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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을 위하여! (2022년 5월 29일 주일낮설교)

행복한 삶을 위하여!

 

5. 29, 2022

:야고보서5:  7  -  11

:崔仁根牧師

 

강철왕 카네기가 어렸을 때의 일화 한 토막이 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를 따라 식료품 가게에 갔습니다. 어머니가 물건을 사는 동안 카네기는 앵두 상자 앞에 서서 가만히 앵두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식료품 주인 할아버지가 너 앵두가 먹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한줌 집어 먹으렴.”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카네기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어머니도 할아버지가 허락하셨으니 어서 한 줌 집어보렴.”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카네기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주인은 기특하다는 듯이 한 움큼 앵두를 집어 카네기에게 주었습니다. 그제야 카네기는 할아버지 감사합니다.”고 인사를 드리고 어머니와 함께 가게 문을 나섰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얘야, 왜 처음에는 앵두를 집지 않고 가만히 있었니?” 카네기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손이 내손 보다 크니까요!” 이것이 바로 가장 단순한 참고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가장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권면하십니다. “길이 참으라!”고 말입니다. 어느 덧 가정의 달 5월도 오늘을 마지막 주일로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부가 사랑하고 부모자식이 사랑하며 자녀들이 서로 우애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지난 주일에는 그 방법 중의 하나가 지혜라고 배웠습니다. 오늘도 복된 가정을 만들어 가는 소중한 비밀 하나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래 참는 인내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대한민국 백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참는 것을 잘 하지 못합니다. 길게 줄을 서 있는 것을 싫어하고 우물가에서 숭늉을 달라고 할 절도로 성미가 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급한 성미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단순하게 가정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인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기 위해서라도 조급한 마음을 접고 길이 참고 기다리는 인내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정의 달 5월을 마지막 보내면서 온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방도로서의 인내에 관해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듣기만 하지 말고 실천하고 순종하여 길이 참고 기다리며 가정의 행복을 만들어 내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인내로 언어의 조급함을 극복해야 합니다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20:7-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 모세가 그 명대로 여호와의 앞에서 지팡이를 취하니라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사랑은 말로부터 시작됩니다. 말은 곧 마음의 생각을 상대에게 표현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들은 말로 인해 수많은 관계를 파탄 내고 결국은 사랑에서 멀어지는 우를 범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을 지혜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야고보도 오늘 우리들의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아시고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곧 완전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그리고 가정의 평화를 기대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말을 가볍게 하지 말고 말을 더디 할 수 있도록 말을 참는 인내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말은 한 번 입에서 나가버리면 다시는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이요, 그 말은 이미 상대의 마음을 찌르고 상처를 주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입에 재갈을 물리고 말을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성경에 기록된 숱한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인정하신 인물이었습니다.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한 모세도 반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에서 떠나 인간의 추한 모습으로 공격하자 그만 화를 참지 못하고 어리석은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광야에 이르러 가데스에서 머물렀으나 그곳에 물이 없으므로 격하게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공격하였습니다.

(20:2-5)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가로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 뻔 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원망하고 다투며 달려드니 그렇게도 온유하였던 모세도 화를 내며 그들 앞에 서서 외쳤습니다.

(20:10-11)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얼핏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이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난 것 같지만 이 사건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자기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세도 사람인지라도 그렇게도 반복적으로 자신을 원망하고 대항하며 달려들자 그만이야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채 급히 말하고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은 결코 모세의 그와 같은 조급함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시고 말았습니다.

(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모세는 무려 40년 동안이나 메마른 광야에서 말 안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왔으나 그렇게도 소원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끔찍한 비극이 모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집안이 다 편하게 될 텐데 순간을 참지 못하고 내 뱉은 마음에도 없는 말 한마디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사랑이 식어지고 관계가 깨지는 그런 경우를 숱하게도 많이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과 미래를 위해서 오늘 우리는 말을 참고 더디게 하는 지혜를 터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인내로 고난과 고통의 때를 견뎌내야 합니다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사도 야고보는 오늘 우리들이 인내하여야 함을 교훈하기 위해 욥의 인내를 샘플로 들고 있습니다. 욥은 우리들이 익히 잘 아는 대로 하루아침에 10남매를 다 잃고 모든 재산 또한 다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충격 그 자체입니다. 인간이 신이 아니라고 표현할 때 거기엔 인내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을는지 몰라도 한 순간에 10남매가 다 죽어버렸는데 참을 수 있는 아버지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난 주간 텍사스에서 일어났던 초등학교 총기 사건이 보여주는 끔찍한 비극만 보아도 욥과 같은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공감하게 됩니다.

[미국 텍사스주() 유밸디의 롭 초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해 학생 19명과 교사 2, 총격범 등 총 22명이 숨진 가운데 사고 후 숨진 교사의 남편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충격을 더하고 있다.

27(현지시간) AFP·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이번 총기 난사 사건으로 사망한 4학년 교사 이르마 가르시아의 남편 조 가르시아가 전날 심장마비로 숨졌다. 조는 이르마의 추모비에 꽃을 놓고 집으로 돌아온 뒤 숨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르마의 사촌 데브라 오스틴은 전날 고펀드미(Gofundme·미국의 영리 목적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를 통해 "조가 오늘(26) 아침 의료 응급 상황으로 비극적이게 세상을 떠났다""이르마를 잃은 뒤 찾아온 찢어질듯 한 슬픔이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이르마의 조카라고 밝힌 존 마르티네즈도 자신의 트위터에 "고모의 남편이 슬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매우 가슴이 아프고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적었다.

앞서 총격범 살바도르 라모스(18)는 지난 24일 롭 초등학교에 침입해 학생과 교사 등에게 총격을 가했다. 이 총격으로 학생 19명과 교사 2명이 숨졌고, 라모스도 국경경비대원들과 대치 중 총을 맞아 사망했다.

23년 동안 교편을 잡아 온 이르마는 이 사건으로 숨진 두 명의 교사 중 한 명이다. 슬하에 4명의 자녀를 둔 가르시아는 사건 현장에서 자신의 몸을 내던지며 학생들을 보호한 것으로 전해졌다.](2022527일자 시애틀N에서 발췌)

교사 이르마의 남편은 아내를 잃은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채 슬하에 4명의 자녀들을 고아로 남겨둔 채 이틀 만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갑자기 닥친 고통이 그 얼마나 충격이 되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욥은 10남매를 한 순간에 다 잃어버리고도 차분하게 인내하고 참아내며 하나님께 입술로라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하니 과연 성경에 샘플로 등장할 만한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1:20-22)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도 무섭도록 고통을 참아낼 수 있었을까요? 위에 인용한 말씀처럼 욥은 믿음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고 주신 자도 취하시는 자도 다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확고한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가족들과 함께 하는 사랑을 배워야 하겠고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살다보면 나와 같지 않은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만나기 마련입니다. 그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 또한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앞에 보이는 고통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세와 사랑을 기대하며 사람을 보지 말고 그 사람 뒤에 서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길이 참는 인내로서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아 누려야 하겠습니다. 욥은 그렇게도 살인적인 인내로 하나님을 붙들더니 끝내는 기적 같은 축복을 받아 인류의 아름다운 귀감이 되었습니다.

(42:12-15)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세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40대 여성이 발달장애를 앓던 아들과 함께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투신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24일 경찰과 소방 등에 따르면 전날 오후 540분께 성동구의 한 아파트 화단에서 A(43)와 아들 B(6)군이 추락한 채 발견됐다.

경비원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원이 모자를 인근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두 사람은 모두 숨졌다. 당시 A씨의 남편은 다른 자녀의 학원을 데려다주기 위해 외출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에서 유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A씨는 B군을 기르며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동구에 따르면 B군은 관내 복지관에서 발달장애 재활 서비스를 받은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A씨 가정은 기초생활수급자나 최상위계층은 아니었고, 따로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중앙일보 524일자 신문에서 발췌)

이처럼 고통의 때를 길이 참고 이겨내지 못하게 되면 자신에게도 비극이지만 남은 가족들에게도 평생을 두고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나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을 위해서도 고통과 고난을 길이 참고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인내로서 사랑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삼상24:1-7)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 염소 바위로 갈새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마지막 때의 현상 중에 하나가 사람들의 가슴에서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인간관계를 연결해 주는 연골과 같은 역할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접착제와 같이 사람과 사람을 붙여주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식어지면 풀이 떨어진 신발과 같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텍사스의 초등학교 총기사고의 범인은 이제 겨우 18살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순수하고 풋풋하게 사랑을 느끼며 인생을 시작하는 그런 아름다운 나이인데도 그의 가슴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집에서 할머니를 먼저 총으로 쏘아죽이고 아무 연고도 없는 초등학교에 가서 그와 같은 끔찍한 살인을 저질러 놓았던 것입니다. 가슴에 사랑이 메말라버린 한 인간의 비참한 단면을 만 천하에 보여준 사건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는 바로 오래 참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사랑의 롤모델은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다음의 몇 성경 구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엿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6:48-50)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23:33-37)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성경 말씀의 몇 구절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들은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실천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와 같은 사랑은 저절로 나온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길이 참으시고 끝까지 인내하심으로 만들어진 놀라운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내의 왕이시며 이 세상 그 누구도 감히 함께 할 수 없는 놀라운 참으심으로 이처럼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라서 자신의 제자가 자신을 배신하고 입을 맞추며 가증스럽게 다가온 그런 파렴치한을 친구라고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자신을 짐승처럼 끌고 가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는 살인마들을 향해 물과 피를 다 쏟으며 고통의 극한 상황에서 그와 같은 잔인한 살인마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예수님의 사랑의 배후에는 오늘 우리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예수님만의 인내가 있었던 것입니다.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십자가도 참고 이겨내실 만큼 예수님은 길이 참으시는 인내를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그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과 행복한 삶을 소원하는 오늘 우리들에게 이처럼 놀라운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불행은 오직 참지 못하는 급한 성질로 말미암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오늘 우리들에게 길이 참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자신들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라도 길이 참고 사랑을 만들어 내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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