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는 믿음입니다! (2021년 11월 14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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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4 November 2021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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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믿음입니다!
11. 14, 2021
本文:골로새서3: 1 2 - 1 7
說敎:崔仁根牧師
독일 역사에 마티 바덴이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유주의적 사상이 있다고 해서 극 보수파에 밀려나 젊은 시절에 고생을 많이 한 정치인입니다. 한 번은 그가 어느 지방에 여행을 갔다가 돈이 없어 값싼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깨어보니 구두가 없어졌습니다. 밤새 도적을 맞은 것이었습니다. 화가 잔뜩 나서 욕을 하면서 자신처럼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훔쳐가도록 내버려 두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때 친구 하나가 헌 신발을 빌려주면서 주일이니 교회에나 같이 가자고 하였습니다. 마티는 마지못해 같이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 중에서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기도드릴 때에도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젊은 정치가 마티 바덴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두 다리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신발이 있어도 신을 수가 없구나, 나는 신발만 잃어버렸으니 신발이야 또 사서 신으면 되지만 이렇게 남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으니......, 그 불구자의 감화가 마티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 이후 그는 언제나 감사의 생활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항상 감사 할 조건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으로 독일 국민의 존경을 받는 독일의 재무장관이 되어 국가를 위해 크게 일하는 정치가가 되었습니다. 두 다리도 없는 불구자는 어떻게 그렇게도 눈물로 기도하고 찬송할 수가 있었을까요?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고도 원망하고 불평하는 젊은 청년도 있는데 어떻게 불구가 된 몸으로 그는 그토록 감사를 드릴 수가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사람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속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집대성하여 믿음장을 만드신 히브리서에서 이와 같은 진리를 정확하게 기록하여 두셨습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육신적인 두 다리가 없지만 믿음이 있으면 그 보다 더 큰 바람이 있고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처럼 놀라운 능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 사도 바울은 오고 오는 후손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입니다.
(골3:15-17)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참으로 가슴에 잔잔하게 울러 퍼지는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묵상하며 씹으면 씹을수록 저절로 공감이 가고 어떻게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하겠는지, 절절하게 그 해답을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감사주일을 한 주 앞두고 우리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놀라운 감사로 엄청난 도전을 주는 믿음의 주인공들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한결 같이 최악의 조건에서도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었는지, 함께 도전을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가 우리의 것이 아님을 믿을 때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욥1:20-22)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진리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녀들과 재물이 모두 자신의 것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자식들이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보물인 줄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이렇게 소중한 자식들이라도 그것이 우리들의 소유가 아닌 것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시127:3-5)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자식은 우리들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요 상급입니다. 그래서 욥은 10남매를 순간에 다 잃어버리고서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가져가시는 분도 여호와시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믿음이 있어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진정한 믿음이 우리들의 삶에 기초가 되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전천후적인 참된 감사를 욥과 같이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욥은 자식만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대의 최고의 부자였던 그는 그 모든 재산을 한 순간에 다 잃어버리고서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 앞에 경배 드리고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으며 깊은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는 재물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고 다시 그 하나님께서 가지고 가셨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재물에 관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신8:17-18)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라
고 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들이 비록 땀을 흘리고 돈을 벌었을지라도 그 재물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 재물이 사라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재물은 더 이상 우리들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명백하게 증거해 주시고 계십니다. 오늘날 과연 교인들 중에서 이처럼 사랑하는 자녀들도, 그렇게도 귀하게 여기는 재물도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1년에 한 번 드리는 추수감사헌금 하나도 정성과 성의를 다해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나이만큼 추수감사주일을 보내고 있지만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을 맛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을 한 번 보십시오. 이렇게 10남매와 재산을 한 순간에 다 잃어버리고 몸조차 병들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지만 단 한 마디의 원망도 없이 감사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축복으로 보상해 주셨습니다.
(욥42:12-17)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이 축복은 처음에 주신 것에 Double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감사를 드리는 자들에게 이처럼 풍성하게 다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지만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것이라고 오해하고 스스로 재물을 소유하고자 하였을 때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나 여리고를 점령하러 갔을 때 아무도 모르게 금을 감추어 두었던 아간은 그 재물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온 가족들까지도 몰사 당하는 비참한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가룟 유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스승을 팔아서까지도 재물에 욕심을 내었던 가룟 유다는 그 돈을 도로 갖다 주고 스스로 목을 매고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과연 이런 자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에 대한 바른 가치관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믿을 때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단3:16-18)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우리들이 익히 잘 아는 대로 다니엘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든지 기도하기만 하면 사자 굴에 집어넣는다는 왕의 명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여전히 전헤 하나님께 기도드렸던 것처럼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말씀입니까? 그냥 하던 대로 기도하고 사자 굴에 들어가겠다는 결단이 아닙니까?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왕이 친히 명령을 내린 것이기에 그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도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가 사자의 밥이 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렇게 결단하고 기도하는 다니엘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다니엘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다니엘이 드린 감사는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린다고 하나님께서 죽이신다면 마땅히 죽겠다는 비장한 결단이요 각오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앞서 다니엘서 3장에서 나타나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믿음과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그들이 풀무불에 들어가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와 같이 되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건져내 주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우리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고 우리들이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고백하고 믿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된 감사제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 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삼상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는 말씀과 같이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줄 알고 믿을 때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아까울 것이 없고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믿음이요, 믿음이 없이는 감사를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통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을 때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고후12:7-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성경 속 인물들 중에서 사도 바울과 같이 감사를 많이 드린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신구약 전체에 감사라는 말이 대충 179번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47번을 사도 바울이 사용하였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인용해 드린 고린도후서 12장에서는 더욱 더 놀라운 감동을 받습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일을 하는데 혼자 사는 그에게 건강은 필수적인 것일 텐데 그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씩이나 완벽하게 기도를 드렸어도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말씀으로 응답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이면 원망이나 불평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사도 바울은 오히려 크게 기뻐하였다고 하였으니 감동이 아니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은 그토록 하나님과 공감하며 감사드리는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 크고도 넘치므로 가시를 주셔서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자신을 붙들어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그와 같은 아픔을 통하여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도 이제는 이처럼 하나님의 깊은 뜻까지도 헤아릴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하여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감사는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헌신한 어떤 한 사람이 자기 인생을 준비하고 계획해서 오랫동안 공부한 후 나이 사십이 다 되어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프리카 선교지에 도착하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심한 열병으로 그만 그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는 선교지에 도착하자마자 일도 시작하기 전이었고 선교사로의 사역 또한 시작하기 전이었는데 그렇게도 허무하게 그만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운명하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이 아프리카로 가는 복음의 다리 저 밑바닥에 깔린 작은 돌멩이 하나로 사용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을 신뢰하는 사람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을 인정합니다. 다른 사람은 비웃고 보잘 것 없는 자로 욕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것이 옳은 길이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약속위에 올바르게 서 있을 때 우리는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에 자신감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실패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대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달려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고통을 당할지라도 그 고통으로 인해 좌절하거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차원 높은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믿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