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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가는 사랑! (2021년 12월 19일 주일낮설교)

끝까지 가는 사랑!

 

성탄주일

12. 19, 2021

:요한복음 3:16

:崔仁根牧師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편견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를 가장 당황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식적이라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그리스도인들은 말()로는 사랑을 운운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랑의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나는 바람결에라도 그런 얘기를 들으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전도와 구제와 선교에 힘을 써도 그 행동에 진정한 사랑이 배어 있지 않으면 거기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더치 뉴기니아(Dutch New Guinea)에서 경험한 파인애플 이야기가 있습니다(책 제목:합당한 희생, 나침반 출판사 발행).

파인애플 이야기를 읽으신 분은 한 선교사가 파인애플 밭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다가 결국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실 것입니다. 선교사에게 적대적이었던 원주민들이 변하게 된 것은 선교사 개인의 헌신의 결과이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으로 보여준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각자의 삶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바르게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진리를 의심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34절에서 7절까지를 한 번 보십시오.

(고전13:4-8)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 사랑을 정의해 두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나누기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어떠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비록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를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또는 자식이 부모를 학생이 스승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은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 시어머니가 어떤 분이신지 몰라서 그래요.’라고 항의하고 싶은 며느리가 있습니까? ‘우리 부모님이 어떤 분이신데요?’라고 말하고 싶은 자녀가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들 자신보다도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더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랑하라!”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데 우리 상황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사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도 우리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실천하며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터득하는 은혜가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긍휼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15:20-24)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이 비유는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탕자와 아버지의 이야기로 빗대어 예수님께서 친히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들고 나가 창녀와 함께 다 탕진하고 돈이 떨어지자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다가 결국은 거지가 되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나 그 꼴을 보신 아버지의 눈에는 그런 아들이 얄밉게 보인 것이 아니라 불쌍하게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그 아들을 야단하시고 내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감싸 안으시고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15:22-24)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이 탕자와 같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 마귀와 짝하며 하나님을 떠났던 탕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원죄와 자범죄로 영원히 형벌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의 이와 같은 초라한 모습을 얄밉게 보지 않으시고 불쌍하게 여기시어 예수님을 보내시고 구원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성탄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탕자와 같이 받을 수 없는 사랑을 받았고, 누릴 수 없는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탄은 우리 모두에게 기적 같이 다시 살아난 축복의 계절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우화적인 이야기를 담아 놓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기 직전에 먼저 천사들을 창조하시고 그 천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천사인 의의 천사라는 이름을 가진 천사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창조하고 그 세상에서 가장 으뜸 되는 피조물로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의의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지 마십시오. 그 인간들은 온갖 불의로 이 세상을 더럽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 천사인 '거룩의 천사'라는 이름의 천사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거룩의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 인간들은 이 세상을 더러움으로 가득 채워 놓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번째 천사인 빛의 천사를 불러 또 다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빛의 천사는 하나님, 절대로 인간을 창조하셔서는 안 됩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을 어두움으로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번째 천사인 긍휼의 천사를 불러서 또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긍휼의 천사는 다른 천사와는 전혀 다르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 이 세상은 불의하고 더러워지고 어두움에 잠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 불의와 더러움과 어두움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저는 기어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람들이 되도록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과 긍휼로 돌보시며 아직도 우리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상대하고 싶지 않은 그 사람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향해서 다가오시고 기다리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처럼 타락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의 배경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효과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라고 말입니다. 죄 많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구원을 얻은 것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복을 누리고 잘 사는 것 또한 결코 우리들의 잘난 공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을 불쌍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이 없는 사람은 울리는 꽹과리처럼 세상을 속절없이 시끄럽게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메말라 제부모도 모르고 스승도 모르는 이 서글픈 세상에 또 다시 성탄절이 다가 왔습니다. 허황된 세상의 풍조에 떠밀려 육신만 기쁘게 하는 Holiday가 되지 않도록 메마른 가슴에 사랑비가 내리도록 변화를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소외된 이웃들과 병든 사람들, 고국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신분의 서러움을 안고 사는 안타까운 사람들에게 오른 손이 하는 것 왼손도 모르게 포근한 사랑의 손을 내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꿈에라도 보일세라 징그러워하고 싫어하던 사람들에게 깜짝 선물이라도 보내보는 사랑의 역사를 만들어 보는 것도 뜻 깊은 성탄절의 추억이 될 것입니다. 시베리아처럼 차갑던 가슴도 따뜻한 사랑 앞에서는 여름눈과 같이 녹아내리기 마련입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 말고 깊은 가슴으로 하는 참된 사랑으로 코로나에 지친 이웃들에게 성탄의 진정한 사랑을 보내보는 긍휼의 천사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낌없이 거저 주는 사랑입니다

(15:20-24)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 예수님의 사랑의 특징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거저 주는 희생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좋아하고 아끼는 것을 남에게 내어주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가장 귀하게 여기는 물건을 선뜻 내어주지를 못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내 소유에 대한 애착이 크기 때문이요 나보다 남을 더 긍휼히 여기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오직 단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도 아낌없이 우리들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그 날이 바로 우리들에게는 성탄절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도 애지중지 여기시는 귀하고도 귀한 아들을 우리들에게 내어주셨을까요? 이것을 사랑의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대답해 주었습니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

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이라도 아낌없이 내 놓으신 것은 바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가장 귀하게 소유하고 있는 그것을 선뜻 내어주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진짜로 사랑에 빠진다면 아마도 달라질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다 내어줄 수 있는 그런 놀라운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사랑의 깊이에 비례하여 주는 것 또한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탄절의 가장 큰 의미는 그 누가 뭐래도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고귀한 사랑을 소홀히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자식을 낳아 키워본 부모라면 자식이 그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 것을 잘 알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도 소중한 외아들 예수님도 오늘 우리들에게 내어주심으로 이 땅에 성탄절이 있게 하셨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들도 늘 그 사랑에 감동하며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0세기 정신적 거성중의 한 사람인 슈바이처 박사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공부하던 중에 행복한 자신은 불행한 자들을 위해 살고 무엇인가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30세 까지는 자신을 위해서 살고 그 후부터는 남을 위해 살겠노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30세에 이미 목사로, 신학자로, 대학교수로 또 음악가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렇다면 남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무슨 일로 인류에게 봉사할 것인가? 하고 고민하던 중 그는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그의 인생의 사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콩고 지방에서 흑인에게 의료봉사를 할 하나님의 일꾼을 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문득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사가 되어 그들을 섬겨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의학공부를 7년간이나 더 한 다음 부인과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거기에서 90세가 되도록 흑인들을 위해 의사로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슈바이처로 하여금 60평생을 흑인을 위하여 봉사하게 한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닮은 믿음이었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고 실천하는 사랑을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도 요한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고 말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 자신의 온 몸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시기까지 희생하신 예수님의 사랑, 자신의 소중한 일생을 오로지 검은 대륙의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불태운 슈바이처의 사랑......, 이 모두는 말로 하는 사랑이 아닌 행함으로 그 순수함과 진실함을 보여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성탄의 복된 계절에 바로 이처럼 행동하는 사랑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가는 사랑입니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 할 것이라

(26:47-50)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오늘 우리들도 거의가 다 사랑을 합니다. 사람의 삶에서 사랑을 제외하고 나면 본능으로 사는 짐승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스스로도 행복하고 상대방도 행복하게 해 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들의 사랑은 영원하지를 못합니다. 영원은커녕 조석으로 변하는 안타까운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사랑이 우리들 자신의 유익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사랑이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익이 없다고 판단되면 미련 없이 배신하고 떠나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한결 같이 사랑과 배신의 역사로 얼룩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머물고 있는 모든 인간의 역사와 문학과 예술의 테마나 주제는 모두가 다 이렇게 사랑과 배신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순수하여 영원토록 가는 사랑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희귀하고 고전적인 경우에만 볼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은 화려하던 옷이 세월의 흐름과 비례하여 퇴색되듯이 그렇게도 뜨겁던 사랑이 어느 한 순간에 차가운 얼음과 같이 변하고 맙니다. 실제로 사랑이 변하여 증오가 되고 그 증오가 결국은 범죄로 변하는 사건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도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 연인의 집에 찾아가 가족들을 흉기로 찌른 2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피해 여성은 이미 가해자로부터 위협을 느껴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10일 오후 230분쯤 송파구의 한 주택에서 자신이 사귀던 여성 B씨의 어머니와 남동생을 흉기로 찌른 혐의로 20대 남성 A(26)씨를 검거했다.

B씨 아버지의 112 신고로 출동한 경찰은 두 사람을 즉시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여성의 어머니(49)는 숨졌고 남동생(16)은 중태에 빠졌다. B씨는 사건 당시 현장에 없어 화를 피한 것으로 파악됐다.

A씨는 범행 후 흉기를 버리고 옆 빈집 장롱에 숨어 있다가 출동한 경찰에 의해 검거됐다.

경찰에 따르면 B씨는 최근 A씨를 성폭행 혐의로 경찰에 신고했으며, 경찰의 신변보호 대상자로 등록돼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제주에서는 김시남(46)이 사실혼 관계였던 여성과 관계가 틀어지자 여성의 중학생 아들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으며, 지난달에는 서울 중구 오피스텔에서 김병찬(35)이 전 연인을 스토킹하다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두 사건 모두 피해자와 가족들이 가해자의 지속적인 위협에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고 있던 중 발생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논란이 됐다.](20211210일 중앙일보 기사에서 발췌)

는 사건과 같이 말입니다. 이 사건은 매우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 사랑이 변하여 원수가 되는 케이스는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증오도 커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인 우리 인간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 그대로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결코 중간에 변하거나 배신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신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번 사랑한다고 약속하셨으면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돌아섰지만 예수님은 그 베드로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배신자라고 심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배신자인 그를 예수님은 친히 찾아가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성탄절은 바로 이와 같은 우리 예수님의 사랑을 확증시켜 주는 계절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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