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빌립보장로교회

-- 성령의 열매맺는 교회 --

Sat11232024

Last update12:00:00 AM

Font Size

Profile

Menu Style

Cpanel
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목적이 있는 삶 (2022년 4월 3일 주일낮설교)

목적이 있는 삶 (2022년 4월 3일 주일낮설교)

목적이 있는 삶

 

4. 3, 2022

:이사야61:1-3

:崔仁根牧師

 

성경에 등장했던 위대한 인물들의 출연을 들여다보면 놀라운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거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것은 정확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3:1-3)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세례요한)

(1:5-7)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세례요한)

(1:16-18)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베드로)

(9:11-15)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작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 바울)

이상에서 우리는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섭리라고 합니다. 섭리라는 말은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만드실 뿐만 아니라 만드신 그 만물을 친히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목적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 그 길로 한 평생을 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만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큰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고난과 부활절을 앞두고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삶을 찾아보면서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모쪼록 마음 귀를 열고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목적이 있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자유케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본문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두 다른 의미가 서로 교차하며 대비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 슬픈 자, 근심, , 라는 말씀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모두가 오늘 우리 죄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아픈 모습들입니다. 그런 반면에 아름다운 소식, 고침, 자유, 놓임, 위로, 화관, 희락, 찬송, 의의 나무, 영광 등의 말씀들은 한결 같이 축복의 열매들로서 오늘 우리들에게 참 소망을 주는 말씀들입니다. 전자는 예수님 없는 이 세상의 현실을 대변하는 낱말들이고 후자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와 같은 자들에게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 놓으신 결과들입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은 이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예수님은 너무나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셨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올인하셨던 것입니다.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분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보내신 분, 즉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죽으시기 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목적이 있는 삶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과연 무슨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되었다면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바로 이렇게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보내시고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 비로소 목적이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슬프고 그래서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마지막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곡은 구별하여 창고에 들이시되 죽정이는 다 불에 태워버리시는 추수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1:4-6)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이란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그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자신의 주장이 강하여 제고집대로 살면 마지막이 비참하고 후손들이 형통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말씀을 들을 귀를 가지고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전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1:38-39)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어마무지한 능력과 권세를 가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전도하기 위해서라는 오늘 말씀을 접하면서 우리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고작 그것 때문에?”라는 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전도라면 오늘 우리들도 모두 다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 더욱 이와 같은 반문을 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이렇듯 전도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는 사명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보고 듣고 배워도 실체를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인식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라는 매체를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가르치지 않으면 죄인들은 그들의 무지함으로 인해 결국 다 망하거나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적인 권세를 이용하여 무지한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시고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 예수님을 가르쳐주고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숱하게도 많은 이적과 기적을 베풀어 주시며 그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그 예수님을 등진 채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도 숱한 기적과 이적을 두 눈으로 보고서도 그들은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남자만 5천 명이나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보여주셨지만 그들은 그 기적의 주인공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6:66-68)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두 눈으로 보고 예수님의 진리를 두 귀로 듣고서도 그들은 끝내 그 주님을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와 같은 예수님을 성경에 기록된 글로만 보고 있는데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따들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와 같은 현실 앞에서 오늘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소중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6: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살후3: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결코 우리들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따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똑똑하고 지혜로워서 믿음을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믿음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선포해 주셨던 것입니다.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고 말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당시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을 만나고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과 같이 예수님의 모습이나 음성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믿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만 가지고도 범사에 감사를 드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을 얻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우리들이 전하는 전도를 통해서 상대가 믿고 돌아옴으로 보람을 느끼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비록 돌아오는 자가 없어도 감사하며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정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님처럼 평생을 통해 복음을 전하였던 사도 바울은 그래서 지금 우리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고 말입니다. 진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바로 아는 성도라면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목적으로 삼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실천하시며 모범을 보여주셨던 전도하는 일을 순간이라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쳐놓고 예수님을 찾는 것은 모두가 다 자기 중심의 비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도를 매일 밥 먹는 것과 같이 생활화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남북전쟁 때의 일화입니다. 한 노인이 백악관 앞에서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군대에서 도주해 탈주병으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의 구명을 위해 링컨대통령을 만나 호소하고 도움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연히 보초병들은 백악관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 소년이 노인에게 다가갔습니다. "할아버지 나를 따라 오세요" 소년은 그 할아버지를 모시고 곧장 백악관으로 달려갔습니다. 노인은 소년의 손을 잡고 허겁지겁 백악관으로 들어섰습니다. 그곳에서 노인을 붙잡는 보초병에게 소년이 말했습니다. "이 분은 우리 할아버지예요." 보초병들은 더 이상 노인을 제지할 수 없었습니다. 노인은 링컨대통령을 만나 딱한 사정을 하소연 했고, 아들은 사형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바로 링컨대통령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인해 하늘의 문을 무사통과 하게 됩니다. 또한 죽음대신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천국은 백악관 앞에서 눈물 흘리는 노인처럼 나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링컨의 아들이 할아버지를 안내해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안내자가 되어주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안내자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전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너무나도 황송하게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이렇게도 분명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죄인들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바치겠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의 방법입니다. 완악한 인간들의 마음을 얻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소중한 것을 조금이라도 내려놓고 예수님을 섬기고 전하는 삶을 살게 하는 방법이 이렇듯 섬기고 희생하는 모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살기 위한 방도로 인간들의 가치관과 목적을 가르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씀을 가장 많이 강조하시며 전해주셨습니다.

(18:10-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셨습니까? 겸손입니다. 왜냐하면 교만한 자는 결코 남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오죽하면 패망의 선봉이라고 까지 하셨겠습니까.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7:10)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저희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듭거듭 이와 같이 겸손하여 남을 섬기는 삶을 통하여 예수님의 성품과 모습을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겸손만이 모든 사람을 하나로 아우르게 되는 것입니다.

노만 빈센트 필 목사가 자바에 있는 발리 섬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섬사람들이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게 산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큰 산업 시설이나 재미있는 오락시설도 없는 작은 섬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발리 섬 사람들은 그토록 행복한 것일까? 필 박사는 그곳 사람들을 일주일 동안 인터뷰한 뒤에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해답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1. We have nothing. 2. Our lives are simple. 3. We serve each other. 4. We have enough to eat. 5. We live on a beautiful island."가 그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다섯 가지 행복의 조건은 모두가 단순하고 평범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렇게 살 수 있는 여건들입니다. 단지 인간은 만족이 있어도 만족할 줄 모르고, 은혜가 넘쳐도 기적을 기다리며, 아름다운 것을 곁에 두고도 욕심을 부리며, 넘쳐흐르는 사랑 속에서도 질투와 증오심을 스스로 제조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발리섬을 주셨는데도 엉뚱한 보물섬을 찾아 헤매고 있기 때문에 주어진 행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 작은 꽃잎 하나에도 미소 지을 줄 알고 길 지나는 강아지 한 마리에게도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작은 것에 검사드릴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큰 것으로 보상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Add comment


Security code
Refre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