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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진 자 (2022년 1월 9일 주일낮설교)

빚진 자

 

선교주일

1. 9, 2022

:로마서1:8-17

:崔仁根牧師

 

성경 속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신학적이고 헌신적이었던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빚진 자라고 선언하였습니다.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왜 자신이 그렇게 빚진 자인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가 이 세상에서 몇 안 되는 그 고귀한 사도가 된 것도, 그리고 사도로서 아름다운 사명을 더 열심히 감당한 것도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주시는 은혜였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은혜와 사랑을 받고 빚진 자가 되었으니 마땅히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빚을 갚는 길을 또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말입니다. 그는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서 자신의 하나 뿐인 생명일지라도 아끼지 아니하고 바치겠다고 결단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빚진 자의 삶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2022년도 선교주일을 맞아서 우리는 어떤 빚을 졌고 또한 그 빚은 어떻게 갚아야 하겠는지 함께 생각하면서 우리들에게 맡겨 주신 사명인 전도와 선교에 최선을 다하는 제대로 된 신자로 거듭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다 빚진 자들입니다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은 그 한 사람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지상의 사명을 감당해 가야 할 오늘 우리 모두의 모습을 상징하는 대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빚진 자라고 하면 오늘 우리들도 빚진 자인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스스로 태어나서 스스로 자라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자라났고 또한 그 부모님으로부터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배웠으며 또한 부모님의 희생과 도우심으로 고등고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뭐래도 오늘 우리는 부모님께 빚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미국 땅에 이민 와서 남의 도움을 한 번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공항에서 택시타고 들어와서 이민생활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아파트를 얻어주고 누군가가 운전면허를 따도록 도와주었으며 누군가가 Job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주일 성수를 하고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하는 신자가 되기까지 우리는 또한 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미루어 볼 때 오늘 우리들은 영육간에 누군가의 도우심으로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우리 모두는 빚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과 같이. 이와 같은 깊은 진리를 깨닫고 우리들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너무 잘난 척도 하지 말고 너무 인색하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결국은 스스로 잘 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된 인생과 제대로 된 신앙생활은 이와 같이 빚진 자라는 전제하에서만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A. A. 하츠는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완전히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그는 말씀을 읽고 기도하다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감동을 받은 하츠는 그날 저녁에 자기의 재산을 모두 정리하면서 상당한 액수를 교회에 헌금하였습니다. 친구와 친척은 물론 아내까지도 그의 행동에 무척 놀랐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빚을 많이 진 상태에서의 그의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 때 하츠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업을 하면서 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사업이 조금만 더 잘되면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으로만 헌신하려고 했던 거지요. 그런데 오늘 새벽 우연히 말라기 말씀을 읽는데, 그 말씀 가운데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지만 정작 내가 빚을 지고 있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분의 빚부터 갚기로 결심하여 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 후 하츠는 사업을 재기하여 성공하였고 신화적인 백만장자까지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재산으로 복음 사역을 위해 힘쓰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만났던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다음과 같았습니다.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우리는 복음과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10:5-10)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머나먼 인생여정을 살아가노라면 숱하게도 많은 빚을 지게 됩니다. 그 모든 빚들을 요약하면 단 두 가지가 됩니다. 복음과 사랑의 빚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호하게 명령하십니다.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연약한 우리들은 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빚을 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업을 하거나 집을 사거나 자동차를 살 때부터 우리는 다 빚쟁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빚을 지되 더 얹어서 그 빚을 갚으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자니 이성적인 사람이 아닌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전 세계의 돈을 다 거머쥐고 부를 자랑하는 것은 바로 그들은 이와 같은 원리를 가지고 돈을 벌어들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한 사람이 사업 자금이 없어 사업을 시작하지 못하면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돈을 모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충분히 지원을 해 줍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도움으로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게 되면 어렵지 않게 그 사람들의 돈을 넉넉하게 갚아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업에 실패하는 법이 없고 그래서 전 세계의 돈을 다 긁어모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떻습니다. 누군가가 장사를 잘 하고 매상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 바로 그 앞에다 똑 같은 사업을 차려서 세일을 떼리고 상대 가게가 망할 때 까지 훼방을 놓습니다. 그러니 함께 자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절대 정확한 매상을 말 해주지 않습니다. “그럭저럭 밥 먹고 살아요.”라고 하면서 어물쩍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언제나 나 스스로 잘 나서 돈도 잘 벌고 신앙생활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도와주었고 기도해 주었고 옆에서 힘이 되어 주었기에 하나님의 축복으로 잘 된 줄 알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복음과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바로 이와 같은 원리로 시작이 되고 추진이 되는 것입니다. 열악한 전 세계로 복음을 짊어지고 나가는 선교사들은 우리들과 같이 살기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자식들 공부시키며 돈 벌어서 잘 살고 싶지 않아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거저 받은 복음을 갚아드리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나 우리들의 빚에 대한 롤 모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프레드 크래독 목사는 그의 아내와 함께 며칠 간 휴가를 얻어 산이 있는 조용한 곳에서 며칠을 보냈던 이야기를 남겨두었습니다. 하루는 그들 부부가 한 작은 레스토랑에 앉아있는데 마침 한 사람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인사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크래독 부부가 앉은 테이블까지 오게 되었고, 프레드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겠다고 하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사람은 그 동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 너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어머니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에게 하는 비난을 자신도 들으며 자라야 했습니다. 그의 학교친구들은 그들의 부모들이 이들 모자에 대해 비난하는 것을 듣고는 따라 하기 시작했고 그는 결국 학교에서도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점심때도 혼자였고 소풍을 갔을 때도 늘 혼자였으며 등하고 길 또한 혼자서 걷곤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견디기에 너무 지쳐있었습니다.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의 어머니와 함께 마을에 내려가 장을 볼 때에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저 아이의 아버지가 도대체 누구지?"하며 조롱하는 말이었습니다. 그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그 마을에 새로운 목사님이 오시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목사님의 설교가 뛰어나다고 말을 하기 시작했고, 이 소년도 그의 설교를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실제로 그 목사님의 설교에 감동했고 흠뻑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예배당에 들어갈 때에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조금 늦게 들어갔다가 말씀만 듣고 슬그머니 빠져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에 그가 예배를 마치고 이전과 달리 조금 늦게 예배당을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넌 누구니? 네 아버님은 어느 분이시지?" 돌아보니 목사님이 서 계셨습니다. 소년은 멈칫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목사님은 계속 말씀하시기를 "잠깐만, 네 얼굴을 보니 너를 닮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겠구나. 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지?" 이 소년은 나중에 테네시주의 주지사로 두 번이나 당선된 벤 후퍼였습니다. 그는 크래독 목사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목사님이 하신 그 한마디가 저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벤 후퍼에게 했던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겠습니까? 따뜻한 우리들의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하겠습니다. 천사 같은 말로 전도를 한다 해도 우리 속에 이와 같은 진정한 사랑이 없다면 그 전도에 열매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복음과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그 빚을 갚는 심정으로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사랑이라고 해서 엄청난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하고 눈길 하나라도 지극하면 지친 영혼이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빚진 우리는 이웃들에게 무엇인가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주면서 복음을 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빚을 갚아야 합니다

(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어떤 사람이 병이 위독해지자 침대 머리에서 돈을 빌려간 사람들의 금액을 아들에게 불러주다 지쳐 목소리가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님 만일을 위해서 이쪽에서 돈을 빌려 쓴 사람들의 이름도 알아두었으면 하는데요." 그러자 아버지는 힘없는 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그 사람들은 틀림없이 제 발로 찾아와서 돈을 갚을 사람들이야.” 오늘 우리들도 이웃들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 빚이 있습니다. 그런데 "빚진 죄인" 보다 "빚진 상전"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래서 하늘의 하나님께서도 친히 명령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가진 것 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들의 생명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들도, 그 소중한 모든 재물도,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는 믿음도 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놀라운 사랑과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빚을 갚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되고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빚은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갚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정도 사랑도 신용도 사람됨도 다 잃어버리고 최악의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는 이와 같이 빚을 갚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심지어는 돈 갚으라는 채권자를 아무도 몰래 죽이는 살인마도 있습니다. 어려울 때 그 귀한 돈을 빌려주는 정도이면 얼마나 좋은 사람이고 얼마나 좋은 관계였겠습니까? 하지만 그 빚을 갚지 않기 위해 이렇게 악한 죄를 더하니 그 사람이 어찌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어떻게 어떠한 방법으로 빚을 갚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숨까지도 내 놓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는 인생을 그릇 살아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당대의 최고의 베네핏(benefit)으로 오히려 없는 사람, 못 가진 사람들을 살인하고 그 소중한 복음조차도 마음대로 따를 수 없도록 잔인하게 방해한 사람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신실한 스데반이 그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된 사건은 사도행전의 클라이맥스였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기적 같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 때문에 180도 달라진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는 비로소 자신이 빚진 자임을 깨닫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이렇듯 소중한 생명도 내 놓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선하게 살고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들은 다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짧은 인생여정에서 늘 빚 갚는 자세로 바르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살다가 엄청난 축복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남들 다 가는 대학에도 가지 못하고 겨우겨우 살아가나가던 두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였습니다. 단칸방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 의논하다가 두 사람은 리어카를 하나 사서 간이 떡볶이 가게를 열었습니다. 초등학교 옆 아프트 단지 놀이터 근처였습니다. 다행히도 아이들이 많아 그런 대로 장사는 잘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저씨 한 분이 가게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온전하지 못한 사람 같았습니다. “떡볶이를 사먹으려면 돈 있어야 하는데 돈 있어요?”하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나 돈 없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떡볶이를 무척 먹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접시에 떡볶이를 접시에 담아 그 아저씨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아주 맛있게 먹고 씩 웃으며 감사를 대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초등학교가 끝나자 아이들이 몰려 왔고 그 동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그 아저씨랑 너무나도 익숙한 듯 어울려 잘 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저씨는 매일 같이 나타났고 매일 같이 떡볶이를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 하나가 그렇게 놀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는 사고를 당했는데 다짜고짜 그 엄마가 나와서는 그 아저씨의 따귀를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으며 너는 어디에 살고 있어? 핸드폰 이래 내놔 봐. 네 어머니께 전화해서 치료비를 가지고 오라고 해.”하면서 난리난리를 피웠습니다. 그때 아주머니에게 나아가서 그 아저씨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여기에서 봤는데 아이가 친구들과 놀다가 넘어져서 다쳤어요.”하고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도리어 그 엄마는 당신은 그 더러운 떡볶이나 팔아. 그리고 여기에서 장사하는 것 불법인거나 알고 있어?”하면서 싸움을 걸어와 아무소리도 못하고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구청에서 직원들이 나와서 더 이상 여기에서 장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졸지에 삶의 보금자리를 잃어버리게 된 그들은 망연자실하였습니다. 열심히 고생해서 학교 앞 건물에서 떡볶이 장사를 제대로 해 보고 싶었던 것이 꿈이었는데......, 이곳저곳 장사 할 곳을 알아보고 다니던 중 하루는 건널목을 건너고 있는데 갑자기 그 아저씨가 달려와서 자신을 밀쳐 나가떨어지고 넘어졌는데 그 자리에서 자동차에 부딪힌 그 아저씨는 자신이 보는 눈앞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생각에 잠겨 미쳐 달려오는 차를 보지 못했는데 그 아저씨가 그것을 발견하고 자신을 밀쳐냈던 것입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빠진 채 장례식장에 가서 그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아버지는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사실 그 아들이 나의 사업을 이어 받아 대표 이사가 되었는데 어느 날 가족들이 주말에 여행을 갔다가 교통사고가 나 며느리와 손자들은 그 자리에서 다 죽고 아들은 크게 뇌를 다쳐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늘 떡뽁이 주인의 이야기를 하며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그 사랑을 잊지 않고 위험에서 구해주었나 봅니다. 좋은 일 하고 가족들에게 갔으니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그동안 공짜로 떡볶이를 얻어먹었으니 이제는 자기가 공짜로 가게를 하나 드릴테니 제대로 떡볶이 장사를 해 보라며 평소에 그들이 그렇게도 소원했던 초등학교 옆 건물에서 떡볶이 장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건물주가 바로 그 아저씨의 아버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장사로 잘 되고 삶이 바뀌어져 그들은 다시 초등학교에 찾아가서 생활이 어려운 아이들의 명단을 받아와 매일 떡볶이를 공짜로 먹이는 선한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랑의 빚을 갚는 아름다운 모습을 연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삶이 행복한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늘의 하나님께 말할 수 없는 빚을 졌으니 사도 바울과 같이 빚 갚는 정신으로 새해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 유일한 길이 바로 이웃들에게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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