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눈물 (2022년 6월 19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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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9 June 2022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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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눈물
아버지의 날
6. 19, 2022
本文:사도행전3:1-10
說敎:崔仁根牧師
[코로나 장기화 영향으로 노인학대 사례가 증가하는 가운데 지난해 학대 가해자가 배우자인 경우가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그간 조사에서는 가해자 유형 중에서 아들이 가장 많았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바뀌었다.
보건복지부와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이 6월 15일 노인학대 예방의 날을 맞아 펴낸 ‘2021 노인학대 현황보고서’를 보면, 작년 노인학대 가해자(학대 행위자) 8423건 중 배우자가 2455건(29.1%)으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은 아들 2287건(27.2%), 요양시설 등 기관 2170건(25.8%), 딸 627건(7.4%) 등이다. 배우자에 의한 노인학대가 가장 많아진 것은 2005년 노인학대현황 통계를 작성한 이래 처음이다.
이윤신 복지부 노인정책과장은 “자녀와 동거하는 가구보다 노인 부부 가구가 늘어난 영향”이라며 “가구 형태가 변화하는 부분이 가정 내 노인학대 가해자 변화에 큰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복지부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노인부부 가구는 2014년 44.5%에서 2020년 58.4%로 늘어났는데 동기간 자녀동거 가구는 28.4%에서 20.1%로 감소했다. 노인학대가 발생한 가구 형태는 노인부부로만 이뤄진 가구가 34.4%로 가장 많고 자녀 동거가구가 31.2%, 노인 단독가구가 17.6%로 나타났다.(2022년 6월 15일자 조선일보에서 발췌)
젊은 날에는 온 몸이 부서지도록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헌신하고 늙어서는 소외를 당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그 사람이 바로 오늘날의 아버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소 마음에 들지 않고 미워도 돈을 벌어오니까 적당하게 함께 살아왔던 부인들도 늙고 가치가 떨어지게 되면 노골적으로 학대하고 무시하는 것이 오늘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자식들은 더 더군다나 능력도 없고 잔소리나 하는 아버지에 대해 인내하며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도 또한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이런 와중에 오늘 우리는 2022년 아버지의 날을 맞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착한 자녀들은 아버지의 소중함을 깨닫고 섬겨보려고 돌아보지만 이미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오늘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이웃들과 하나님께 대신 갚아드리며 사람다운 자식들이 되고 신자가 될 수 있도록 귀한 말씀을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슴으로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사랑을 회복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리고 아버지에게는 따뜻한 사랑으로 보답하는 아름다운 자녀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의 눈물
(창27:30-36)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비에게로 가지고 가서 가로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조창인씨가 쓴 [가시고기]라는 장편소설이 있습니다. 젊어서 이혼하고 혼자서 아들을 키우고 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쓴 내용입니다. 그는 시인으로 자신의 목표를 이루어왔지만 가난하여 늘 아들에게 잘해주지 못함이 가슴에 응어리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렇게도 분신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아들이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계속 되는 항암으로 머리는 다 빠져버렸고 날마다 메말라 가는 아들을 보는 것은 자신이 아픈 것보다 훨씬 더 아팠습니다. 친신만고 끝에 골수이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치료비였습니다. 그는 아무도 몰래 친구 의사의 도움을 받아 신장을 팔아 수술비를 마련하려고 건강검진을 받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신의 몸속에 이미 암이 다 퍼져 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할 수 없이 그는 이혼한 아내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자신은 시골로 내려가 쓸쓸히 혼자서 죽어가는 이야기가 간단한 이 책의 줄거리입니다. 원래 가시고기는 알을 낳고 사라져버린 엄마를 대신하여 아버지가 부화를 시키고 새끼들이 나올 때까지 지킵니다. 그러다 새끼가 나오면 사냥할 줄 모르는 어린 새끼들에게 아버지가 자신의 살을 뜯어먹도록 내어주고 결국에는 가시만 남은 채 죽어가는 그런 물고기입니다. 이처럼 가시고기는 이 땅의 아버지의 사랑을 대신하는 부성의 대명사처럼 불리우고 있습니다.
도대체 아버지란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21세기 오늘날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어떤 의미로 불리우고 있을까요? 오늘 소개해 드릴 성경 속의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한결같이 그 말년이 눈물뿐인 슬픈 존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함께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대비하며 깊은 생각과 변화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먼저 야곱의 아버지 이삭의 모습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삭은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자신의 남은 삶이 얼마 안 되는 것은 직감한 그는 맏아들 에서에게 축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아챈 어머니와 막내가 형을 대신하여 축복 받을 수 있도록 계략을 꾸미고 야곱과 함께 눈이 어두운 이삭의 약점을 이용하여 형이 사냥하고 있는 틈을 노려 축복을 가로채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을 기대하며 정성을 다해 사냥하고 요리하여 아버지 앞에 나타났을 때 비로소 이삭은 야곱에게 속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에서는 자신의 약점을 이용하여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자신을 속인 야곱을 잡아 죽이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이것을 눈치 챈 어머니는 야곱을 우선 멀리 친정집으로 피신시키게 되는데 이것이 야곱과의 마지막 이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야곱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죽기 전에 다시는 그 야곱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 이삭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늙어서 눈까지 어두워진 자신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을 속인 야곱, 그를 그렇게 되도록 뒤에서 함께 조정을 한 그의 어머니, 이것을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살기가 등등해진 에서를 바라보는 이삭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였을까요? 아버지로서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둘 밖에 없는 아들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하나는 도망을 가고 다른 하나는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이런 비참한 상황을 해결조차 못한 채 죽어가야 했던 아버지 이삭을 상상해 본다며 결코 행복한 아버지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요즘도 자식이 둘만 있다면 적다고 할 것인데 완전 씨족사회였던 그 당시에 둘뿐이라고 하면 너무나도 쓸쓸할 것인데 그나마 임종 시에 막내아들은 보지도 못하고 죽어야 했으니 이삭의 심정이 어떠했을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정녕 슬픈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순간을 맞았을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아버지들은 이삭과 같은 아버지가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라헬의 아버지 라반의 눈물
(창31:14-18)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들에게 태우고 그 얻은바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 아비 이삭에게로 가려할새
(창31:19-20)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
(창31:34-35)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약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얻지 못하매 라헬이 그 아비에게 이르되 마침 경수가 나므로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얻지 못한지라
라반은 형을 피해 도망 왔던 야곱을 맞았던 야곱의 외삼촌이었습니다. 라반도 예외 없이 자식들로부터 결국에는 외면당하고 쓸쓸하게 생의 마지막을 맞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뜻밖에 나타난 야곱을 통해 일손이 부족했던 그는 원 없이 야곱을 이용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근친결혼이 정당했던 당시에 남도 아닌 누이의 아들에게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시집보내게 되어 내심 많이 든든하고 기뻤을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집간 딸들이 자신에게 한 처사를 보고 그는 적잖이 실망하고 인생무상을 절감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사위가 종래는 상상도 하지 못할 방법으로 자신의 양들을 도적질하고 자신도 모르게 야반도주를 하여 달아난 사위보다 두 딸들이 더 미웠을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도 아닌 딸들 모두가 평생 낳고 키우고 성장시켜 준 아버지에게 반감을 갖고 사위와 함께 야반도주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야반도주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소중한 드라빔까지도 훔쳐 갔기 때문에 그 분노와 실망은 더욱 더 컸을 것입니다. 라반이 그 드라빔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으면 나중에 야반도주한 그들을 몇날 며칠을 추적한 후에 찾은 것이 바로 그 드라빔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아버지를 빤히 알면서도 딸 라헬은 그 드라빔을 깔고 앉아서 “지금은 달거리를 하고 있어서 일어날 수 없어요.”라며 거짓말까지 하면서 숨겼으니 역시 딸은 도적년(?)이란 옛말이 그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야반도주하기 전 야곱이 “나를 선택하든지, 너희들의 아버지를 선택하든지 하라.”고 했을 때 그들은 미련 없이 아버지를 버리고 남편 야곱을 선택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딸들이 아버지이신 라반보다 남편인 야곱을 더 선호하고 선택하면서 남긴 말이 더 더욱 충격적입니다.
(창31:14-18)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들에게 태우고 그 얻은바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 아비 이삭에게로 가려할새
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정도면 이 땅의 아버지는 과연 가시고기와 같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희생만을 남긴 채 혼자 쓸쓸히 사라져야 하는 존재임을 재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아버지 된 라반의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의 눈물
(창37:31-35)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수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 채색 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창47: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은 훗날 애굽으로 이민 가서 바로 앞에 섰을 때 참으로 놀라운 한 마디의 말을 남겼습니다.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모든 인생이 다 그렇지만 야곱이야말로 보통 사람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나왔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낳아 주었던 요셉을 그는 특이하게도 더 많이 사랑하였습니다. 배다른 열 명의 아들들이 노골적으로 싫어하고 질투하였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랬던 그 아들은 끝내는 배다른 열 아들들이 아버지 야곱을 속이고 남의 나라 애굽에 팔아버렸으니 이 소식을 들었던 야곱의 심정이 어떠하였을는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31장에 고스란히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 그 누구의 위로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요셉의 동생을 낳다가 죽었던 것도 원통한데 그 아내가 낳아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무슨 말로 그 마음의 고통이 녹아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결국 자신이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것처럼 자기 자신도 자식들에게 속임을 당하는 슬픈 아버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아버지로서 형언하기 어려운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사랑하는 자식이 먼저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살아가는 미래에 이런 극단적인 슬픔을 경험하지 않기를 주님의 고귀하신 이름으로 먼저 축원 드립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 대한 사랑과 슬픔을 생생하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비록 그 아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있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지만 부하들에게 그 아들 압살롬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부탁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압은 다윗의 그와 같은 부탁을 무시하고 압살롬을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그때 다윗은 참으로 많이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압살롬에 대한 마음의 상처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삼하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참으로 다윗의 심정을 우리는 이 말씀으로 미루어 감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을 죽인 요압은 이와 같은 아버지의 마음을 송두리째 짓밟아버리고 상처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잔인한 말을 하였습니다.
(삼하19:4-8)
왕이 얼굴을 가리우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하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신복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서 왕의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 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혹이 모든 백성에게 고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시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소중한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요압의 말도 전혀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줄 알고 상황에 따라 아픔을 공유할 줄 아는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비록 당시에는 다윗이 길이 참고 인내하였지만 아들 솔로몬이 왕 위에 올랐을 때 요압이 어떻게 비참한 말로를 맞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막말을 하며 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권능자이고 인간은 늙어가고 죽어가야 하는 한계를 안고 사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오늘 우리는 아버지의 최악의 고통은 야곱과 다윗처럼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다른 아들들에 의해 속임을 당하여 당하는 고통이나 다윗과 같이 믿었던 신하로 인해 당하는 고통이라면 아마도 강도가 더 컸을 것입니다. 물론 지엽적이기는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이처럼 위대한 인물들일지라도 자식들로부터 행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바라볼 때 개인주의로 팽배해진 21세기에 과연 아버지들은 자식들로부터 과연 어떠한 대우를 받으며 남은 삶을 복되게 살아갈 수 있을는지 회의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고 자식들은 아버지를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랑하는 영적인 변화를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아버지를 잘 섬기고 축복을 받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