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고 담대하라! (2021년 8월 15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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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5 August 2021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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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고 담대하라!
8. 15, 2021
本文:요한복음16:25-33
說敎:崔仁根牧師
광림교회 김선도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어떤 젊은이의 간증이 나옵니다. 그는 고향인 이리에서 페인트 장사를 했었는데 마음이 너무 좋은 사람이라 자기 친구가 사업에 실패하여 어려움을 당하자 자기가 보증을 서고 빚을 얻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사업은 더욱 실패하여 부도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빚보증을 섰기 때문에 자기 상점도 빼앗기고 피신해 다니다가 하루는 다리에서 불량배들을 만나 맞아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그 청년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다리 밑으로 자기 몸을 던졌는데 그만 거꾸로 떨어져서 머리를 다치고 목이 부러져 전신 마비가 되어 죽은 사람 같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식물인간이 되어 슬픈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음에 공허가 생겨서 무엇인가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었는데 치료를 해주는 간호사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날마다 "하나님, 나의 손발이라도 움직이고 내손으로 밥이라도 먹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자 기적적으로 손과 발에 신경이 통하고 허리를 들고 일어나 앉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 계속하여 매달려 기도 생활을 하던 중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그는 "나로 하여금 걸어 다닐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면 주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완전히 버림받은 실패와 고난 가운데서 그 마음에 영혼의 눈이 뜨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험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환난의 때를 맞게 되면 더 더욱 좌절하고 낙심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바로 이 때 사랑의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고귀한 말씀을 던져주십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이 36년 동안이나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 절망하다가 해방된 8.15입니다. 이처럼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일어나고 그 빛을 바탕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의 삶의 그 어떤 환난과 절망이 밀려온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우리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귀한 말씀을 함께 나누며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찾고 고난 가운데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참으로 평범하면서도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환난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환난의 제공자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게 된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창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6:1-6)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 두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이 세상이 왜 그토록 환난과 고통의 도가니가 되어버렸는지 그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땅이 저주를 받으면서 이 세상은 하나님과 무관한 고통의 도가니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요일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저주 받고 망가져버린 세상에서 성도들이 믿음으로 바로 살아가려면 환난과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물속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들이 그 물이 더워지고 오염되어버리면 제아무리 살아보려고 몸부림쳐도 결국은 죽고 마는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마치 흙탕물로 변해버린 호수와 같이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온갖 거짓과 음모가 넘쳐나고 그 어떤 위정자도 백성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자들이 없으며 오로지 자기 자신들만의 유익만 추구하는 썩을 때로 썩어버린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발버둥 치며 살아보려고 제아무리 안간힘을 써 봐도 돌아오는 것은 환난이요 눈물이요 고통뿐인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이와 같은 환난과 고통을 당하셨고 그의 뜻을 전하겠다고 헌신하고 나섰던 사도 바울도 한결같이 그렇게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순교를 당하였으며 그 후에 믿음으로 바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던 수많은 믿음의 선각자들이 예외 없이 이 세상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히11:32-38)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는 말씀은 한결같이 믿음으로 살아가던 성도들이 무슨 고통과 시련과 환난을 겪었는지 자세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을 종합하여 지금 우리 예수님은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고 말입니다. 이와 같은 환경을 경험하고 있지 않다면 이미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과 짝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악한 세상에서 그들과 동조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지키려고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환난을 당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으니 예배당에 모이지 못한다고 나라가 예배당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버스와 지하철은 미어터지고 있습니까? 믿음의 성도들과 가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최대한 방역에 힘쓰고 하나님께도 기도드리며 은총을 사모하며 모이는 교회가 더 안전하겠습니까? 생전 낯모르는 사람들과 뒤엉켜 코를 박고 붙어 서 있는 만원버스와 지하철이 더 위험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와 같은 환경을 극복하고 예배중심으로 믿음을 회복하려면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공권력의 남용을 피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환난이요 고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와 같은 현상을 미리 내다보시고 아예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선포해 두셨던 것입니다.
(요일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요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세가 가까워질수록 세상은 성도들을 미워할 것이며 교인들은 또한 세상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려면 세상에서 미움을 당하고 환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수1:6-7)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믿음을 지키기 위해 성도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을 미리 아신 예수님은 그와 같은 환난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강력한 지도자 모세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하나님은 그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모세의 몸종에 불과하였습니다.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말도 거역하고 대항하였는데 그가 쓰던 몸종을 그 자리에 세웠을 때 순종하며 따르겠습니까? 이것을 미리 아신 하나님은 여호수아로 하여금 모세에 버금가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연약한 자를 향하여 “강하고 담대하라!”고 해서 담대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리더쉽을 발휘하고 담대하려면 거기에 부합하는 내면적인 강력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순하게 “강하고 담대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담대하게 되는 길을 또한 소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놀라운 비결입니다.
(수1:7-8)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정확하게 하나의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돌을 들고 치려고 달려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지 말고 그 모든 백성들을 친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흔들리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강력한 믿음에 굳게 서 있는 성도들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십시오. 사람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절대 권력의 왕 앞에서도 너무나도 담대하게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다니엘을 보십시오. 왕이 아닌 다른 곳에 절을 하게 되면 굶주린 사자굴에 던져 넣는다는 왕의 어인이 찍힌 조서를 곁에 두고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엎드려 절하고 기도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들은 과연 어디에서 이처럼 담대한 용기가 나올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과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단3:16-17)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들에게 믿음이 얼마나 강력하게 있으면 이처럼 불 속에서라도 하나님께서 건져내실 것이라고 선포하며 감히 눈앞에 있는 왕의 추상같은 명령을 거역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담대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믿음입니다. 마지막 때에 이와 같은 믿음으로 무장하고 있을 때 우리들도 이 세상 그 어떤 환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겨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담대하라!”고 명령하시고 또한 그렇게 담대할 수 있는 이유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도 그와 같은 모진 환난을 당하셨지만 그 악한 세상의 모든 환난을 친히 극복하시고 이겼다고 말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이 말씀보다 더 가슴 벅차고 소망이 넘치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가 M. Luther는 이 말씀을 해석하면서 “로마에서 예루살렘까지 무릎으로 달려가면서도 외쳐야 할 놀랍고도 가슴 벅찬 말씀이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이 종은 8월 23일에 훈련소에 들어갔습니다. 35도가 넘는 연병장에서 제식훈련을 받는데 땅이 달아서 열이 종아리까지 올라오는데 몽둥이를 든 조교의 벌을 피해가며 하루 종일 훈련을 받는 것은 지옥,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거운 물건 하나 들어보지 않았던 연약한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위로가 되었던 것은 그렇게도 닦달하는 조교가 시원한 그늘나무 아래에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똑 같이 땡볕에 서서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을 친히 몸으로 시범을 보여주고 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우리보다 천 배, 만 배 더 무서운 환난을 다 당하시고 죽으시기까지 하셨지만 다시 부활하시어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난 다음에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선포하시는데 오늘 우리들이 무엇을 더 망설이고 주저하겠습니까? 무조건 그 주님의 능력을 덧입고 오늘 우리들도 이겨내야만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이기는 자에게만 천국의 숱한 축복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계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그 어떤 세상의 환난이라도 능히 이겨내고 승리의 면류관을 쓰는 멋진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중병을 앓고 있는 50대 아버지를 간호하다 ‘회복할 희망이 없다’는 이유로 굶겨 죽인 20대 아들에게 징역형이 선고됐다.
13일 대구지법 형사 11부(재판장 이 상오)는 존속살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22)씨에 대해 징역 4년을 선고했다. A씨는 지난 5월 자택에서 거동을 할 수 없는 부친 B(56)씨에게 8일간 음식 공급을 중단해 사망하도록 내버려둔 혐의로 기소됐다.
수사과정에서 A씨는 범행 동기에 대해 “아버지를 간호하며 사는 게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A씨는 부친과 단둘이 살았던 외동아들이었지만 별다른 직업은 없었다.
이들 가정의 비극은 지난해 9월, 부친 B씨가 지주막하출혈 등 증세로 입원 치료를 받게 되면서 시작됐다. B씨는 7개월간 치료를 받았지만 병원비는 고스란히 B씨의 동생 C씨가 충당했다.
C씨가 더 이상 병원비를 낼 수 없게 되자 A씨는 부친의 퇴원을 결정했다. 병원에서 “지금 퇴원하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병원비를 마련하지 못했던 A씨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퇴원 당시 부친 B씨는 왼쪽 팔다리가 마비돼 자력으로 움직일 수 없었고, 코에 삽입한 호스를 통해 위장으로 음식물을 공급하는 ‘경관 급식’ 형태로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 2시간마다 체위를 바꿔야 했고, 폐렴으로 인한 호흡 곤란을 막기 위해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한 위중한 상태였다.
A씨는 퇴원 당일엔 병원 안내대로 부친에게 약과 물, 음식을 공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튿날 A씨의 마음은 변했다. 검찰 수사과정에서 A씨는 “(부친이 회복할 것이란)기약 없이 매일 2시간 간격으로 돌보며 살긴 어렵고, 경제적으로도 힘드니 돌아가시도록 내버려둬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A씨는 그날부터 부친에게 처방약을 주지 않았고 하루 3개를 먹어야 하는 치료식도 일주일간 총 10개만 제공했다. 그마저도 부친 B씨가 “배고프다” “목이 마르다”며 자신을 부를 때에만 준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5월 1일부터 8일간은 작정하고 부친이 사망하기만을 기다렸다. 이 과정에서 부친 B씨는 “아들, 아들아”라고 A씨를 부르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A씨는 이를 듣고도 외면했다.
부친이 사망하기 직전 A씨가 방에 들어갔을 때, B씨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들에게 더 이상 물이나 밥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A씨가 생전에 본 부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B씨는 영양실조 상태에서 폐렴 등이 발병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A씨는 부친이 사망한 뒤 119구급대와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B씨의 시신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석연찮은 점을 발견하고 A씨를 수사하면서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재판부는 “A씨가 부친의 사망을 적극적으로 의도했다고 보긴 어렵고, 포기와 연민의 심정이 공존하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전적으로 A씨의 보호를 필요로 했던 부친을 살해하기로 마음먹고 피해자를 방치한 만큼, 동기와 경위가 어떻든 엄벌이 필요하다”고 양형 사유를 밝혔다.](2021년 8월 13일자 조선일보에서 발췌)
[집에서 영상회의를 하던 20대 여성이 자녀가 쏜 총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13일(현지시간) NBC뉴스 보도에 따르면 지난 11일 플로리다주 올랜도 외곽의 소도시 알타몬트 스프링스에서 샤마야 린(21)씨가 영상회의 도중 자녀가 쏜 총에 맞았다.
영상회의 참석자는 “(사고 현장에) 아기가 보였고 린씨가 뒤로 넘어지기 전 소음이 들렸다”라며 911에 신고했다.
당초 린씨가 회의 도중 왜 갑자기 쓰러진 것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경찰은 성명을 통해 “장전된 권총을 발견한 유아가 총을 쏴 고인이 머리를 맞고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발표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자녀는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아기였다. 경찰은 아기가 장전된 총을 발견해 가지고 놀다가 방아쇠를 당긴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사고를 일으킨 총은 남편의 것이었다고 밝혔다. 이들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는데 다행히 자녀들은 다치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18세 미만 어린이가 쏜 총에 맞는 우발적인 사고가 최소 369건 발생했고, 이로 인해 142명이 숨졌다.](2021년 8월 14일자 조선일보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