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위기와 고독 (2020년 4월 26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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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6 April 2020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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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위기와 고독
4. 26, 2020
本文:창세기32:13-29
說敎:崔仁根牧師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한 40대 남성이 코로나19 외출금지령을 어긴 의붓 아들과 다투다 총으로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4월 23일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버니 해그로브(42)라는 남성은 아들인 디언테 로버츠(16)를 살해한 혐의로 전날 경찰에 체포됐다. 사건은 4월 22일 저녁 외출금지령을 어기고 로버츠가 밖으로 나가려고 했고 이를 어머니와 해그로브가 말리면서 시작됐다. 아들은 부모의 뜻을 어기고 나갔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와 집 현관을 걷어찼고, 이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 간 몸싸움이 일어났다. 당시 집안에는 어머니와 동생도 있었다. 격분한 아버지는 의붓아들에게 총격을 가했고, 총에 맞은 아들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다. 애틀랜타 경찰은 "온종일 집안에서만 지내다 보니 가족 간에도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며 "다툼이 발생하면 심호흡을 하고 서로 떨어져 있으라."고 조언했다.(시애틀N에서 발췌)
요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듯 오랜 시간 집안에 갇혀 있으니 새삼스럽게 “인생의 위기”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성경 속의 인물들을 막론하고 인생이 가는 먼 여정에는 끊임없이 위기가 닥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전 세계 나라들 중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측면에서 가장 선진국이라고 하는 초강대국 미국이 눈에도 보이지 않는 중국 발 바이러스로 인해 온통 쑥대밭이 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90여만 명이 감염이 되었고 5만 명 이상이 죽었으니 이 보다 더 큰 위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람의 수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경제적인 손실도 또한 너무 커서 삶의 질이 최악으로 떨어지고 있는 현실을 온 몸으로 겪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도 욥이라는 인물은 당시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족들을 극진히도 돌보았던 흠 하나 없는 위대한 인물이었으나 10남매를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부자라 칭함을 받았던 모든 재산 또한 한 순간에 다 없어져버리고 몸마저 병이 들어 사경을 헤매고 있어야 하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겪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인생에 위기가 닥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와 같은 위기로 인해 당해야 하는 고통이 너무나도 비참하고 외롭다는 것뿐입니다. 욥만 보더라도 위로한답시고 찾아 왔던 친구들은 한결 같이 욥을 비난하였습니다. ‘뭔가 잘못을 했으니까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위로와 힘을 주어야 할 마누라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라!’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혼자 뒹구는 낙엽처럼 비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손을 잡고 위기를 넘겨 성경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한 사람 야곱을 만나게 됩니다. 야곱은 인생일대 최악의 위기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뒤에서는 외삼촌이 잡아 죽이겠다고 추격해 오고 앞에서는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에서가 원수를 기다리듯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 서 있는 야곱을 통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당하고 있는 오늘의 끔찍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는지, 도전과 교훈을 받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것입니다
(롬8:16-18)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고로 하나님의 상속을 받을 것인데 그 상속이라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최고는 “천국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그 놀라운 영광을 상속 받으려면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당하셨던 “고난”도 상속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이렇듯 “고난”이라는 “삶의 위기”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와 같은 고난으로 인한 “위기”를 겪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의 3대 족장이었던 야곱이 당하는 위기가 고스란히 기록 되어져 있습니다. 참으로 모든 사람이 다 겪는 그런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는 참담한 위기였습니다.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듯이 야곱은 그의 형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을 거짓으로 가로채고 잡아 죽이려고 펄펄뛰는 에서를 피하여 그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를 떠나 머나먼 타국 외삼촌댁으로 도망을 갔던 인물입니다. 돈 몇 푼 떼먹었다고 폭력배를 동원하여 신체를 절단하며 받아내는 게 현실이라면 평생에 누릴 축복을 몽땅 다 도적맞았을 때는 오죽하였겠습니까? 그러므로 버젓이 부모님이 살아계시는데도 그와 같은 사기꾼 동생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약삭빠른 야곱은 외삼촌댁에서도 사기를 치고 모든 재산을 갈취한 다음 가속들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하였습니다. 이것을 나중에야 눈치 챈 외삼촌은 군사들을 이끌고 야곱을 추적하러 나섰고 도망하여 돌아갈 고향에서는 형 에서가 군사들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야곱은 문자 그대로 進退兩難(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인생살이에서 닥치는 위기는 언제든 찾아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위기가 어느 정도 치명적인가, 아닌가가 다를 뿐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조종사라고 하면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고 연봉도 높고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그런 좋은 직업입니다. 그런데 지금 만연하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항공사가 직격탄을 맞게 되자 조종사도 해고를 당하거나 무급휴직을 해야만 합니다. 40대의 한 조종사는 그동안 주식에 투자하여 재산을 탕진한데다 갑자기 무급휴직이 되자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집안 목욕실에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조종사가 생활고로 자살한다는 현실을 과연 그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생여정에서 직접 목격하고 있는 위기의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야곱이 직면한 위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성경은 가감 없이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창32:6-7)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야곱은 미리 정탐을 보내어 에서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에서가 무려 군사를 4백 명이나 거느리고 마주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은 4명의 아내들과 13명의 자식들을 거느리고 삼촌도 속여 가며 얻었던 목숨과도 같은 재산을 거느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4백 명의 형의 군사들이 들이닥치면 모든 것이 다 끝장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심히 두렵고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창32: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 내 놓은 이 말이 가장 진실한 자신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직면한 삶의 현실적인 위기였던 것입니다.
위기 속의 외로움
(창32:22-24)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야곱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준비하였습니다. 행여나 형 에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세라 목숨과도 같은 소중한 재산을 나누어 형에게 먼저 보내고 그래도 형의 마음이 풀리지 않아 공격을 해 온다면 그 기회를 틈타 도망할 수 있도록 가장 소중한 것일수록 뒤에 남기고 종들과 가축들을 앞세워 다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혼자 강 이편에 남았던 것입니다. 이 광경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야곱의 심정이 과연 어떠하였을까요? 죽을지, 살지의 갈림길에서 모든 것들을 결단하고 강을 건너보내고 혈혈단신 혼자서 강 이편에 남은 캄캄한 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의지할 곳 없는 망망한 들판에서 홀로 남아 두려움과 고통에 떠는 야곱의 모습은 망망대해에 흔들리는 一葉片舟(일엽편주)와 같이 초라하고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긴 인생 여정을 살아가야 하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강가에 홀로 엎드린 야곱의 모습인 것입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삶의 위기에 처했을 때 결국 우리는 혼자인 것입니다. 이 종도 주의 종으로서 천지분간도 할 수 없었던 20살 어린 나이에서 지금까지 그렇게 외롭고 힘들고 절망하고 지치면서 혼자서 이 사명을 감당해 오고 있습니다. 특별히 나이 서른두 살에 우리교회를 개척하고 세상 깡패들보다 더 악랄한 교인들과 싸우며 혼자서 이민국 문제, 자녀들과 가족문제, 교회문제를 해결해 나올 때 할 수 있는 한 마디는 바로 “너무 힘들고 외롭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욥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마누라도 친구들도 다 소용이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40명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자지도 아니하겠다고 달려들 때 누가 그의 위로가 되어주었습니까? 다윗이 자신을 배신하고 창칼을 들고 달려들던 아들 압살롬이 죽었을 때, 혼자서 그 아들 이름을 부르며 슬퍼하고 피눈물을 흘릴 때 누가 그와 함께 하여 주었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물과 피를 다 쏟으며, “내가 목마르다.”고 절규하시며 죽어갈 때 과연 누가 그 주님과 함께 해 주었습니까? 결국 인생은 외로운 것이고 홀로가야 하는 지독하게도 고독한 길입니다. 특별히 요즘처럼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죽어갈 때 그 곁에 과연 누가 위로의 말 한마디라도 전해주며 함께 해 줄 수가 있습니까? 더욱 더 비참한 것은 죽고 나서 장례조차 제대로 치루지 못한 채 화장터로 가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들의 현실이라는 것이 두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2백 9십만 명이 감영 되어 앓고 있고 이미 20만 명 이상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우리는 “인생의 위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얍복나루에 혼자 외롭게 엎드렸던 야곱의 가련한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결사각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창32:24-29)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야곱은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것도 막연하게 매달린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어차피 죽을 몸임을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야곱은 이미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창32:9-11)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고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하는 기도는 그것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목숨을 걸고 매달렸으면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네가 이겼다!”고 선포하시고 그의 이름까지도 바꾸어 주셨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들의 인생길이 힘들고 고달프지만 오늘 우리들에는 야곱의 기도를 들어주시던 하나님이 계시니 두렵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더욱 원통하고 가슴 아프고 외로와도 우리들에는 예수님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늘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야곱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기대하고 부르짖으며 기도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더하라면 서러울 만큼 평생을 혼자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외롭고 고달프지만 절망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헌신하였던 사도 바울은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후5:8-9)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 말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차라리 몸을 떠나”라는 말은 죽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몸을 떠나 죽어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도 좋다고 선언하고 그렇게 죽어서 주님과 함께 거하든지 이 땅에 살아서 주님의 일을 하든지,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야곱과는 차원이 다른 고백인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이렇게도 밤이 새도록 시름하였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은 죽어도 좋은데 그렇게 죽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 길도 가겠다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야곱과 같이 육신적인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든지, 사도 바울과 같이 신령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든지, 하나님은 간절함이 있는 한 다 보살피고 인도하시고 기도를 응답하시니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만큼은 오늘 가슴에 새기고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야곱은 하나님의 권세를 덧입고 그렇게도 무서워하던 에서를 만나게 되고 하나님께서 외삼촌 라반의 마음을 돌이켜 놓으셨듯이 에서의 마음을 돌려놓아 두 형제가 해피엔딩하게 되었습니다.
(창33: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못하실 것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현실이 힘들고 어렵고 외롭고 고달프지만 이와 같은 하나님께 야곱과 같이 목숨 걸고 기도하여 돌아선 에서를 새롭게 만나는 기적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이 연약하면 연약할수록 전능하신 하나님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도 새로운 각도에서 만나는 변화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렇게 우리 스스로 죽었다 깨도 체험하지 못하는 기적 같은 축복을 주시려고 죽을 만큼 힘든 위기를 주시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지난 주 초에 낯선 전화번호로 전화가 와서 또 스펨인가 하여 안 받으려고 하다가 혹시나 때가 때인 만큼 또 급한 일이 있으랴 싶어 받았습니다. “아무갭니다.”하였지만 얼핏 알아듣지를 못하고 다시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말하는데 오래 전에 이웃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쫓겨난 후배목사였습니다. 나성열린문교회에서 부목으로 있다가 이곳 교회에서 초청하여 올라왔는데 2년도 채 되기 전에 아무 문제도 없는데 쫓아냈습니다. 천사같이 가면을 쓰고 교회의 주인 노릇하는 장로가 한 짓이었습니다. 그 때 너무 안타까와서 린우드에 있는 블랙엥거스라는 스테이크 집으로 전 가족을 불러 식사를 대접하고 용기 잃지 말라고 당부를 한 채 헤어졌습니다. 그 때 남매가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개척을 하였으나 안정을 찾지 못했고 지금도 벨뷰에서 개척을 하는데 교회 얻을 형편도 안 되서 가정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활을 하느냐고 했더니 첫 딸이 이제는 직장을 잡아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것입니다. 이 위기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전화를 했느냐고 했더니, “이 난리 통에 목사님은 편안하신지 문안전화 드렸다.”고 했습니다. 나의 문안보다는 힘든 자신의 안부를 전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듯 위기는 있지만 결코 우리는 망하지는 않습니다. 왜 다른 사람도 아닌 목사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며 살아야 할까요? 세월이 지나면 힘들게 했던 그 사람은 결국 젊은 목사 보다 앞서 죽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남을 위기에 빠뜨리지 맙시다. 그리고 위기에 빠진 이웃을 외면하지도 맙시다. 인생은 짧고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