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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함께 가자! (2022년 3월 6일 주일낮설교)

일어나라 함께 가자!

 

3. 6, 2022

:마태복음26:36-46

:崔仁根牧師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반드시 삶의 전환기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이 전환기는 대개 고난과 시련을 수반합니다. 이때 고난과 시련을 잘 극복하면 새로운 삶을 출발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면 그대로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삶의 전환기를 맞아 영원히 망할 수밖에 없었던 삶을 새로운 인생으로 변화를 만든 한 위대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절벽산책>의 저자 돈 슈나이더입니다. 그는 미국의 한 지방 대학 교수였는데, 1992년 느닷없이 재임용에서 탈락하면서 실직하게 되었습니다. 교수직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2년간 무려 101개의 대학에 지원서를 냈으나 모두 다 퇴짜를 맞았습니다. 결국 그는 빈민에게 제공되는 Food Stamp에 의존하고 살아야만 하였습니다. 아내의 뱃속에서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 아기를 몇 천 달러에 입양시킬 궁리까지 해야 하는 극한 처지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하던 것들이 가족의 행복과 맞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골프장의 잡역부로, 건축 현장의 보조 일꾼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솜씨 좋고 성실한 목수 겸 페인트공 돈 슈나이더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그린 <절벽산책>이라는 책을 써내 베스트셀러 작가까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삶에 지친 우리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에 힘을 주셔서 일으켜 세우시는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열등의식과 좌절감과 패배감의 상처를 씻기시고 치료하셔서, 우리가 이 모든 어려움을 능히 헤치고 나가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따뜻한 사랑과 미소로 손을 내밀어주시며 동행해 주십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앞에 두고 함께 기도하자고 데리고 가셨던 제자들이, 그것도 열두 명 가운데서 특별히 구별하여 선택하셨던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함께 기도하기는커녕 졸며 잠들어 있는 초라한 상황을 바라보시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일어나라 함께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을 경험한 이 세상 그 누구도 예수님처럼 이렇게 부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실망과 배신감만 주었던 무익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의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이 말씀의 의미는 진정 무엇일까요? 복된 3월의 첫 번째 주일에 이 소중한 진리를 함께 풀어보면서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치고 넘어진 우리들을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26:40-41)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지금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군대가 침공해 들어와서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이미 집계된 민간인 피해만도 수천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 나라의 대통령인 젤렌스키는 원래 코메디안이었습니다. 전쟁이 나자 한국과 여러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코메디안이니 나라를 잘 못 다스려서 전쟁이 일어난 것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자 말자 젤렌스키에게 탈출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그 나라를 탈출하라.”고 권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목숨이 다하도록 악한 러시아와 마주 싸울 것이라고 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는 대통령이다. 나에게는 죽을 권리조차도 없다.”고 하며 항전하여 지금까지 푸틴과 러시아 군인들을 시껍하게 만들면서 대단한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전 국민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대통령의 이와 같은 열정과 애국심을 보고 감동을 받아 함께 일어나 항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만약 젤렌스키 대통령이 자신만 살겠다고 서방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였다면 그 나라는 이미 러시아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들여다보면 이와 정 반대의 모습이 클로우즈업 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언제나 능력과 권세가 한이 없으신 예수님께 꿈과 기대를 안고 최선을 다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식민의 초라한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나라를 이룩하게 될 줄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세베대의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좌우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까지 하였겠습니까?

(10:35-37)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 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께서 절망적인 모습과 엄청 난 슬픈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26:37-38)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평소에 상상도 하지 못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도는커녕 절망과 불안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그토록 기대하고 바라보았던 그 예수님께서 이렇게도 힘도 없고 권세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자와 같이 낙심하며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잘 살고 강하고 믿음에 굳게 서 있는 것 같아도 함께 하던 지도자가 쓰러지고, 가장이 무너지고, 주변이 흐트러지면 순식간에 베드로와 같이 절망의 늪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궁이에서 그렇게 맹렬하게 불이 붙어 잘 타던 장작더미도 하나만 바깥으로 꺼내 놓으면 시커먼 연기만 날리며 불이 꺼져가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찾아와 손을 내미시며 부르시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소중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힘든 인생 여정에서 아무리 출세하고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혼자 가려는 오만과 교만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쟁을 일으키고 잔인하게 변해가는 푸틴을 보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전쟁을 통해서 얻는 것이 많고 자기 개인이나 러시아에 엄청난 유익을 만들어 낸다고 할지라도 지금 전 세계에서 그를 향해 일어나는 비난과 분노를 보면 그는 진정 소중한 것을 다 잃고 껍데기만 가지는 천하에 초라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전 세계에서 그를 보이콧하고 있기 때문에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는 페럴올림픽에서도 러시아선수는 받아주지 않고 있고 심지어는 고양이 경연대회에서조차 러시아 출신은 거절하고 있을 정도니 그는 지구촌의 외톨이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1994년에 창업하여 대한민국 세 번째 재벌이 된 NEXON의 이정주 대표이사 역시 아직도 정확한 자살 원인은 모르지만 지인들은 그가 늘 주변 사람들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인생이란 돈만 가지고 혼자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인 존재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은퇴한 목사님께서 어느 날 모임에서 요즘 마누라가 너무 잘 해 줘서 오히려 미안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은퇴하고 돈도 못 벌어오는데 왜 전에 보다 더 잘 해주느냐?”고 물었더니, “다 늙어서 당신이라도 없으면 과부가 되고 그렇게 되면 혼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가 곱씹어 보아야 할 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도 절망에 지쳐 쓰러진 불쌍한 제자들에게 두 말 않으시고 손 내밀어 주시면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땅에 있는 주변 사람들부터 먼저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변이 고통에 빠지게 되면 결국은 함께 고난의 늪에 침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때가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26:45-46)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분명하게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무장시키시고 스스로도 하나님의 사명을 완성할 수 있도록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장차 다가올 고통을 대비하는 최상의 길은 오직 믿음으로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해 우리교회의 표어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처럼 쉬지 말고 기도해야만 할까요? 지금은 누가 뭐래도 마지막 때이고 마지막 때에는 고통이 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말씀이 이를 잘 뒷받침 해 주고 있습니다.

(딤후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는 말씀과 같이 마지막 때에는 고통 하는 때가 찾아오게 됩니다. 단순하게 지금 우리 주변에는 전쟁의 포화가 울러 퍼지고 있고, 그것이 우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데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당장 우리 워싱턴 주에서는 개스가 갤런당 6불이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 옛날 좋은 시절에는 88전 하던 개스가 6불이 넘어선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저 보다도 요즘 물가를 더 절실하게 체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은 온 세상이 다 하나의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만리 먼 곳에서 전쟁이 났다고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세에는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모든 인생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마지막 때에는 고통이라는 용광로로 우리 성도들을 단련하셔서 천국의 알곡들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래저래 오늘 우리는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사실을 다 아시는 예수님은 절망에 쓰러져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이처럼 연약하고 어리석은 제자들을 데리고 나가시니 로마 군사들을 앞세우고 배신자 가룟 유다가 길을 막아서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6:47-49)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들이 이와 같은 배신자와 이처럼 중무장한 로마병정들을 과연 무슨 재주로 이겨낼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들을 이길 재간이 없습니다. 무슨 수로 배신자를 막아 낼 수가 있으며 무슨 수로 칼과 몽치를 들고 선 군사들을 이겨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 무장하여야 하고 일어나라 함께 가자!”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만이 불안한 우리들의 삶에 평안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기도만이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을 수가 있습니다.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누가 뭐래도 말세입니다. 말세에는 육적인 전쟁뿐만 아니라 영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결코 이와 같은 무서운 전쟁에서 우리들의 힘만으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예수님과 손잡고 예수님과 함께 대적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사실을 미리 아시는 예수님은 그래서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말입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통해서도 우리는 놀라운 교훈을 받게 됩니다. 온 백성들이 러시아에 대항하여 일사각오로 싸우니 전 세계가 일어나서 돕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두려움에 떨고 절망에 포기하여 도망 가버렸다면 악마 같은 러시아의 밥이 되었고 서방의 큰 도움을 받을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들까지도 총을 들고 거리에 나서고 목숨을 걸고 화염병을 들고 거대한 탱크 앞에 나서니 러시아도 겁을 먹고 서방세계는 내 일 같이 일어나 돕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스웨덴이나 핀란드 같은 중립국들까지도 일어나 전투기를 보내 줄 만큼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일어나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타락한 성격,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자기 교만, 탐욕, 육신에 의지하는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도 파괴해 버리고 자기 스스로의 운명도 파괴해 버립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고난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저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기도해서 결혼하고 가정도 이루고 사업도 하고 일도 계획했는데 왜 중간에 와서 이렇게 혹독한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며 모든 일에 시련의 눈보라가 치고 사막을 지나는 것 같은 고통이 다가옵니까? 전진도 후퇴도 못할 정도로 죽게 되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렇게 대하십니까?”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주셔서 그 것을 영원히 누리게 하기 위해 먼저 타락한 인격의 찌꺼기를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건축 공사장이든지 기초도 다지지 않고 건물을 먼저 세우는 것을 보았습니까? 어느 도로 공사장이든 지반을 파내지도 않고 바로 길을 닦는 것을 보았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업을 맡기고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인격적인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들의 구원도 없었을 것이고 부활도 새로운 생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더 큰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며 주님과 함께 일어나 당당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렇게 승리하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친히 부르시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말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26: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이 세상이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일어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것입니다. 아가서 2:10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이 아름다운 구절을 눈을 감고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이 보다 더 아름답고 행복한 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들과 같이 무익하고 무능한 인생들을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시고 따뜻한 손 내밀며 이렇게 부르시고 이렇게 고백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눈동자를 한 번 쳐다보십시오. 이 세상 무엇이 우리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부르심을 가로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도 따뜻하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리고 제자들의 모습이 기록된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그들은 너무나도 예수님을 실망시켜드린 인물들이었습니다. 당장 오늘 본문만 잠시 들여다보아도 그들은 예수님과 전혀 공감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의 두 성경구절을 한 번 비교해 보신다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금방 아시게 될 것입니다.

(26:37-38)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26: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예수님은 열두 명의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따로 선택하시고 다른 제자들은 거기에 두고 이들만 데리고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 놓고 말씀하시며 같이 기도하자고 독려까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책망과 같이 한 시 동안도 깨어서 주님과 함께 기도 동무를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인간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으며 영적으로는 더 더군다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무런 실망도 드러내시지 않은 채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먼저 상대를 이해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26: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들의 사랑 방법과 예수님의 사랑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에 만족할 만한 그 무엇이 있어야만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유익은 고사하고 고통과 손해가 있게 되면 사랑은 고사하고 인간관계 자체를 파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 따뜻한 사랑은 고사하고 원수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연약함과 무익함을 다 아시면서도 결코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실망하여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대로 기록된 바와 같이,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부르시고 손 내밀어 주시고 또 다시 기회와 내일의 소망을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고귀한 사랑으로 인해 오늘 우리들이 아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업적과 그들이 쓴 성경이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역사를 바꾸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며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솔로몬 왕이 아무 것도 없이 포도밭에서 태양을 이고 일만 하는 보잘 것도 잘난 것도 없는 술람미 여인을 사랑했던 것이 바로 이런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에는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의 이와 같은 사랑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말세에 닥칠 고난을 함께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따뜻한 사랑으로 부르시는 일어나라 함께 가자!”는 주님의 사랑에 화답해야만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우리 주님의 이처럼 포근한 부르심과 사랑에 화답하시고 행복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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