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빌립보장로교회

-- 성령의 열매맺는 교회 --

Fri04262024

Last update12:00:00 AM

Font Size

Profile

Menu Style

Cpanel
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2020년 9월 13일 주일낮설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2020년 9월 13일 주일낮설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36주년 설립기념 감사예배

9. 13, 2020

本文:빌립보서4:10-13

說敎:崔仁根牧師

 

20세기 정신적 거성중의 한 사람인 슈바이처 박사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공부하던 중에 행복한 자기는 불행한 자들을 위해서 살고 무엇인가 봉사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30세 까지는 자기를 위해 살고 그 후부터는 남을 위해 살겠노라고 결심하게 됩니다. 30세에 이미 목사로, 신학자로, 대학교수로 또 음악가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면 남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무슨 일로 인류에게 봉사할 것인가? 하고 고민하던 그는 어느 날 신문을 보고 그의 인생의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프리카 콩고 지방에서 흑인에게 의료봉사를 할 하나님의 일꾼을 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할 일을 깨닫고 다시 의학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7년 동안 공부하여 의사가 된 그는 부인과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거기서 90세가 되도록 흑인들을 위해 봉사하였습니다. 넉넉하게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끝난 슈바이처로 하여금 90평생을 흑인을 위하여 봉사하게 한 그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던 것일까요? 그 해답이 오늘 본문 말씀에 고스란히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만약 슈바이처 박사가 이미 완성해 둔 목사와 신학자와 음악가로서 대학교수가 되어 자신의 명성과 부귀영화를 위해 살았다면 그가 떠난 지금 그의 삶을 누가 과연 지금처럼 기억하고 존경하고 있겠습니까? 마지막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그는 온전히 사도 바울과 같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과감하게 버리고 새롭게 7년 동안 의사 공부를 하고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들어가 헌신하였기 때문에 지금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고 또한 기억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젊은이 여러분들은 도전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슈바이처는 남을 위해 그 힘든 의사공부를 7년 동안이나 새롭게 하고 그 기술로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을 살리며 평생을 헌신하였는데 여러분들도 원대한 꿈을 안고 열심히 공부해서 평범하게 자신만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과 부모님과 불쌍한 이웃들을 위해 살아가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꿈과 헌신을 위해 살라고 외치는 여러분의 목사는 20살의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목사로 살겠다고 결단하고 부모형제가 그렇게도 반대하는 신학대학으로 진학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32살의 나이에 우리 빌립보장로교회를 개척하여 오늘에 이르기 까지 37년 동안 섬겨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부터 37년 전에 시애틀에는 한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한인마켓도 하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개척이라니, 말이나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때 어떻게 교회를 개척하고 오늘 우리들이 사용하는 이렇게도 훌륭한 교회당을 건축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 해답은 오직 하나 내게 능력주시는 자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나 슈바이처 박사나 여러분의 목사에게만 해당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 되는 해답니다. 우리 교회가 36살이 되는 귀하고 복된 설립기념 예배 시간에 이와 같은 말씀으로 신선한 도전을 받을 수 있도록 오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도 바울은 용기 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이 세상을 정복하고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슈바이처 박사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모든 준비가 다 끝난 황홀한 인생 출발점에서 신문 한 장을 보고 그 모든 준비된 배경들을 포기하고 새롭게 의학공부를 하여 의사가 되어 남의 나라 아프리카로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보통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학은 그렇게 간단한 학문이 아닙니다. 옛날부터 신학, 수사학, 천문학은 가장 어려운 학문들로 분류하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학문을 포기하고 새롭게 7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하여 의사가 되겠다는 발상이 과연 평범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바이처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인용해 드린 빌립보서에서도 우리는 사도 바울의 놀라운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 또한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보기 드문 스펙을 가진 빼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전통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학문을 터득하였으며 당시 많은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로마시민권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오직 예수님 한 분을 온전히 섬기기 위해 그 모든 스펙들을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고 했으니 대단한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소중한 것을 버린다는 것은 그만큼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주님을 위해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누군가를 위해서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슈바이처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다 포기했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가진 위해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 속담에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다 잡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려면 가슴 아프지만 세상의 소중한 것들을 포기해야 하고 세상을 선택하려면 하나님을 포기해야 합니다. 둘 다 소중 하지만 진정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이 무엇인기를 깨닫는다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 평생 동안 자신을 키워주신 늙으신 어머님과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처녀의 몸으로 아들 넷을 가진 홀아비인 자신에게 시집 와서 남의 아이들을 키우며 자신을 온전히 포기했던 부인 오정모사모님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모질고 고통스러운 고문을 이겨내며 끝끝내 예수님의 손을 잡고 거룩한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놀라운 힘과 능력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오직 능력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께서 친히 맡기신 사명을 위해 한 목숨을 기꺼이 내 놓았던 인물이었습니다.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사람이 목숨을 내 놓았을 때 못 할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모든 전쟁 승리의 비결은 최후의 5분간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산을 넘어갈 때 척후병을 보내서 탐지를 해 보았습니다. 이탈리아를 점령하려 할 때 척후병이 다녀와서 보고하기를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나 다음에 "가다가는 큰일 나겠습니다. 못가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나폴레옹 같은 독재자에게 보고할 때 처음부터 갈 수 없다고 말하면 몽둥이를 맞을 테니까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하고 말하려니까 "그만 말해라."하고 나폴레옹은 전혀 가능성이 없어보이던 눈 덮인 알프스 산을 넘었습니다. 한번은 5만 군대가 다리를 건너가야 하는데 다리가 휘어져서 금방 내려앉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모든 참모들은 갈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이 최후의 5분간, 아니 최후의 20초 동안에 칼을 휘두르며 다리의 한복판에 섰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은 언제나 생명을 걸었던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내 놓는 사람은 이렇듯 승리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위험한 다리 한 가운데 서서 진군나팔을 불게 하여 5만 명이 다 지나가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떤 문제 앞에 섰을 때에 독수리의 올려치는 날개처럼 힘차게 방향을 바꿔 나아가면 그것이 위대한 승리를 가져 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승리케 하시는 분은 오직 권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살리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신자들을 굴복시키고 구원하였습니다

(9:17-22)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던 살인마 사울이 그 예수님을 증거하여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말이 그렇지 이 사실을 현장에서 경험하였던 유대인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사람을 잡아 죽이던 살인도 놀랍지만 갑자기 돌변하여 그 예수님을 전하는 모습은 또한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겠습니까?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그의 전도에 유대인들이 굴복하며 예수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능력입니다. 과연 사울이 누구라서 이처럼 한 순간에 예수님의 사람들로 돌변하게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는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말입니다. 실제로 성경 속에서 사도 바울 만큼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운 사람도 없습니다. 신약성경의 바울서신은 사실 그가 친히 개척한 교회 이름인 것입니다. 로마서는 그가 개척하였던 로마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이고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등 이처럼 위대한 일을 행한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놓고도 그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는 오늘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숱한 사람들을 살려 냈습니다

(27:20-25)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 이야기는 사도 바울이 죄수가 되어 가이사에게로 가는 도중에 어마어마한 풍랑을 만났던 사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배 안에 있는 사도 바울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을 건져주신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 한 사람 때문에 그와 함께 하였던 276명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어디에 가든지 나 하나 때문에 이웃이 복을 입고 유익을 얻는 인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요나와 같이 그 한 사람 때문에 그 배에 타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고통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사도 바울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을 많이 베풀어 죽어가던 사람들을 살려내었습니다.

(19:11-12)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바울의 능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가졌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어도 그 병이 떠나갈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이 외에도 사도 바울의 능력과 기적은 성경에 많이 기록 되어져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8:3-5)

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20:9-12)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그는 오늘 우리들과 똑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예수님과 버금가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이렇게도 많이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능력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남겨 두신 한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감히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이지만 진정한 믿음이 우리 속에 있다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역사요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우리들에게 주신 소중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은 놀라운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와 같은 능력을 이 땅에서 행사하려면 기본적으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의 중심은 바로 이런 믿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처럼 고귀한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통해 사도 바울과 같은 놀라운 역사를 이 땅에 만들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주시고 교회를 주신 우리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Add comment


Security code
Refre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