는 인물이 될 수 있었고 성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소중한 진리를 배우는 역사적인 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남자를 다섯이나 거느리고 살았던 불행한 여인이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복된 진리를 전수 받은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주님의 마음에 속 드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가장 복된 진리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요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할렐루아!!
성경 속에는 위대한 숱한 인물들이 많고도 많지만 이름 없는 이 여인과 같이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예배에 관한 값진 진리를 가르쳐 주신 인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남편을 다섯이나 거느리고 살았던 바로 이 여자에게 이처럼 소중한 축복의 진리를 소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을 넘어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고 구원의 새로운 삶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