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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원하시면! (2022년 3월 13일 주일낮설교)

주께서 원하시면!

 

3. 13, 2022

:마가복음1:40-45

:崔仁根牧師

 

지금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군의 침공으로 인적, 물적인 피해가 엄청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21세기에 이처럼 뚜렷한 명분도 없이 선량한 시민들을 학살하는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전 세계인의 공적이 되고 있고 미국과 유럽 등의 강력한 제재로 러시아는 316일이 지나면 국가부도가 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고가 현실화 되고 있습니다. 불행한 것은 전쟁의 피해가 우크라이나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고 있는 미국에도 엄청나게 현실화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40년 이래 최고의 개스 값과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가 엄청나게 치솟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다가 이스라엘이 이란에다 미사일로 공격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이란의 고위급 지휘관 두 명을 사살하였기에 이란이 어떤 보복으로 나설 것인가에 따라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미도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는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과연 지금은 말세이고 말세에는 고통이 따를 것이며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유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철저한 경제적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렇게 거룩한 주일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이 난국을 극복해 나가야 하겠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올바른 교훈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다섯 절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짧은 말씀이지만 그 말씀 속에 숨어 있는 진리는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놀라운 교훈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이 사건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매우 소중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이 문둥병자의 기도가 즉석에서 응답되고 이로 인하여 예수님은 다시는 그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비우고 말씀을 사모하며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진리의 말씀으로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시기를 소원합니다.

문둥병이 주는 교훈

(1: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왕하5:25-27)

들어가서 그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대답하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 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대하26:17-19)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제사장 용맹한 자 팔십 인을 데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왕을 막아 가로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이 왕의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노를 발하니 저가 제사장에게 노할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그 이마에 문둥병이 발한지라

오늘 본문은 앞뒤로 아무런 연관도 없이 그냥 들어와 삽입 된 다섯 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왜 여기에 끼어 있는지, 그냥 지나치면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한 문둥병자를 고쳐주셨는가 보다 하고 말 것이지만 이 말씀을 오래토록 묵상해 보면 그 속에 엄청난 진리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첫 번째로 오늘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말씀이 문둥병자입니다. 우선 성경에는 문둥병이 저주 받은 자의 형벌로 기록 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위에 인용해 드린 바와 같이 게하시와 웃시야 왕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문둥병자가 된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을 종합해 보면 공통분모가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이 없는 무지함과 인간의 헛된 욕망이 그와 같은 무서운 형벌을 자초하였다는 것입니다.

게하시는 당대 최고의 이적과 기사를 행하며 하나님의 손과 발로 쓰임을 받았던 엘리사의 종이었습니다.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려 기적을 베푼다는 엘리사의 소문을 듣고 병 고침 받기를 원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은 헛되지 않아 엘리사는 손 한 번 대지 않고 말씀으로만 명령하여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했었지만 깨끗하게 나음을 받았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한 나머지 나아만은 준비해 왔던 금과 선물로 사례를 하려고 하였으나 엘리사는 한사코 거절하고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이것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게하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주는데 왜 스승님은 그 귀한 것을 거절하는지 화가 날 정도로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그머니 나아만을 따라가서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는 것처럼 금덩어리와 외투 등 선물을 요구하고 그것을 받아서는 자신의 집에 몰래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승님은 자신이 한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 어리석었던 행위를 책망하셨습니다.

(왕하5:26)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게하시가 깨달음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라는 말씀이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불행하게도 게하시는 스승 엘리야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인데 지금은 아니라는 스승님의 의중을 그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언제나 종은 주인의 뜻을 깨달아야 하고 그 뜻을 쫓아가야 합니다. 그 스승님 대신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 탐욕을 부리게 되면 게하시처럼 비참하게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웃시야는 어떠하였습니까? 진실로 웃시야는 정직한 왕이었고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총애를 받았던 왕이었습니다.

(대하26:4-5)

웃시야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는 유독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제사를 왕인 자기도 할 수 있다고 그릇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80명의 제사장들이 목숨을 걸고 왕에게 나아가 만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을 향해 화를 내면서까지 강행하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그에게 문둥병이 생겨나게 하심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렇게도 우매한 판단을 하였을까요? 이에 대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대하26:16)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는 만사형통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며 그만이야 그것이 자신의 공로인 줄 알고 교만하여져서 판단이 흐려져 그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둥병으로 심판을 받은 게하시와 웃시야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련하고 우매하며 깨닫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둥병의 특징입니다. 문둥병은 감각이 둔해지고 급기야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게 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이 종이 신학대학에 다닐 때 친구 셋과 함께 부산 용호동에 있는 음성나환자촌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나병이 다 나아서 소록도에서 자유의 몸이 되어 나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체적 특성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그들만의 집단촌을 만들어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 때 들은 이야기가 나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실수하여 뜨거운 물이 손에 쏟아졌는데도 전혀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나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들도 미련하면 안 됩니다. 우매하면 안 됩니다. 스승이 가르치면 반항하지 말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게하시나 웃시야와 같은 화를 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하거나 우매하거나 고집이 세게 되면 불행하게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깨닫지 못하게 되면 마치 문둥병에 걸린 것처럼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처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8:17-21)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지금은 말세입니다. 말세의 또 다른 징조 하나가 성경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깊은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 말씀보다 더 큰 진리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에게는 황금보다 더 보배로운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깨달음이 있어야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1: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문둥병자는 비록 몸은 감각이 없는 문둥병에 걸렸지만 그 영은 깨달음이 있어서 예수님을 찾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문장으로는 한 줄도 안 되는 짧은 것이지만 그 의미는 하늘만큼이나 크고 위대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이 무서운 저주의 병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깨달음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 채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온다는 사실은 이렇게도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과연 누구십니까? 오늘 우리들의 삶에 예수님께서 차지하는 비중은 과연 얼마입니까? 진짜로 예수님이 금보다도 더 귀하십니까? 우리는 오늘 이와 같은 질문 앞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향한 우리들의 자세에서부터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문둥병자는 어떠한 자세로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까? 다시 한 번 더 본문으로 돌아가 확인해 보십시다.

(1: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여기 분명하게 기록된 그대로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꿇어 엎드렸습니다. 우리는 과연 언제 이렇게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기도드려 보았습니까? 여기에서 문둥병자가 꿇어 엎드렸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과 사모함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겸손한 사람을 만나본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그 신비로운 은혜를 사모하기를 원하십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함을 주겠다고 약속까지 해 주셨겠습니까?

(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누리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오늘 아침 하나님은 이처럼 소중한 말씀으로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제발 겸손하고 하나님의 것을 사모하는 진실한 믿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의 뜻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1: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8: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문둥병은 모든 병중에서도 가장 저주 받은 무서운 병입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그렇게 저주로 심판하시고 문둥병에 걸리게 하셨고 실제로 이 병에 걸리게 되면 가족들과 격리 되어 평생 외롭고 비참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병들었을 때 가족들로부터 사랑과 도움을 받아 회복의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 하지 못한 채 혼자서 그 무서운 병과 싸워야 하니 이 보다 더 비참한 저주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찾아 나왔던 이 문둥병자의 절박함은 오늘 우리들 중에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를 한 번 보십시오. 오늘 우리들을 너무나도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낫기를 소원할 이 병자는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고 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니 낫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우선권을 드렸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그렇게도 많은 기도가 나오지만 이 문둥병자처럼 감동적인 기도를 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도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우선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선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들에게 기도의 모범으로 먼저 보여주신 사실이기 때문에 더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무서운 십자가에서의 죽음까지도 자신의 원대로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언제나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문둥병에 걸려 비참하게 살아가던 문둥병자가 예수님과 똑 같이 주님께서 원하시면!”, “저를 고쳐주십시오.”라고 했으니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유익이 우선이고 먼저입니다. 자기 자식들을 교회에 데리고 나와서 돌보는 것조차도 왜 우리가 교회에 와서까지도 우리 아이들을 우리들이 보아야 합니까?” 하는 정도이니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미안하지만 문둥병자와 같은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겸손하게 나의 유익보다는 이웃의 유익을 먼저 구하고 나의 욕심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이루어드리기를 원한다면 틀림없이 문둥병자와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의 중심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41-42)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문둥병자가 구하였던 그대로 내가 원하노니라고 반복하신 대목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의 그 기도를 귀하게 여기셨다는 뜻입니다. 나의 유익과 나의 요구가 우선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주님의 마음이 우선이었던 문둥병자의 기도는 예수님 앞에 그대로 상달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짧은 인생을 통해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절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삶에 더 유익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어르신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중에 힘이 없어지면 자식들을 의지하시겠습니까?”하고 말입니다. 열이면 열이 다 똑 같은 대답을 합니다. “천만에요. 요즘 같은 세상에 자식들을 의지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진짜 진심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 자식들에게 평생 투자한 정성이 얼마이고 또한 투자한 재산이 얼마인데 기대를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 자식들로부터 배신당하실 것이 두려워 스스로 포기하는 척 하는 것뿐입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들로부터 영광 받으시기를 기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 과연 누가 복을 받을 수 있는지 보석처럼 심어 놓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112:1-3)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128: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28: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문둥병자와 같이 오직 하나님께 우선권을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이루어 드림으로 기적 같은 축복을 받은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Benjamin Schmolck 목사님 내외분이 어느 날 밤 심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이없게도 자신의 집이 불에 타 없어졌고 잿더미 위에서는 흰 연기만 피어오로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두 아들이 생각난 그들은 미친 듯이 그 뜨거운 잿더미를 파헤쳤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두 아들은 숯과 같이 까맣게 탄 채 숨져 있었습니다. 그 비통함이란 어찌 말로 다 형언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땅이 다 꺼져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슈몰크 목사님 부부는 그 자리에 엎드려져 통곡하며 부르짖었습니다. “, 예수님 우리들이 당하는 이 고통이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사오나 주님께서도 이 세상에서 슬퍼하셨고 우셨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주님과 함께 울어야 할 때라면 울겠습니다. 이것이 진정 주님의 뜻이라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말입니다. 훗날 슈몰크 목사님의 이 가슴 아픈 고백이 정리 되어 오늘 우리들이 부르는 431장 찬송이 되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오늘 우리들도 가슴으로 노래하며 소중한 우리들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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