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믿음입니까? (2022년 3월 27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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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7 March 2022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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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믿음입니까?
3. 27, 2022
本文:마태복음15:21-28
說敎:崔仁根牧師
한 소년이 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이 너무 높이 올라가는 바람에 안개와 낮은 구름으로 인해 작은 연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티레에 묶인 실이 곧바로 머리위로 뻗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소년을 처다 보며 물었습니다. “애야, 연이 어디 있는지 안 보이는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소년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요? 이 줄을 한 번 잡아 보세요. 팽팽하잖아요. 연은 보이지 않지만 제 머리 위쪽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을 거예요. 이 팽팽한 줄을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어요.”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지키시고 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이 분명히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도들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복음서에 나타난 최고의 믿음으로 예수님의 칭찬을 온 몸으로 받고 기적을 체험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냥 읽기만 하면 도대체 무엇이 믿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불쌍한 여자를 무시하시고 여자는 계속해서 “도와 달라”고만 하는 내용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봄을 여는 3월의 마지막 주일이며 고난주일과 부활주일을 기다리는 복된 이 계절에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믿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믿음을 만들어 가는 방법은 또한 무엇인지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부디 마음 귀를 여시고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풍성한 축복의 열매를 맺히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무시를 당해도 포기하지 않아야 믿음입니다
(마15:21-23)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마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우리 모두는 너 나 할 것 없이 무시를 당하게 되면 인내하지 못합니다. 그 끔찍한 살인 사건 중에서 이렇게 무시를 당하고 격분하여 일어난 살인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주의이기 때문에 그 자존심이 무시당하게 되면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의 생계가 걸려 있는 직장이지만 이렇게 무시를 당하게 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사표를 던지고 나오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2007년 4월 16일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끔찍한 총기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인이었던 조승희가 총기난사로 32명이 죽고 29명이 부상을 입은 끔찍한 사건으로 전 미국을 경악케 하였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이유는 당사자가 자살을 하였기에 알 수는 없지만, “너희들은 내 피를 흘리게 했다.”는 증오의 메모는 그동안 숱하게도 많은 무시를 당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을 경험하면서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무시와 모욕을 당했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 그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잘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는 감동이 될 만큼 놀라운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어린 딸이 흉악한 귀신에게 붙들려 신음하자 그 엄마가 예수님께로 찾아 나와 도와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도 딱한 자신의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은 단 한 마디도 반응하지 않으셨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제자들이라는 사람들은 자신을 물리치며 “시끄럽게 자꾸 떠들어대니 예수님 저 여자를 쫓아내버리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말씀하셨는데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잘라 거절을 하셨습니다. 흉악한 귀신에 들린 딸을 데리고 나온 이 여자는 그 얼마나 실망하고 절망하였겠습니까? 예수님까지도 거절하신다면 이젠 더 이상의 소망이 없어지는 것이기에 그녀의 절망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예수님과 제자들로부터 이처럼 처절하게 무시를 당하였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배신감에 사로잡혀 돌아서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시 한 번 더 간절하게 사정하고 부탁하였습니다.
(마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이 여인의 믿음을 보게 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그녀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개의치 아니하고 그 주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절하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보배로운 진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은 우리들의 주님이시고 그러므로 그 주님 앞에서는 겸손하게 엎드려 간구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야만 이 여인과 같이 그 예수님을 향하여 엎드려 절할 수 있는 믿음을 견지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오늘 우리들을 위해 하늘의 하나님이시면서도 몸소 멸시와 모욕과 천대를 받으시며 그 모든 고통을 참아내시는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마26:67-68)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들이 누군가로부터 이처럼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고 주먹으로 가격을 당하고 손바닥으로 뺨을 맞았다면 과연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참아낼 수가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과 같이 묵묵히 이겨내고 엎드려 절을 하는 겸손으로 믿음의 모범을 보일 수가 있었을까요? 아마도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비록 이방인이요 당시 유대인들이 상종조차 하지 않는 천한 백성이었지만 그녀는 예수님께서 친히 인정하시는 올바른 믿음이 있었고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마음에 소원하던 딸을 고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믿음의 덕목을 배워서 그 어떤 멸시와 무시를 당한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이겨내고 기적을 보는 제대로 된 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도 참고 당하셨고 가나안 여인도 참고 이겨낼 수 있었다면 오늘 우리들도 그렇게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렇게 참고 견뎌내게 될 때 빛을 발하게 되고 축복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개와 같은 취급을 당해도 참아내야 믿음입니다
(마15:25-26)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가나안 여인은 참으로 참기 어려운 무시와 멸시를 당하였지만 잘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로 또 다시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청을 드렸습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도 냉정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보통 사람들의 인내가 바닥이 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개로 취급을 당하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세상에서 더 이상 상종하지 못할 악한 존재를 말씀하실 때 개에다 비유하셨습니다.
(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는 말씀과 같이 그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조차 주지 말라고 명령하셨을 정도였습니다. 이를 배운 베드로도 역시 개들을 아주 나쁜 것으로 비유하였습니다.
(벧후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예 개들을 삼가라고 까지 하면서 상종하지 못할 존재를 논할 때 개를 비교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가장 경계하고 함께 하지 못할 존재가 바로 개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빌3:1-2)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을 이처럼 개로 취급하셨으니 가나안 여인이 받았을 상처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여인은 한결 같았고 주님을 향한 마음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그렇게도 모독스러운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마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과연 가나안 여인은 대단한 인격과 믿음의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람이 그 얼마나 연단을 받고 덕을 세워야 이처럼 개 취급을 받으면서도 “옳습니다.”고 고백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말 우리 주님을 감동시켜 드리기에 흡족할 만큼 가나안 여인의 인내는 대단하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와 같은 인내의 덕을 가질 수만 있다면 이 땅에 다툼이 왜 나오며 전쟁이 왜 일어나겠습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눈곱만큼이라도 모욕을 당하거나 자존심이 상하게 되면 한 순간에 모든 관계를 거덜 내고 원수가 되어 돌아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들을 향하여 오늘 본문의 예수님처럼 개 취급을 하였다면 아마도 천지개벽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참고 견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를 “믿음이 있는 자”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이 있다면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를 믿음이 있는 자로 동일한 의미를 두고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결코 참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칼과 몽치를 들고 자신을 잡으러 온 로마 병정들 앞에 칼을 빼들고 막아섰던 베드로에게 “너는 이것까지 참으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끝까지 믿음으로 대처하라는 뜻입니다.
(눅22:50-51)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인내를 배웠던 사도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욥을 샘플로 들고 그 욥과 같이 인내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실로 욥의 인내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놀라운 미덕이었습니다.
(약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개 취급을 당하면서도 침착하게 참고 끝까지 주님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였던 가나안 여인을 향해 예수님은 마침내 크게 칭찬을 하셨던 것입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믿음에 인정을 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믿음에 걸 맞는 기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들이 믿게 되면 하나님의 기적과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요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견고한 믿음을 준비시킨 다음 나사로를 살리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나타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믿음, 즉 사는 삶에 개와 같은 취급을 당하는 모욕을 당한다 할지라도 몸소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참고 견디는 믿음을 만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성숙한 성도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것이면 부스러기라도 사모해야 믿음입니다
(마15:27-28)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 말씀은 가나안 여인이 비록 개와 같은 이방인이지만 그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니 “이 여인도 주님께서 주시는 부스러기라도 주신다면 만족하겠사오니 제발 부스러기라도 주시기를 원합니다.”는 고백을 드렸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족집게로 쏙 뽑아내서 읽고 있는 것과 같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본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6장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5병2어의 기적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요6:12-13)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 명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에 찼을 만큼 능력이 많으신데 무엇 때문에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버리지 말고 다 거두라고 하셨을까요? 오히려 그것을 그곳에 버려 두어 새들이라도 먹게 하라고 하셔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비록 부스러기 일지라도 예수님의 축복이 묻어 있기 때문에 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가나안 여인은 개들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것처럼 자신도 비록 개와 같은 이방인이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스러기라면 기꺼이 감사하며 받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녀의 이와 같은 고백을 들으시자 말자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입니다.
(마15:27-28)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가나안 여인의 그 무엇이 이토록 놀라운 믿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을까요? 앞에서 이미 설명해 드린 바와 같이 가나안 여인은 비록 부스러기일지라도 예수님의 것이면 그것이 곧 가장 값진 축복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그녀의 진정한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84:10-12)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주님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습니다.”,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습니다.”고 하니 이렇게 고백하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가나안 여인과 같이, 이 시편 기자와 같이 오늘 우리들도 주님의 것이라면 비록 부스러기라도 좋다고 사모하고 주님의 궁정에서 한 날을 세상에서 천 날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진정한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오늘 우리들도 우리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들은 이와 같은 주님을 제쳐놓고 우리 스스로 소원을 이루려고 동분서주 몸부림 치고 있으니 주님이 보실 때 그 얼마나 가련하고 안타깝겠습니까? 그렇게 하다가 지치고 곤한 우리들을 주님은 그래도 사랑이시기에 여전히 따뜻한 미소로 부르시고 계시니 두 손 들고 그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마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는 말씀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