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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제자 엘리사! (2022년 5월 15일 주일낮설교)

최고의 제자 엘리사!

 

스승의 주일

5. 15, 2022

:열왕기하2:1-11

:崔仁

 

자신을 가르쳐 인도하는 분을 우리는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스승이란 단순히 학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니라 삶의 지혜와 올바름까지 알려주는 분이라고 합니다. 플루타르크는 아주 유명한 명언을 남겼는데, “부모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 주셨다면, 훌륭한 스승님은 세상의 이치와 지혜를 알려주신 분이십니다.”고 말입니다.

오늘, 515일은 인생에 큰 가르침을 주신 스승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스승의 의 날이요 스승의 주일'입니다. 학창시절, 우렁찬 목소리로 반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 감사합니다.'를 외쳤던 경험 다들 한 번씩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승의 날이 왜 515일인지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나요? 오늘은 스승의 날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그 시작에 대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앙리 뒤낭이 전쟁터에서 차별 없이 부상자를 구호하던 인도주의 봉사활동에서 유래된 적십자. 그 적십자는 오늘날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봉사활동, 재난구호, 보건강습, 국제친선, 헌혈운동, 불우이웃돕기, 심신수련 및 국제교류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청소년층이 주체가 되어 국내외적으로 활동하는 인도주의 조직체를 청소년적십자(Red Cross Youth)라고 부릅니다. RCY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는데, 스승의 날은 1958년 충남 강경여자중고등학교 청소년 적십자 단원들이 세계 적십자의 날을 맞아 병중에 있거나 퇴직한 교사들을 위문하기 위해 찾아가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후 1963년 제12차 청소년적십자사 중앙학생협의회에서 524일을 '은사의 날'로 정하고 사은행사를 진행하게 됩니다. 다음 해인 1964년에는 '은사의 날''스승의 날'로 변경하고 날짜를 526일로 변경하게 되고, 1965년에는 각 급 학교 및 교직단체가 주관이 되어 스승의 날을 세종대왕 탄신일인 515일로 변경하였습니다. 이후 1973년에는 정부의 서정쇄신방침에 따라 '스승의 날'이 폐지되었다가, 스승을 공경하는 풍토를 조성하고자 1982년 다시 부활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렇듯 스승님을 기리고 섬기는 자세는 좋은 제자가 되는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2022년도 스승의 주일을 맞아 성경에서 최고의 제자로 불리우는 엘리사에 관한 말씀을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그는 위대한 스승인 엘리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어떤 제자가 되었는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살펴보고 가슴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엘리사는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상19:19-21)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 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

원래 엘리사는 농사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소를 이끌고 밭을 갈고 있는데 뜻밖에도 엘리야가 찾아와서 겉옷을 던졌습니다. 이것은 당시 내가 너를 나의 제자로 삼노라!”하는 부름의 사인이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두 말하지 아니하고 즉석에서 엘리야를 따라가서 엘리야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단순하게 읽으면 그랬었구나!”하고 말겠지만 그 내면을 묵상해 보면 놀라운 엘리사의 결단을 보게 됩니다. 누구라서 평생에 하던 일을 순간에 버리고 기약도 없는 낯선 스승을 따라 나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결단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분명한 결단이 요청되는 문제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연히 그리고 무의식중에 하나님의 나라에 떠밀려 들어가거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결심을 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성경 전체는 선택이라는 말에 대한 긴 설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였던 모세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 백성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30:19-20)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후계자였던 여호수아도 이상하리 만큼 모세와 같이 그의 생의 마지막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선포하였습니다.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고 말입니다. 한결 같이 복된 삶을 원한다면 결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두 지도자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엘리사와 같이 결단하는 삶을 살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미적거리며 시간만 낭비하게 되면 사람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서도 소용없는 인물이 되고 말지만 강한 믿음을 가지고 결단하게 되면 능력 있는 하나님께서 친히 도우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어쩌면 선택인지도 모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결단하지 못한 여인에게 임한 비참한 결과가 생생하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창세기에 있는 롯의 아내에 관한 이상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평원의 도시들은 너무나도 넘치는 죄악 때문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롯과 그의 가족들은 멸망이 임하기 전에 그 성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을 떠났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또 보여집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19:26) 이것은 마음을 정하지 못했던 여인에 관한 묘사입니다. 그녀는 도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돌아가고 싶은 미련 때문에 그녀는 단호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뒤돌아보고 말았던 것입니다.

누가가 전해주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도 친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17:32)고 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망할 세상에 미련을 두고 머뭇거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도 결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집에 가서 가족들과 작별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않다."(9:62)고 말입니다. 이렇듯 성경 전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신중한 선택의 문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엘리사와 같은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한 번뿐인 인생을 승리하며 복을 누리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였습니다

(왕하2:9-10)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엘리사의 스승이신 엘리야가 산채로 승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엘리야는 서서히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을 눈치 챈 엘리사는 잠시도 그 스승 엘리야를 떠나지 않고 따랐습니다. 조용히 떠나야 하는 엘리야는 이렇게 자꾸 따르는 엘리사에게 여러 차례 권했습니다. “이제 그만 따르고 여기에 머물고 있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한사코 스승 엘리야를 쫓았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엘리사가 도저히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렇게 따르는 엘리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겠는지 내게 구하라!”고 말입니다.

(왕하2: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그러자 엘리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순간에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의 영감을 갑절이나 내게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천 번제를 드리는 솔로몬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혜를 주십시오.”라고 대답했던 솔로몬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엘리사는 그 숱하게도 많은 소원 중에서 갑절의 영감을 구하였으니 역시 그 스승의 그 제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즘 우리는 주일 예배와 수요일 예배에서 소망에 관한 말씀을 계속 듣고 있습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야 참 소망이고 그와 같은 진정한 소망이 있으면 참음으로 기다릴 수 있다.”(8:24-25)는 말씀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우리 자신에게 조용히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나였으면 무엇을 구하였을까?”하고 말입니다. 엘리야처럼 땅에 있는 허접한 그런 것들을 구하지 말고 신령한 능력으로 역사할 수 있는 갑절의 영감을 구할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은 열 세 번이나 되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며 놀라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청렴하고 속된 세상의 것에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사건을 기록하시며 친히 증거해 주셨습니다.

(왕하5:14-16)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가로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 나아만이 받으라 강권하되 저가 고사한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엘리사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마땅한 선물일지라도 엘리사는 절대로 쉽게 취하지 않고 고고하리 만큼 신령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더러운 세상의 이익을 바라고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1:7-9)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5:1-3)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오직 신령한 것을 구하며 부르심에 합당하게 충성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종 게하시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금하신 더러운 이를 탐하다가 문둥병자가 되어 비참하게 망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승의 주일을 맞아 과연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따라야 하겠는지 확실하게 깨달아 게하시와 같은 우리들의 못난 욕심을 버리고 엘리사와 같은 신령한 종들로 거듭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엘리사는 또 다른 제자들을 양성하는 스승이 되었습니다

(왕하6:1-2)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취하여 그곳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가라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엘리사는 위대한 스승 엘리야의 손색없는 제자로서 사명을 감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또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함으로 훌륭한 스승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역사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의 훌륭한 제자가 되어야 함은 마땅한 도리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들도 또한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전하고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3:13-15)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엘리사는 단순하게 엘리야의 제자로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스승이 되어 많은 제자들을 모아 양육하며 또 다른 엘리사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왕하6:1)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라는 말씀과 같이 엘리사의 제자들이 날마다 늘어나서 기존 장소로서는 다 수용할 수도 없을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엘리사는 이렇게 수많은 제자들을 육성하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일꾼들을 양성하여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이바지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들도 우리 스스로가 위대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고 우리 또한 스승이 되어 예수님을 전할 훌륭한 제자들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명을 대를 이어 감당해 나가도록 인적자원을 축척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마지막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놀라운 사명을 선포해 주셨던 것입니다.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고 말입니다.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은 곧 가서 스승이 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돈이나 벌고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서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그 어떤 교회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전 프로젝트를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축복을 통하여서 온 세상을 제자삼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와 같은 21세기의 놀라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준비하여 비전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하나님의 사명을 넘치도록 감당하는 귀한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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