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할 때 조심하라! (2022년 1월 30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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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30 January 2022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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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 때 조심하라!
1. 30, 2022
本文:마태복음6:5-8
說敎:崔仁根牧師
심리학자 엘 로이드 박사는 인간에게는 여섯 가지의 감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첫째는, 사람이 자신의 아름다운 면만을 보는 자아도취의 감옥을 짓는 것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의 가장 나쁜 점만을 보는 감옥을 지으며 셋째로, 오늘과 내일을 절망적으로 내다보는 염려의 감옥을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로는, 옛 것은 모두 황금시대와 같고 오늘은 보잘 것 없는 찌꺼기와 같이 생각하는 향수의 감옥을 짓는 것이며 다섯째는, 다른 사람의 소유는 다 귀중해 보이고 자기의 소유는 가치 없는 선망의 감옥을 짓고 여섯째로는,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는 증오의 감옥을 스스로 지어 그 속에 갇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엘 로이드는 이 여섯 가지 인생의 감옥 자물쇠는 자만심이라고 진단하면서 그 자물쇠를 여는 방법은 오직 능력의 하나님께 기도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한데 그렇게 목적을 달성하는 응답을 얻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바로 이것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설명해 주셨는데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마6:5-7)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 하느니라
마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하신 설교 말씀으로 신자들이 생활 속에서 꼭 지켜야 할 도리를 증거해 주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초반부에서는 기도에 관해 집중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비록 4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말씀이지만 그 내용은 우리들이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귀한 진리입니다. 기도하면서 저지르기 쉬운 잘못을 집중적으로 정리해 두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고 하늘의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자칫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어리석은 우에 빠지게 되고 심지어는 책망과 버림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와 같은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않도록 요약하시고 분명하게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상세하게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외식하지 말라!
(마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눅18:10-15)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주의해야 할 첫 번째로 “외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외식은 기도라는 거룩한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히 조심해야 할 요소입니다. 그렇게 사람 중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기 의에 빠지게 되고 그와 같은 행위는 자기상을 땅에서 이미 받은 것이 되어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버림받은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렇게도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그런 행위는 하나님을 우롱하는 위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외식”이라는 말로 쓰여진 이 말은 우리들이 흔히 쓰는 영어에서는 "Hypocrite"인데 이를 번역하면 “사이비, 위선자”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은 오직 거룩하시고 완전하신데 그 하나님 앞에서 소위 기도를 드리는 자가 이처럼 위선과 사이비적 가치관을 들고 나왔으니 그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들의 삶 속에서 이와 같은 위선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완전한 척, 거룩한 척, 충성스러운 척, 헌신하는 척 하면서 결국에는 자신의 유익과 위로를 추구하는 악한 습성이 우리 속에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전혀 눈치조차도 채지 못하지만 하늘의 하나님은 당장에 이와 같은 것을 다 아시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바리새인의 기도를 말씀하신 것이 그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고백한 다음 곁에서 기도하는 당시 모든 사람들이 악마와 같이 싫어하던 세리의 기도를 상종하지 못할 사람으로 비판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제 보셨는지 예수님께서 친히 아와 같은 상황을 다 보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눅18:10-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바리새인이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는 모습과 예수님께서 그를 보신 모습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리새인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옆에서 기도하는 저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드립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바리새인을 예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놀랍도록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마12:31-37)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이 말씀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중에 그 누구도 바리새인과 같이 말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들 스스로 제아무리 완벽하고 잘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어리석고 작은 죄인들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남을 판단하고 욕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외식이요,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속에 있는 악한 것을 스스로 내뱉는 못나고도 어리석은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외식하는 바래세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생각 없이 내 뱉는 말 한 마디가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들에게 독이 되어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오늘 우리들은 이와 같은 외식을 조심하고 진실과 겸손한 자세를 지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기도할 때 은밀하게 하라!
(마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왕하4:32-35)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우리들이 기도할 때 지극히 조심해야 할 것은 기도한다고 떠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능력의 종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위해 심방하고 조용히 혼자 들어가서 기도하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라도 엘리사는 온 동네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기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왜 죽은 아이 엄마조차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닫고 기도하였을까요? 하나님은 은밀하게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또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밀함”에 대한 도전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나 또는 반대로 남들보다 더 나은 복을 받았을 때 조용하고 은밀하게 유지하는 덕을 가지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한 심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고 떠벌리며 욕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사람이 함께 하는 곳에는 언제나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모르드개를 한 번 보십시오. 남의 민족이요, 약속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가 당했던 억울하고 원통했던 일들은 결국 자신과 온 민족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하거나 원통하다고 가슴을 치며 사람들의 동정을 유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생과 함께 금식하며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악한 하만을 원망하고 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기적 같은 회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말씀과 같이 “은밀히 보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보상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무엘상 1장에 등장하는 한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브닌나가 그렇게도 원통하게 만들고 못살게 굴어도 한나는 그를 욕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원수를 갚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원인 제공을 한 남편에게도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하나님께 나아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선하신 하나님께서 예외 없이 한나에게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사무엘을 주심으로 만사형통의 축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이와 같은 은밀의 덕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왜 꼭 사람들로부터 모든 것을 다 얻으려고 하고 사람을 의식하며 그렇게 초라하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조금은 대범하고 조금은 담대하게 기도하는 성도답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기대하며 묵묵히 참고 기다리는 멋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최소한 기도하는 성도들이라면 말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은밀한 기도의 응답을 가장 많이 체험한 한 독일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 번 뿐인 인생을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고민하다가 하나의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 잃은 불쌍한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주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엄청난 자금과 사람의 손이 필요한 실로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 6절의 말씀에서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은밀하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말씀을 확신하고 그렇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기도의 능력의 이야기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아원을 설립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방법을 은밀한 기도로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전에 그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정을 먼저 하였습니다. “어떤 자금도 사람들에게 직접 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 헌금을 받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기도이다. 어떤 일군도 구체적인 필요에 관한 정보를 외부에 말할 수 없다. 헌금한 사람의 명단도 역시 비밀에 붙인다. 그들에게는 개인적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이 기관을 선정하기 위해 어떤 유명한 사람의 이름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가망이 없는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빚은 조금도 지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거래는 반드시 현금으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매일 기도하기 위해 한 시간씩 따로 시간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스위스의 시계처럼 그는 정확하게 정해진 시간에 자기 방으로 들어가 기도에 올인 하였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자기 일과 고아들의 필요를 위해 자기의 소원과 소망과 꿈을 하나님께 쏟아 놓으며 자신의 주님과의 만남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주일에 한번 그의 모든 동역자들과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일들을 말하지 아니하고 비밀에 붙인 채 오로지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그 소식은 퍼져 나갔고 귀한 사람들의 주머니들이 열심히 열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전세 집 하나와 일군 두 명 그리고 43명의 어린이가 모여 비로소 고아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다섯 개의 새로운 건물과 110명의 일군들과 2,050명의 고아들로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전에 모두 121,000명의 고아들에게 침식이 제공되었으며 교육이 제공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의 고아의 아버지라 칭함을 받고 있는 죠지 뮬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렇듯 약속하신 그대로 은밀하게 구하는 자에게 은밀하게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6:7-8)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 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 아시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들이 기도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을 하나 더 첨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래 중언부언이라는 헬라의 원문은 “말더듬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중언부언이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의미도 없는 뜻으로 지속적으로 말을 계속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진실하게 기도를 드리는 성도들이 대부분이지만 혹 어떤 이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오래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외식적으로 기도하는 교인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오랜 시간 목회를 하면서 이런 유의 교인들을 종종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언부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고 강력하게 금지하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도 이와 같은 케이스가 여럿 있었습니다.
(왕상18: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행19:26-29)
이 바울이 에베소 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허망한 사신우상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하나님은 “중언부언”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주석가이신 이상근박사는 중들이 “나미아미타불”이라고 외치는 것이 바로 중언부언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스스로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의미 없는 소리를 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구하는지도 모르고 허황된 소리만 내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5절에서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외식하는 자들의 대부분이 바로 이와 같은 중언부언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더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중언부언하는 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사실 하나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우리들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다시 말해 고주알미주알 아뢰지 않아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마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우리 귀한 성도들은 우리들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정확하게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의 머리털까지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소리 높여 부르짖지 않아도 우리들의 마음속의 소원을 다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똑 같은 죄인들이면서 의인인 냥 이웃을 비판하거나 판단하는 외식적인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 스스로 의로운 척 하며 자랑하고 잘난 척 하며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가장 잘 믿는 척 기도 많이 하는 척 스스로 차별화 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세는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편이 나을 만큼 하나님을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지적해 주신 “너희가 기도할 때에 조심해야 할 것” 세 가지를 가슴으로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마다 조심하고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기도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