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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은 왜 필요하나요? (2021년 12월 5일 주일낮설교)

병원이 왜 필요합니까?

 

12. 5, 2021

:마가복음 2:  1  3   -    1  7

:崔仁根

 

미국의 어떤 목사님 한 분이 주일 오전 대예배를 인도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때 성전에 앉아서 그 설교를 열심히 듣고 있던 한 농부가 있었는데 그는 그 목사님의 그러한 설교 내용에 절대로 동의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예배가 끝나자마자 목사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자기 농장으로 모시고 가서 점심식사를 잘 대접한 뒤 그 목사님을 모시고 자기 농장을 산책하면서 아까 그 설교 내용을 반박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사님! 여기에 있는 이 아름답고 거대한 농장은 제가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시덤불과 싸우고 방울뱀과 싸우고 풍토병과 싸우면서 개척해 온 것입니다. 이 농장의 구석구석에 저의 피와 땀이 스며들지 않은 곳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이 농장만은 저의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왜 목사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농장도 바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얘기입니까? 저는 도저히 그 말씀에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잠시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님! 성도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 그러나 지금부터 100년 후에 그 질문을 다시 한 번만 더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100년 후에 다시 한 번만 더 질문해 주신다면 제가 그 질문에 잘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100년 후에는 그 농부도, 그 목사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100년 후의 그 농장이 누구의 것일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습니다. 미래는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그 반론적 질문을 듣고 난 그 농부는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에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사실은 우리의 몸뚱이조차도 우리들 개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뚱이가 우리들 자신의 것이라면 우리들 자신이 맘대로 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영원히 죽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우리 몸뚱이의 주인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잠시 빌려 쓰면서 살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단지 청지기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청지기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어리석은 우리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아시고 자신을 비난하는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원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은 왜 우리들에게 의원들이 있는 병원이 필요한지, 우리들에게 왜 예수님은 강림하셨는지 그 해답을 찾아보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총을 기대해보려고 합니다. 모쪼록 듣고 복을 받는 귀한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병들었기 때문에 병원이 필요합니다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5:31-3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오늘 우리들에게 병원이 필요한 것은 불행하게도 우리들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병들면 두 가지의 현상을 나타내게 됩니다. 하나는 얼른 병원으로 가서 전문의를 만나고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치료 받기를 포기하고 병원으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의 강요가 아닌 병든 본인의 선택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든지, 예수님을 배척하고 구원을 포기하든지 선택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치료만 하면 생존하고 다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치료를 포기한 채 스스로 소중한 생명을 단축하는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남의 일이지만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포기하고 지옥불을 선택하는 불신자들이 안타깝고 불쌍한 것입니다.

그 옛날 우리교회에서도 한국에서 명지대학교 교수를 하던 한 사람이 가족들과 함께 이민을 왔는데 그 힘든 바디 샆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펜대만 굴리던 교수가 자동차 바디를 고치려니 너무나도 힘이 들어 포기하고 다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정기 검진을 받기 위해 Overlake 병원에 입원을 하였는데 뜻밖에도 위암 판정이 나왔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40대에 불과한 건강한 남자였는데 위암이라는 판정에 자신과 모든 가족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식사를 하지 않고 치료도 거부한 채 그 어떤 사람과도 대화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벽을 향해 돌아누운 채 모든 것을 거부하며 죽음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암 판정을 받은 지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무리 좋은 병원이 우리 곁에 있다 해도 스스로 치료받기를 거부하면 그 병원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거룩한 성탄을 이루시고 우리들을 치료하시는 의사가 되어 주셨으나 영접하고 그 주님의 인도하심을 거절하게 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정확하게 기록하시고 증거해 주셨습니다.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원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와 같은 성탄의 목적을 예수님은 마태, 마가, 누가를 통해서 일제히 동일하게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중요하고 또한 그만큼 구원이 절실한 우리들에게 필요한 말씀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 무슨 병에 걸려 있는 것일까요? 이렇게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데 왜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고치시겠다고 오신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이 육신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육신을 지배하는 영혼의 건강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됩니다. 우리 모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영적으로 무서운 질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라는 병에 감염 되어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소중한 생명을 회복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옛날 명지대학교의 교수였던 그 남자와 같이 치료 받고 더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고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의외로 많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런 불행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 이유야 천태만상 다르겠지만 유일한 하나의 이유는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우리들이 이 땅에서 부여 받은 그 모든 것들보다 월등하게 더 고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가르치고 설명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중한 생명에 무관심하거나 방관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사람들에게 더 값진 보배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온갖 진리를 배척하는 가장 어리석은 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이와 같은 어리석은 자의 양태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일갈해 두었습니다.

(18:1)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고 말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무리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주러 오신 예수님을 떠나는 자들은 결국 교회를 떠나는 자들이요 거룩한 공동체를 등지는 행위이니 이와 같은 사람은 가장 소중한 생명조차도 포기하고 배척하는 미련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을 또한 지혜자는 밝혀 두었는데 오로지 자기 자신의 욕심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아무리 욕심을 내어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린다 해도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100년이 지나면 더 이상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채 한 줌의 흙이 되어 땅 속에 묻히고 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황소 500마리를 이끌고 북한으로 향하였던 정주영씨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현대라는 거대한 그룹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정작 정주영 본인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결국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 않습니까? 욕심이 무슨 의미가 있고 부귀영화는 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유한한 우리 인생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세상의 부귀영화조차 누려보지 못한 채 초라하게 죽어간다면 더 더욱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보다 천 배 만 배 더 불쌍한 사람은 바로 병든 영혼을 고쳐주실 예수님까지도 배척하며 자신만을 의지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살아가는 어리석은 병든 자들에게 친히 선포해 주셨습니다.

(1:10-13)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고 말입니다.

자신이 병들었다는 사실 조차도 모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16: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21: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서라도 돈을 챙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그렇게도 좋아하던 돈을 도로 갖다 주고 그 소중한 목숨을 스스로 끊고 죽음의 길을 택하였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7:1-5)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 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무슨 말씀입니까? 가룟 유다는 스스로 엄청나게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비록 예수님을 팔아도 예수님은 엄청난 능력이 많으니 어떻게든 죽지 않고 다시 살아오실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손아귀에 붙잡혀서 결국 죽음의 길로 가시게 되자 죄책감에 사로잡혀 죽음의 길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걸려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꾀에 빠져 스스로의 소중한 삶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의사가 말기 암입니다.”고 선포하여도,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아픈데도 없고 이렇게 튼튼한 몸을 가졌는데요. 쥐뿔도 모르면서 그런 형편없는 선고를 하시다니요.”하면서 병원을 박차고 나오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몸이지만 아는 것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이라도 우리들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사람은 말기 암인데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은 채 스스로의 소중한 건강을 방치하는 자들이요, 자신이 죄인인데도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늘의 하나님이시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주어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세상을 초라하게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1:9-11)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이 땅의 목사들은 이와 같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목에 피가 나오도록 외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목사의 말을 순종하고 따르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교인들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좋은 병원이 자신의 생명을 살려보려고 그 좋은 장비들과 의원들을 준비하고 기다려도 그들은 그곳으로 고침 받으러 가지 않으니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슬픈 현상이 바로 스스로의 착각에 빠져 이 세상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죽음과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어리석은 인생들인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바뀌어버린 이 세상에서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 없이는 더 이상의 소망이 없다고 가슴을 치는 신자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신 성탄절이 수백 번 수천 번 찾아온다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제발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빌립보의 권속들만이라도 이런 사람이 단 하나라도 없기를 축원 드립니다.

결국 복된 인생은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24:14-15)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11:26-28)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두 종류의 뚜렷한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신다고 비난하며 주님과 멀어지는 유대인들과 그러한 모욕을 들으면서도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죄인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2:13-16)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비난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떠난 자들이고 비록 유대인들의 비난을 받는 못난 죄인 된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택한 복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병들었고 의원을 필요로 함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기쁘게 지키는 성탄절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배경에는 이와 같은 놀라운 진리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살려내시기 위해 이 땅에 성탄하신 예수님을 영접은커녕 배척을 하여 십자가에서 죽였으니 그들에게는 영원한 저주만이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사실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이 땅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텅텅 비워지고 예수님께서 싫어하시는 세상 술집과 유흥점은 이처럼 위험한 코로나 시대에도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모든 것을 다 희생하며 따르고 섬기는 성도들이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마지막 세대에 결국은 선택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하든지 이 세상을 선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결단이 없는 한 이 땅에 성탄이 수천 번 수만 번이 온다 해도 사람들의 잔치만 있을 뿐 예수님은 없는 것입니다. 이 복된 계절에 비장한 결단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제대로 된 축복의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여러분은 노르웨이라는 나라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나라는 세계에서 사회 보장제도가 가장 잘된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조상들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그들의 조상은 바이킹입니다. 배를 타고 남의 나라에 가서 보화를 강탈하고 사람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삼고 사람을 죽이고,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해적떼들이었습니다. 바이킹의 총 우두머리가 왕입니다. 그 왕에게는 다른 나라에서 잡아 온 수많은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노예 중에 유독 어느 한 어린 여자노예가 있었는데, 그 어린 여자노예는 늘 얼굴이 밝고, 입으로 무엇인가 종알종알 하면서 다니는 모습을 왕이 발견하고 그 아이를 불러서 물어봅니다. "너는 부모님도 보고 싶지 않니? 너는 여기 노예로 있는 게 무섭지도 않니?"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부모님도 보고 싶고 집에도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기에 늘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쁨으로 기도하면서 살아가고 또한 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주님을 소개하면서 살아갑니다. 왕도 하나님을 섬기세요. 왕도 주님을 믿으세요."라고 전도하였습니다. 그 어려운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선택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그 어린 소녀에게 바이킹 왕이 전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전 바이킹에게 선포합니다. '앞으로 우리 민족은 남의 나라에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노예를 붙잡아 오는 것을 그만 한다.' 그러나 그 밑에 있는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 왕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그 나라는 남의 나라에서 약탈하고 죽이는 일을 그만 두고 말았습니다. 이 나라는 97%가 기독교인들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국기로 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에 국회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하여 카지노를 설치하기 위해 법안을 상정했는데 국민도덕에 피해를 준다고 부결시켰을 정도로 올바른 나라로 가고 있는 귀한 국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은, 하나님이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를 하나님이 절대로 끄집어 내리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내 인생에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자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를 원합니다."

이 결단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과 결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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