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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계 (2022년 6월 5일 주일낮설교)

인간의 한계

 

6. 5, 2022

:출애굽기 2:  1  -  1 0

:崔仁根牧師

 

어머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半身不隨(반신부수)이시며 늙으신 할머니가 간신히 끼니를 마련해 주는 비참한 가정에서 장남으로 가정의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4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는 동생을 일류대학에 보내며 최선을 다해 가족들을 부양해 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대학이라는 곳을 가야만 이 사회에서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현실을 깨닫고 서른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대학을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습니다. 수백 군데에 이력서를 넣었으나 단 한 곳에서도 서류합격을 하지 못해 면접을 한 번도 보지를 못한 힘겨운 나날을 초조하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한 곳에서 서류합격이 되었으니 면접을 보러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20년 전에 아버지가 입었던 양복을 세탁소에서 깨끗이 빨아 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면접장에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할아버지 한 분이 얼굴을 땅에 대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런 할아버지에게 시선조차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얼른 다가가 할아버지, 이렇게 계시면 입이 돌아가요, 댁은 어디신데 여기에 이렇게 쓰러져 계십니까?”하면서 흔들어 깨웠습니다. 간신히 눈을 뜬 그는 배가 고파, 밥 밥을 주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얼른 편의점을 찾아서 먹을 것을 구해 와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편의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호주머니에는 면접을 보러 갈 차비밖에 없었습니다. 순간 그는 망설였습니다. “이걸 어떻게 하여야 하나?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당장 빵과 물을 사야하고 자신을 생각하면 천신만고 끝에 얻은 면접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는 절박한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생명이 먼저이지,’ 하면서 그는 주머니를 털어 빵과 물을 사서 할아버지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얼른 경찰에다 신고하고 그 할아버지를 인계한 후 걸어서 면접장까지 정신없이 달려갔으나 이미 20분이나 늦어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회사에서는 늦었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그는 1년 가까이 백수생활을 더 하여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모든 사람들이 선호하는 좋은 회사로부터 인턴을 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최선을 다하여서 인턴을 하던 중 그곳에서 그는 뜻밖에도 노숙자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그 회사의 회장이었고 그의 큰 아들이 그 회사를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할아버지는 그 청년을 단번에 알아보았고 그 회사에 특채가 되어 최고의 연봉을 받는 정규직 사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귀한 은인이라며 40평짜리 아파트도 주어서 할머니와 아버지를 편안하게 모시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빵과 물을 대접한 것이 전부였던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그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와 그 한계를 극복하는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확대하여 우리들의 인생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입해 본다면 과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온통 푸른 옷으로 갈아입고 싱그럽게 피어나는 신록의 달 6월 첫 주일을 맞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멋들어지게 승리할 수 있도록 복된 말씀에 귀를 모아보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들을 버려야 하는 부모의 한계

(2:2-3)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우리들이 성경 역사를 통해서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으로 인해 애굽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고 요셉과 바로의 특혜로 많은 혜택을 누리며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잘 살아왔습니다. 타국에서 거대한 민족을 형성하였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역사에서 영원한 축복과 평안은 없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도 소중하였던 요셉은 죽었고 그 요셉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그렇게도 호의적이었던 왕도 죽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니 모든 것이 변하였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악한 왕이 일어나 번성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가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8-11)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핍박은 결국 극에 달하게 되었고 누구든지 아들을 낳으면 무조건 죽이도록 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1:15-16)

애굽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극한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부모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산파의 도움으로 아들이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은 그 아들을 숨기면서 키워낼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발각 되는 날에는 산파는 물론이고 그 부모까지도 죽임을 당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그 아들을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갈 상자를 만들고 역청과 나무진을 바른 다음 모세를 거기에 담아 강으로 떠내려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행여나 누군가가 그 아들을 주워서 키워주기를 바라는 기적만을 바라면서 말입니다. 하늘 아래 이보다 더 기가 막힌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처절하게 맛보게 됩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 하나도 지켜주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의 한계를 말입니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초반에는 계속해서 우리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다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로 인해 결국은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소망 없는 죄인임을 인식시켜 생명의 주님께로 인도하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도 출애굽기를 통하여서 연약한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지혜를 터득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이 결코 우연이거나 헛되지 않는 것은 우리들이 상상도 하지 못한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을 낳으면 다 죽이라고 명령한 그 바로 왕의 딸이 그 아이를 거두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이의 유모로 모세의 친어머니가 간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5-10)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모세는 이렇게도 기적 같이 친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자라게 되었고 그 친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젖을 먹이며 바로 궁의 삯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 민족에게 내리는 살벌한 바로 왕의 정치에 비하면 이는 기적 중의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의 뜻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엄청난 능력으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살인자가 되어 도망가야 했던 모세의 한계

(2:11-12)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드디어 그 모세가 장성하여 민족의식을 발휘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동족이 바로의 치하에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고 있는 현실을 그는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민족을 돕고 그 무서운 고통에서 해방시키고자 마음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이 세상 그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의 형제를 애굽 사람이 공격하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한창 청년의 울분이 가득하였던 모세는 그것을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주변을 살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달려가 자신의 형제를 공격하는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입니다. 분명히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였었으나 모세의 이 끔찍한 살인은 결국 바로 왕에게까지 알려지고 말았습니다.

(2: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의 한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는 비록 기적 같이 바로의 궁에서 文武(문무)를 익히며 바로의 왕자로 손색없이 잘 자라났지만 자신의 형제와 민족을 구원하여 내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자신의 같은 민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답답한 나머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며 바로잡으려고 하였지만 모세의 충정은 같은 민족들인 형제들에게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2:13-14)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제아무리 잘났다고 스스로 자부하여도 결국 같은 민족 하나 다스릴 수 없고 더 나아가서 민족은커녕 내가 낳은 자식 하나도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이요 인간된 삶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도망갔던 모세가 무려 4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진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와 대비 되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4:10-12)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세와 같이 모든 것에 한계를 안고 연약하게 살아가는 미약한 존재들이지만 우리들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부족함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들의 연약함을 채우시고 풍성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그 하나님 품으로 찾아드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의 죽음도 막지 못했던 바로의 한계

(11:5-7)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그렇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핍박을 가하고 생명을 빼앗던 절대적인 권세를 가졌던 바로 왕도 예외 없이 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해야만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열 번째 재앙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이나 종살이 하였던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또한 이처럼 바로의 맏아들과 애굽의 모든 초태생들이 다 죽는 재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왕이 되었든 부모가 되었든 왕의 왕자가 되었든지 간에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한계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출애굽 사건은 이처럼 명명백백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인간의 연약한 한계를 오히려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하시는 계기로 삼으셨던 것을 또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였습니다. 바로가 아들이 태어나면 무조건 다 죽이라고 명령할 만큼 기세등등하였지만 결국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 앞에서 항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인간은 제아무리 잘나도 한계를 지닌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이와 같은 한계를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군 다윗이 그토록 귀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37:4-6)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와 같은 성경의 진리와 인생의 경험을 통하여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믿음이 절실함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누릴 수가 있고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그 하나님께서 또한 취하시기도 하신다는 사실을 욥과 같이 깨달아 一喜一悲(일희일비)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만 바라고 기대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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