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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인격입니다 (2021년 11월 7일 주일낮설교)

감사는 인격입니다!

 

11. 7, 2021

:누가복음17:    1  1  -   1  9

:崔仁根牧師

 

人面獸心(인면수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 인) (낯 면) (짐승 수) (마음 심)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사자성어입니다. 뜻은 성질이 잔인하고 흉악한 짐승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에는 한대(漢代) 흉노들의 활동 상황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흉노족은 서한(西漢)시대 중국의 북방에 살았던 유목 민족이었습니다. 당시 한()나라는 흉노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풍부하였으므로 흉노족들은 자주 한나라를 침입하였습니다. 흉노족의 수십만 기마병(騎馬兵)은 해마다 한나라의 북방 국경을 넘어 들어와 농가를 기습하여 가축을 약탈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납치하였던 것입니다. 기원전 133년 한 무제(武帝)는 흉노 정벌에 나서 수년 동안의 전투를 겪으며 그들의 침공을 막아내었습니다.

동한(東漢)시대의 역사가인 반고(班固)는 자신의 역사서에서 흉노족의 잔악함을 묘사하여 오랑캐들은 매우 탐욕스럽게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는데 그들의 얼굴은 비록 사람 같으나 성질은 흉악하여 마치 짐승 같다(人面獸心).”라고 기록하였습니다. “人面獸心(man in face but brute in mind)”이란 본시 한족(漢族)들이 [흉노]를 멸시하여 쓰던 말이었으나 후에는 성질이 잔인하고 흉악한 짐승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극단적인 利己主義(이기주의)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부모도 없고 스승도 없고 진정한 우정과 사랑도 없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런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인생들이 눈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잘 먹고 잘 살고 부족함이 없으니 더 더욱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코로나로 인해 대면예배를 오랫동안 드리지 못하게 되자 하나 둘씩 교인들은 떨어져 나가고 신앙생활을 아예 그만 둔 교인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와 같은 때를 미리 예건이나 하신 듯 경고해 두셨습니다. “인자가 세상에 다시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18:8)고 말입니다.

11월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11월은 교회에서는 가장 귀한 추수감사절이 있는 달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1년 중에서도 가장 큰 명절인 감사절을 지키는 긴 연휴가 계속 되는 감사의 계절입니다. 그런데 절기만 남았을 뿐 사람들의 가슴 속에 감사가 없습니다. 사람이 감사를 드릴 줄 모르게 되면 人面獸心(인면수심)이라는 최악의 존재가 되고 맙니다. 감사는 곧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격자가 되지 못하면 결코 감사를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격자란 지적능력과 정적능력과 의지적 능력을 겸비한 사람을 말합니다. 부모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에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식에는 또한 감동이 없습니다. 감동이 없으니 감사드리는 결단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부모의 지극하신 사랑이 없이는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낳으시고 기르시고 교육시켜 주셨는지를 모르니 감동이 없고 그런 감동이 없으니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부모님께도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편 기자는 탄식하였습니다.

(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고 말입니다. 하나님도 없고 부모님도 없는 사람이 제 스스로 존귀에 처할 수는 결코 없는 것임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제대로 된 인격자인 것입니다. 감사로 제대로 된 인격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이 부모가 되고 지도자가 되니 가정이 파괴되고 나라와 민족이 수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는 제대로 된 인격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감사가 곧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1:2-6)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26:13-17)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 종 된 것을 면케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너희 멍에 빗장목을 깨뜨리고 너희로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진대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신 선민이 되었으면서도 이토록 모질게 심판을 받은 것은 그들이 그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아니하고 그 명령을 불순종하고 그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왜 이렇게도 비참한 존재가 되어버렸을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人面獸心(인면수심)의 미련한 존재로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진정 그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 눈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애굽의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셨는지, 홍해를 어떻게 가르셨는지, 광야에서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먹이시고 인도하셨는지 친히 목도하였으면서도 그렇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결단코 그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보다, 나쁘게 말해서 무식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자는 무엇보다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목에 피가 나도록 부르짖고 또 외쳤던 것입니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입니다.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감사는 그 다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감사드린다는 것은 語不成說(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신 일에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17:17-1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5:1-8)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나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같이 사르니이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나이다

이 세상에서 당연한 것이란 없습니다. 그렇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니 감사가 없고 무자비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 부모님의 그 엄청난 사랑과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런 자식이 부모님께 효도하고 감사드리겠습니까? 오는 본문에서 열 명의 고침 받은 문둥병자 가운데 예수님께 찾아 나와 엎드려 감사를 드린 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탄식하셨습니다. “너희 열 사람이 고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왜 고침 받은 것을 그들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감사치 않느냐?”는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능으로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너고 그들을 죽이려고 쫓아오던 애굽의 모든 군사들을 돌과 같이 바다에 가라않게 하신 하나님을 결코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 드리고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랑과 부모님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가슴 찡하게 감격할 줄 아는 정적인 사람만이 소중한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자는 이와 같은 소중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정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의 가슴이 이처럼 정서적이지 못한 채 메말라버리면 결코 감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정서가 메마른 사람은 공감능력을 상실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가슴이 메마르지 않도록 인격자가 되어야 하고 정서가 풍성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과 교통하고 찬송과 기도로 정서가 깊은 심령이 되어야만 합니다. 감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부모님에 대한 깊은 사랑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군 다윗을 잘 압니다. 그는 용사 중의 용사였고 온 이스라엘이 두려움에 떠는 골리앗을 단숨에 제거할 정도로 용맹 있는 장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을 향한 가슴에는 여린 여인보다 더 진한 정서가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18: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는 고백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구약에서 가장 가슴 따뜻한 장수로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민생활에 시달리며 오늘 우리들은 불행하게도 너무나도 가슴이 메말라버렸습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일에도 삐지고, 화내며, 돌아서고, 포기하고, 절망하는 작고 초라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는 다윗과 같이 정서가 풍부하여 용서하고 사랑하며 미래를 함께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며 감사할 줄 아는 인격자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감사는 바로 그런 다음에야 가능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비장한 결단이 있을 때 비로소 감사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17:15-16)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4:15-16)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인격자는 의지적 능력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선한 일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사사로운 자신의 생명마저도 아깝다 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결단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인격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유일하게 결단하고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와 엎드려 사례한 문둥병자나 비록 여자지만 한 목숨조차도 내어 놓고 왕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며 죽으면 죽으리이다!”고 선언한 에스더는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고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은혜를 입고 축복을 받았는데 그렇게 은혜와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을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망설이며 미적거리고 감사를 잊어버리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신자가 되기 이전에 인격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비장한 결단력이 있다면 결단코 고귀한 사랑에 보답하는 감사를 소홀히 여길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비장한 결단력이 있는 인격자라야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단 한 번도 같은 자리에 앉아 본적조차도 없이 그저 먼 발취에서 누구인지 정도만 알고 지냈던 클래스메이트가 있었습니다. 10년도 훨씬 더 지난 어느 날 그러했던 그 사람이 전화를 해 왔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어느 덧 10년이란 세월이 지났기에 처음에는 누구인지 조차 몰라 멍하니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하도 심각하게 자신을 소개하며 아는 척 하기에 일단은 만나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자신이 하는 작은 삼겹살식당으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처음으로 마주 앉은 그는 어렵사리 부탁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친구의 보증을 서 주신 것이 잘못 되어 평생 일구어 가던 중소기업이 부도 직전에 있다며 돈을 좀 꾸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자신도 겨우 작은 삼겹살집을 운영하며 있는 힘을 다해 저축하며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데 그 친구의 사정이 하도 딱해 보여 두 말 않고 전 재산인 3천만 원을 꾸어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눈물을 글썽이며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빨리 갚겠다고 약속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바로 다음 달에 3십만 원을 입금시키고 그 다음 달에는 십만 원을 입금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 사업부터 먼저 살려내라고 부탁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3년 만에 그는 다시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빚을 몽땅 다 갚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코로나를 맞아 작은 삼겹살집이 망하기 직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늦은 오후에 찾아 온 친구와 소주를 기울이며 저녁을 먹고 문을 닫을 때까지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 단 한 사람의 손님도 오지 않는 것을 본 친구는 걱정을 많이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떠난 친구는 일주일 만에 다시 찾아 왔습니다. “, 너 식당이 어려운 것 같은데 나와 같이 동업하지 않을래?” 하는 것이었습니다. “네 덕분에 사업은 이제 정상으로 회복되었고 다시 온라인 판매업을 다시 랜칭하려고 하는데 같이 동업하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식당도 잘 안 되는데 그렇게 했으면 좋겠지만 투자 할 돈이 없잖아?” “, 넌 이미 3년 전에 3천만 원을 투자한 거야. 아무 걱정 말고 같이 한 번 해보자. 아주 전망이 좋아.” 그래서 다음 날 그 친구의 회사로 가서 새로운 사업에 동업하는 사인을 했습니다. 수입은 반반으로 나누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업은 대박이 나서 매출 30억을 올리는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 친구와 15억씩 나누어 가지게 된 것입니다. 어려울 때 서슴없이 도와주었던 친구의 호의에 감동을 받았던 그 친구는 이렇게 해서 은혜에 보답하고 감사를 행동으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이 결단력과 의지력이 있는 인격자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이처럼 의리가 있고 감사가 있고 결단이 있는데 오늘 우리는 어찌하여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린고비와 같이 인색하고 결단력 있는 충성과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지,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시고 감사드릴 것을 기다리시는데도 말입니다.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지금까지 우리들과 함께 하시고 베풀어 주신 만 가지 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제대로 된 인격자가 되어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생명이라도 바쳐드릴 수 있는 결단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성도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믿음에서 승리하며 그 믿음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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