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참으라! (2021년 7월 18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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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8 July 2021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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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참으라!
7. 18, 2021
本文:민수기20:1-13
說敎:崔仁根牧師
[인간관계]라고 하는 것이 때로는 우리들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커다란 슬픔과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불신감은 말할 것도 없고, 이기적인 동기나 상대에 대한 불성실함 등등의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아픔을 겪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 때문에 한 때는 가깝고 친밀했던 상대와의 인간관계가 여지없이 깨져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소한 오해만으로도 쉽게 깨어지는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마치 바윗돌 같이 서로의 관계가 두터워서 결코 깨어질 것 같지 않은 인간관계도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지켜나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들은 또 무엇일까요? [성경]에 그 해답이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골3:12-14)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여기에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는 것은 “이러한 것들로 자신을 감싸라.”는 말입니다. 비록 긍휼이나 겸손과 같은 것들이 완전히 내부에 감춰져 있을 때에도, 항상 이러한 것들에 몰두하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던졌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성경]은 건강하고 가치 있는 인간관계에 필요한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긍휼, 자비, 겸손,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입니다. 우리는 이 다섯 가지 성품으로 [옷을 입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사람은 긍휼이 넘치고 자비하며 겸손하고 온유하고 또 오래 참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멋진 인생이겠습니까? 때로 지치고 넘어졌을 때, 그 사람에게서 친절함을 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 그 사람의 따스함이 있기에 위로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줄 때에도, 다른 사람을 보살필 때에도, 그 사람은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습니다. 결코 다그치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몇 번이나 잘못을 거듭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우면서 함께 일할 수 있는 인내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오늘은 바로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성경으로 돌아가 바른 진리를 배워보려고 합니다. 한 시간에 다섯 가지를 다 배울 수가 없기에 오늘은 오래 참는 일에 관해 준비해 보았습니다. 모쪼록 마음 귀를 기울이시고 복된 말씀으로 풍성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참되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민20:10-12)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들이 성경에서 밝히 잘 아는 대로 모세는 참으로 그 성품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았고 그 어떤 모욕과 멸시도 묵묵히 참아 내며 오로지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인도하심을 따랐던 인물이었습니다. 젊은 날에 자기의 의로 나라를 구원하여 보려고 사람을 쳐 죽인 것이 화근이 되어 왕궁에서 도망 나와야 했었고 광야에서 40년이란 긴 세월을 유랑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그를 새로운 인격체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세를 하나님께서도 친히 인정하시고 그의 온유함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성경에 친히 기록해 두셨습니다.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고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누이 미리암과 아론이 자신을 향하여 감히 비방까지 하였으나 그는 내색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안으로 새겼습니다.
(민12:1-2)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시고 그렇게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생기도록 심판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훗날 고라의 자손들이 당을 지어 떼를지어 모세에게 몰려와 모세를 배신하고 모세를 공격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모세는 그들을 직접적으로 상대하여 싸우거나 대항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참아냈습니다.
(민16:1-3)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도저히 우리는 그곳 사람들을 이길 수 없노라고 보고하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도록 통곡하며 난리를 치다가 급기야는 모세를 돌로 쳐 죽이고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난리를 칠 때에도 모세는 묵묵히 하나님 앞에 엎드릴 뿐 그들을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그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거의 초인적으로 참아내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묵묵히 잘도 감당해 나갔습니다.
(민14:1-5)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민14: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그는 최악의 경우에도 잘도 참았었는데 마지막 신 광야에서는 그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목이 마르다고, 물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의 원망 앞에서는 그만 참지 못하고 거칠게 화를 내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민20:10-12)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 한 번의 실수로 모세는 꿈에도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참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렇듯 “적당하게”는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미 급한 베드로에게 “너는 이것까지 참으라!”고 명령하셨던 이유 또한 끝까지 참아야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제자로서 스승을 보호해야 하고 지켜야 함이 마땅한 도리이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인간적인 도리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욱 귀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지키려는 베드로의 충정을 다 아시면서도 “참으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눅22: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참아야 합니다
사람이 길이 참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스스로 해명하고 스스로 벗어나려고 하니 늪에 빠진 사람처럼 더욱 더 깊이 빠져들고 해결은커녕 소중한 삶조차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유를 가지고 우리들의 삶의 주인은 하늘의 하나님이신 줄 믿고 묵묵히 그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길이 참고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마24:9-13)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끝까지 참고 견디다가 구원을 받은 사람이 성경에 있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비참하게 무시를 당하고 살았지만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그 하나님만 기대하고 의지하며 견디다가 구원을 받은 모르드개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무려 127도나 되는 거대 제국 아하수에로 왕정 하에서 존재하던 소수민족 유다민족은 그야말로 바람 앞에 선 작은 등불만큼이나 위태로운 존재였습니다. 거기에서 악하기로 유명한 2인자 하만의 계략으로 이 작은 유다민족은 서러움과 무시를 온 몸으로 받으며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절대 권력을 가진 자의 밥이 되어 송두리째 사라지게 될 순간까지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는 끝까지 굴하지 아니하고 온갖 위협과 멸시를 참아내며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고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모르드개는 절대적인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며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도 아하수에로 왕에게 공덕을 받을 마땅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에게 원한을 품은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을 모살하려고 모의를 하는 현장을 목도하고 이것을 즉각 동생 에스더에게 고하였고 그것을 사실하여 본 결과 그들이 범인인 것을 발견하고 왕을 시해하려던 자들을 붙잡아 사형에 처하도록 하여 왕의 생명을 보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에2:21-23)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 지킨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왕을 원한하여 모살하려 하거늘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고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고한지라 사실하여 실정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의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소위 왕의 1인자가 그러한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면 어떻게든지 자신의 공을 앞세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된 자신을 변호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르드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철저하게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실을 왕이 스스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왕은 잠이 오지 않자 신하를 불러 궁중일기를 읽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모르드개의 그 아름다운 선행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에6:1-4)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 지킨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왕을 모살하려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왕이 가로되 이 일을 인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시신이 대답하되 아무 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 왕이 가로되 누가 뜰에 있느냐 마침 하만이 자기가 세운 나무에 모르드개 달기를 왕께 구하고자 하여 왕궁 바깥뜰에 이른지라 시신이 고하되 하만이 뜰에 섰나이다 왕이 가로되 들어오게 하라 하니 하만이 들어오거늘 왕이 묻되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뇨 하만이 심중에 이르되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자는 나 외에 누구리요 하고 왕께 아뢰되 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시려면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 왕이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이에 왕이 하만에게 이르되 너는 네 말대로 속히 왕복과 말을 취하여 대궐 문에 앉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에게 행하되 무릇 네가 말한 것에서 조금도 빠짐이 없이 하라
이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어느 때에 나타나게 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 때에 왕이 잠이 오지 않았으며 그래서 궁중 일기를 읽는데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사건들 중에 모르드개의 선행을 읽게 되었으며 하필이면 바로 그 때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모든 계략을 완성해 놓은 하만이 문밖에 서게 되었을까요? 일부러 감독이 사건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그렇게 극본을 끼워 맞춰도 이처럼 절묘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렇게도 정확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사실을 이 사건을 통해서 분명하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너무 성급하게 모든 일을 인본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모르드개처럼 묵묵히 때를 기다리며 참고 견디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고 기다리는 자에게만 주시는 풍성함과 자유함으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가가와 도요히꼬 이야기가 이처럼 묵묵히 참고 견디는 미덕을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가와가 젊은 시절에 빈민굴에서 전도하는 것을 본 친구의 눈에는 이 사람이 아무리 보아도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도박꾼, 싸움해서 살인한 사람, 전과자, 창녀에게 전도하여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리는데 그들 중 모두가 다 찬송을 부를 줄 모르므로 자기 혼자 찬송을 목이 터져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뒤에서는 남자들이 와서 예배드리고 있는 창녀를 끌어내고 창녀는 또 일어나 따라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돈을 내라고 사람들이 가가와의 따귀를 때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가가와는 바보처럼 또 돈을 내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바라 본 친구는 화가 났습니다. "저 사람들에게 돈을 주면 가서 또 도박을 하거나 술을 마실 텐데 너는 왜 그런 것을 다 알면서도 돈을 주느냐? 행여 넌 위선자가 아니냐"고 가가와에게 따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가가와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같이 하는거야."라고만 대답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어린이를 키울 때 넘어지면 일으켜 주듯이, 의사가 병자에게 주사를 놓고 또 놓듯이 넘어지면 일으켜 줘야 한다. 다 알고 마지막까지 믿어 주고 참아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냐?"고 그는 말했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마지막까지 참는 것이고 속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참으려면 끝까지 사랑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남을 보지 말고 자신을 살피며 참아야 합니다
(삼하16:5-11)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사람이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그 모든 고통의 요인을 타인에게 돌리며 원한을 품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고통의 요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며 조용히 반성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에서 읽은 말씀 속에서 우리는 다윗의 위대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자신의 목숨을 헤하려고 함으로 부끄럽고 창피하게도 왕이 도망을 가고 있는 노중에 뜻하지도 않게 사울 왕의 신하였던 시므이가 나타나 다윗을 독한 말로 저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가뜩이나 아들에게 도망가는 신세가 처량하고 부끄러운데 감히 왕인 자신을 저주까지 하며 따라오는 시므이를 당장에 목을 베고 말았을 것인데 다윗은 신하가 그렇게 하겠다고 공분하고 나섰으나 만류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내 아들도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남이 나를 저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을 만나 모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남을 보지 말고 자신의 못나고 초라한 모습을 보고 길이 참아내는 미덕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시고 우리들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보다 또한 하나님을 더 생각하는 자세,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
(시37:32-37)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고 말입니다. 이 말씀처럼 다윗은 신하의 저주까지 받으며 초라한 도망자의 신세였으나 그 모든 수욕을 참고 견디니 결국 하나님께서 왕권을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당당하게 군림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시므이는 결국 자신의 악한 행위에 대한 대가를 죽음으로 당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다윗과 같이 비록 오늘은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내일의 하나님의 공의와 축복을 기대하며 조용히 참고 견디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