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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극복한 기도 (2022년 2월 20일 주일낮설교)

고통을 극복한 기도

 

2. 20, 2022

:사무엘상1:9-18

:崔仁根

 

진주가 어떻게 생기는지 옥시 아십니까? 어쩌다 조개 속으로 모래알이 하나 들어오게 되면 연한 조갯살은 그 모래로 인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조개는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온 몸의 진액을 짜내 날카로운 모래를 감싸며 고통을 참아냅니다. 이렇게 하면서 한 해 두 해 세월을 보내게 되다보니 그렇게도 영롱하고 아름다운 진주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저마다 크기와 모양은 다르지만 고통이라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우리들도 조개와 같이 진주를 만들어 내지는 못할지라도 고통을 통해 작은 축복이라도 만들어 내는 인격과 신앙이 있는 진실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이야기로 시작이 됩니다. 그렇게도 소원하던 아이 하나를 갖지 못해 아이를 가진 첩 브닌나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는 슬픈 한나의 이야기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녀가 당하는 고통을 수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이 어떻게 감히 공감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마는 엄청나게 견디기 어렵고 힘든 것이라는 사실만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녀의 고통은 이 땅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 되지 못할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극진히 사랑하는 남편도 위로가 되지 아니하였고 잠도 잘 수 없었으며 음식조차도 먹을 수 없었던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입니다.

(삼상1:7-8)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고통은 고통의 원인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남이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한나는 어떻게 그 무서운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으며 그가 그 고통 대신 받은 축복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와 축복을 사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나는 고통의 요인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삼상1: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이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나의 고통이 그 대적 브닌나에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시키므로 한나가 울고 먹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한나가 당하는 고통의 요인이 어디에 있는지 함께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니 누구 때문에 한나는 이렇게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최악의 고통의 늪에 빠져 있게 되었을까요? 남편 엘가나가 브닌나와 같은 첩을 두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브닌나가 한나를 못살게 굴기 때문일까요? 만약에 이 두 요인으로 한나가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당하였다면 한나가 그들을 향해 원수를 갚든지 원한을 풀든지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나는 단 한 마디도 그들을 향해 원망하거나 욕을 하거나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그 고통을 안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현명한 한나가 스스로 고통의 요인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의 요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드린 기도의 내용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삼상1:10-11)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한나는 자기 자신이 아들 하나를 갖지 못한 고로 이처럼 비통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한나가 이처럼 자신의 고통의 요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았으므로 브닌나를 탓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브닌나를 첩으로 데리고 온 남편도 탓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한데 있었으므로 한나는 그 누구도 탓하지 아니하고 초라한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 놓고 아들 하나만 달라고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고통의 요인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모르긴 해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나처럼 자기 자신에게서 문제의 요인을 찾지 아니하고 곁에 있는 타인에게서 그 요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미움이 생겨나고 원수를 맺으며 분노를 이기지 못한 채 끔찍한 사건을 만들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와 고통은 더욱 심각하게만 되고 해결책은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거센 풍랑을 만난 요나의 배가 어떻게 그 무서운 풍랑에서 해방 될 수 있었는지 이미 공부하였습니다. 요나가 그 무서운 풍랑의 요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고백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 우리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바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요인은 타인이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한나는 기도로써 고통을 극복하였습니다

(삼상1:10-11)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가 당하는 고통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할 정도이면 거의 삶의 극한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한나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미워하거나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자신의 고통을 안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통곡하고 서원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기도하고 통곡하였다는 말씀에는 거의 공감이 갑니다. 우리들도 너무 견디기 힘든 고통 가운데 빠졌을 때 대부분 이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한나가 서원하였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 앞에 서원기도를 드리는 것은 만약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해 주시면 그 응답에 화답하여 나도 이렇게 저렇게 보답하겠다.”는 약속을 드리는 기도가 바로 서원기도입니다. 성경에서도 여러 가지 서원기도가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입다라는 선지자가 드린 기도입니다.

(11:29-35)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들에게로 나아갈 때에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하여금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이 사건은 사사시대의 대표적인 서원기도의 하나입니다. 그는 암몬 자손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어 이렇게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를 맞으러 나온 것은 그가 기르던 애완동물이 아니라 자신의 무남독녀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딸을 바쳐드림으로 서원을 지켰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 보다 더 슬픈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을 어떻게 번제로 바쳐드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남독녀 딸을 바쳐드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서원기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한나의 서원기도를 보게 됩니다. 한나는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을 주신다면 그 아들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고 또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쳐드리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이 기도를 어떻게 하셨을까요?

(삼상1:19-20)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이렇게도 정확하게 한나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사무엘을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의 능력이요 권세요 확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고통의 파도를 보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요인을 타인에게 돌리고 원수를 만들지도 말아야 합니다. 한나처럼 조용히 고통의 문제가 나에게 있음을 깨닫고 엎드려 눈물로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들의 하나님은 반드시 그 기도를 응답하시고 영광을 받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한나와 같이 말입니다. 할렐루야!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삼상1:12-18)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 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삼상1:25-27)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두 여인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은 한나를 눈물 나게 하는 브닌나이고 다른 한 사람은 고통의 주인공인 한나입너다. 이 두 여자를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브닌나는 자기가 아들을 낳았고 한나가 아들을 낳지 못함을 인해 한나를 못살게 군 장본인이었습니다. 그 앞에 선 한나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한 채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울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대항도 원수 갚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자신의 마음을 아실 줄 믿고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도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한나의 고상한 인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엄청난 실수를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조용히 기도의 품에 품어 안은 것입니다. 참으로 부끄럽게도 엘리 제사장은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한나에게 치명적인 말실수를 하였습니다. 그것도 고통으로 한이 맺힌 한나에게 말입니다.

(삼상1:13-14)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하였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나와 같이 대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조근조근 그런 것이 아니라고, 자신이 너무나도 힘이 들고 아파서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은 것이라고 설명을 드리고 그와 같이 형편없는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고상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름다운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실 만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는 이렇게 고상해야 합니다. 브닌나처럼 천박하면 안 됩니다. 말을 한 마디 해도 은혜가 되고 덕이 되고 감동이 되는 그런 품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한나는 드디어 꿈에라도 소원하던 아들을 낳았습니다. 브닌나 앞에서 보란 듯 서야하지 않겠습니까? 수 없이 많이 받았던 설움과 고통과 한을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한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렇게도 소중했던 그 아들을 하나님 앞에서 약속했던 그대로 영원히 갖다 바쳤습니다. 실로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차라리 금덩어리 전 재산을 바치기는 쉬워도, 아니 자기 자신을 갖다 바치는 한이 있어도 그 아들 사무엘만큼은 바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엄마가 천신만고 끝에 얻은 그 아들 사무엘을 갖다 바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얻은 아들인데, 그 아들 하나 없어 받은 고통이 그 얼마인데, 한나는 어떻게 그 아들을 갖다 바칠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선 한나의 믿음은 이렇게도 위대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나는 이 세상 그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다 극복하고 이렇게도 당당하게 아들 사무엘을 갖다 바쳤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도 한나와 같이 신실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은 한나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덤으로 다시 주셨던 것입니다.

(삼상2:21)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도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이처럼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비밀은 오직 하나,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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