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배우라! (2020년 8월 23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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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3 August 2020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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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배우라!
8. 23, 2020
本文:마태복음11:28-30
說敎:崔仁根牧師
오래 전에 미국의 생물학 교수인 윌리암 클라크 박사가 일본에 교환 교수로 갔습니다. 그는 북해도 제국대학으로 가서 생물학을 가르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북해도로 갈 때에 그는 생물학에 관한 책보다는 성경을 더 많이 가지고 갔습니다. 일본 측 교수가 이를 보고 "생물학 교수가 성경이 무엇에 필요합니까?"하고 질문하면서 북해도 제국대학에서는 성경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클라크 박사는 배를 돌려 그렇다면 북해도로 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국대학 당국은 할 수 없이 성경을 과외에 가르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클라크 박사는 8개월 동안 강의를 하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북해도 제국대학을 떠나면서 학생들에게 "청년이여, 야망을 품으라!(Youth, Be ambitious!)”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불과 8개월 동안 가르친 성경이지만 학생들에게는 80년간 배운 일반 지식보다 더 큰 감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클라크 박사의 제자로 일본교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유명한 우찌무라 간조라는 인물이 나왔던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이토록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지금 명령하고 계십니다. “나를 배우라!”고 말입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 명령을 가슴으로 받고 부지런히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그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하나님을 똑바로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을 통해 우리 예수님의 무엇을 배워야 하겠는지 함께 공부하면서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된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스스로의 성품을 분명하게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온유와 겸손”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예수님의 제자이기를 소망하는 오늘 우리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배우고 익혀야 할 덕목은 바로 “온유와 겸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이와 같은 신자로서의 최고의 덕목인 온유와 겸손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막9:33-37)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은연중에 누가 더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툼을 일으키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을 불러 이 문제로 인한 교훈을 새롭게 하셔야 할 만큼 덕을 쌓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출세욕까지 넘쳐나서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앉으려는 쟁탈전까지 벌이고 말았습니다.
(막10:35-4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 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 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야고보와 요한이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의 좌, 우에 앉기를 원하고 조용히 예수님을 찾아가 청탁하는 모습과 이것을 나중에 알고 난 나머지 열 제자들이 분이 가득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열 둘의 이와 같은 행태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과는 전혀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그들의 그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악하여 예수님도 잡아 죽이려던 죄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눅4:28-30)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로 이처럼 분이 가득하여 질시하였다면 이 악한 자들과 다를 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최소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어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단 한 번이라고 보고 배웠다면 세상에서 악에 젖어 있는 그런 사람들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조금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무려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배우고 훈련 받았던 제자들도 이 정도였다면 과연 오늘 우리들은 어떻겠습니까?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직도 총회장이나 노회장이 되겠다고 돈을 물 쓰듯 쓰면서 정치하는 목사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고 교회 내에서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헤게모니를 잡겠다고 하는 성도들이 어느 교회에나 넘쳐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예수님께서 명령하고 계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로 와서 내게 배우라!”고 말입니다. 거듭 우리 예수님께서 천명하신 바와 같이 높아지려고 하면 낮아질 것이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섬겨야 하리라는 말씀을 우리는 겸허히 받아들이고 제발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로 남은 삶의 신앙생활에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마하트마 간디(M. Gandhi)는 키가 5척 밖에 되지 않는 볼품없는 모습에 무명옷을 입고 생활했지만, 그는 그의 유명한 '무저항주의'를 통하여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했습니다. 1930년 3월 12일, 그를 따르는 온유한 무리들은 이른바 '소금의 행진'이라고 하는 시위를 했습니다. 소금 전매법을 반대하며, 소금을 만드는 곳을 향하여 인도의 독립을 외치며 나아갔습니다. 그는 수차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암살까지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늘 하나 들어보지 않고, 돌 하나 던지지 않고, 3백 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독립시키고야 말았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온유한 자의 마음에 평화가 깃듭니다. 새로운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의 능력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배워야 합니다
(마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우리 예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거나 특정한 잘못을 저지른 죄인을 심판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 사랑하시면 끝까지 사랑하시고 그 어떤 잘못도 친히 용서해 주시는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는 말씀에서 참으로 우리는 가슴이 찡하게 울리는 감동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의 사랑이요 우리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들의 사랑은 과연 어떻습니까? 너무나도 변화무상합니다. 그렇게도 좋아서 그 사람이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 연애하고 결혼까지 했는데도 어느 날 부터인가 그 사랑이 다 식어버리고 싸우고 다투다가 이혼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변해 있는 모습을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개척 초기에 랜톤에서 나오는 한 30대의 젊은 부인이 찾아와서 상담을 하였습니다. 대학 동아리에서 만나 연애를 시작하고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 너무 좋아 취직도 같은 회사로 하여 7년을 죽고 못 사는 교제를 하다가 마침내 결혼하고 아들 둘 낳고 지금 5년째 살고 있는데 이제 더 이상은 같이 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자신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꼴도 보기 싫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는 저 역시 같은 또래의 30대라 경험도 지혜도 부족해서 “성인으로서 또 신앙인으로서 자신이 선택한 일이니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묵묵히 살아보도록 노력해 보라.”고 했더니 도움이 전혀 안 되었는지 그 때부터 교회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예수님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끝까지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께서 친히 보시는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돌아섰지만 부활하시자 말자 바로 그 베드로를 찾아가 빈 배를 채워주시고 손수 조반을 만들어 먹이시며 “네가 나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지 않았습니까? 역시 우리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 끝까지 하는 사랑이었음을 요한복음 21장에서 우리는 밝히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오늘 우리들은 우리 예수님의 이와 같은 불변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동하여 평생을 그 사랑에 보답 할 마음으로 충성하며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는 고백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발견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과연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아예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죄인 된 우리들을 용서하심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8:3-1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용서하심을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분명하게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형제를 용서하고 그들로 인해 다소의 불 유익을 당할지라도 너그럽게 감수하는 용서와 사랑의 미덕을 배워야 하곘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훔쳐 가지고 도망갔던 아들이 불량배와 어울려 그 많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실패와 절망 속에서 번민하던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가서 용서를 구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죄 많은 이 아들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고 싶어 모월 모일 모시에 기차를 타고 우리 집 앞을 지나가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만일 저를 용서하신다면 집 앞마당에 있는 배나무에 흰 손수건을 걸어 놓아 주시기 바랍니다. 배나무에 흰 손수건이 걸려 있으면 제가 찾아 들어가겠고 만일 손수건이 없으면 저는 그대로 지나가겠습니다." 드디어 약속된 날이 왔습니다. 그 아들은 배나무에 손수건이 걸려 있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초조한 마음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니 집 앞마당을 지날 때 이 아들은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곳엔 배꽃처럼 수없이 많은 흰 손수건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이 혹시 손수건이 걸린 것을 못 보고 지나쳐 버릴까봐 염려한 아버지는 집안에 있는 흰 천을 모두 찢어서 배나무 가지마다 걸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복종과 희생을 배워야 합니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예수님의 참으로 놀라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함을 포기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사람이 되시어 하늘의 하나님께 복종하시고 십자가를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자랑할 만하던 모든 것을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도록 배설물과 같이 버리고 평생을 하루같이 오로지 예수님만을 위해 헌신하였던 것은 이처럼 예수님을 본 받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그 고귀한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 놓고 낮고 천한 이 땅에까지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면 이 세상에서 자랑할 만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빌3:4-9)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님을 똑바로 배워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자랑할 것이 있고 잘난 것이 있다고 여긴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증거요 예수님을 잘 배우지 못한 증거일 것입니다. 요즘은 어린 아이와 어른을 막론하고 도대체가 순종을 모르는 시대입니다. 망하는 길일지라도 끝까지 제고집대로 제 길을 달려가는 시대이니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거역하고 잘 되는 자식이 없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복 받은 사람이 없는 것을 우리는 우리 나이만큼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는 길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니 복종하시고 희생하셨던 예수님과 죽는 줄 알면서도 장작더미 위에 올려지도록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하였던 이삭을 본 받아 제발 우리 잘 되라고 노심초사하시는 부모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제대로 된 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도 엄히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배우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