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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 된 것은! (2022년 7월 3일 주일낮설교)

나의 나 된 것은!

 

7. 3, 2022

:고린도전서15 : 1    -  1 0

:崔仁根

 

어느 심리학자가 특이한 실험을 하습니다. 어느 동네의 한 구역을 택해서 집집마다 매일 100달러씩 갖다놓은 후 그 결과를 관찰하기로 한 것입니다. 실험 첫날 사람들은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닌가 의아해하면서도 슬그머니 돈을 집어갔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100달러씩 집 앞에 놓고 가는 사람 이야기로 동네가 떠들썩했습니다.

둘째 주쯤 되자 현관 앞에 나와 돈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셋째 주쯤 되자 돈을 받는 것을 이상해 하지 않았고 넷째주가 되었을 때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돈을 집어갔습니다. 실험기간인 한 달이 지나자 학자는 돈을 집 앞에 놓지 않고 그냥 동네를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매우 불쾌해 하며 왜 오늘은 안 주고 가느냐?”고 따졌습니다.

 

사람들은 이유 없이 베풀었던 은혜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고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주지 않는 것을 서운해 하고 불쾌해 했던 것입니다. 그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받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최고의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는 은혜라는 말을 성경 인물들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급기야 선포하였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입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그렇게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였던 그의 진정한 믿음을 찾아보고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화답할 줄 아는 생활의 믿음을 새롭게 발견하는 은총을 누리시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나의 참 모습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고전15:8-9)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여기에 밝히 기록하여 놓은 것처럼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 하였고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도로 칭함을 받기에 담당치 못할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끔찍한 살인마였으며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을 말로 다할 수 없이 핍박했던 악한 자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악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너무나도 잘났기 때문이었습니다.

(3: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는 말씀과 같이 그는 스스로도 인정하는바 자랑할 것이 많은 너무나도 잘 난 사람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학문을 가말리엘 문하에서 받았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젊고 패기가 넘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은 자아도취에 빠져 살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던 성경에 능통한 스데반이 순교의 제물이 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악한 사울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그 많은 악한 유대인들 중에서도 증인의 대장이 될 만큼 악을 행하는 앞잡이 노릇을 하였던 것입니다.

(7:57-59)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한 번 이렇게 피 맛을 본 그는 다른 신자들도 다 잡아들이고 핍박하고 죽이기 위해 솔선수범하여 일어섰기 때문입니다.

(9: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던 자연인 사울의 본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모든 자신의 연약하고 부족했던 지난날들이 더 크고 악하게 클로즈업 되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딤후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사도 바울이 사울에서부터 변화된 것은 우리들의 필설로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납니다. 사도 바울이 간단하게, “나의 나 된 것은이라고 표현하였지만 이 말 속에 숨은 그 깊이는 우리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렇게도 잔인하고 악하였던 그가 전무후무한 대사도로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던 사람이 몇이나 있나 살펴본다면 사도 바울의 변화와 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손수건만 얹어도 모든 병이 다 떠나갈 정도였으니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실로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귀한 신약 성경의 절반을 기록하여 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 우리는 그의 업적을 감히 다 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스스로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굳이 자랑하고 싶어 죽겠다면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렇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잘 익은 곡식이 머리를 숙이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한 신자들은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은 낮아지고 하나님만 높여드리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지난날의 자신을 돌 아 본다면 지금 그 어떤 위치에 서 있다고 할지라도 자랑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모든 공로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왕이었던 다윗도 자신의 업적과 권세를 자랑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호와를 자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던 것입니다.

(34:1-2)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오늘의 자신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 하나님을 자랑하여야 하겠습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 스스로가 잘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우리들을 향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교훈하고 계십니다.

(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성도들은 사도 바울과 같이 끝까지 자신을 낮추고 은혜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잘 익은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사도 바울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되돌려드렸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모든 것들은 아마 성경에 등장하는 그 어떤 인물들보다 더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렇게도 많이 받았던 그 놀라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사사로운 자신의 삶은 온전히 접고 자신의 모든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려드렸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을까봐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실로 자랑할 만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과감하게 다 버렸습니다.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가는 장가조차도 가지 않고 홀로 하나님을 섬긴 사도로서도 유명합니다. 그가 그렇게 결혼하지 않은 이유를 보면 그가 얼마나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였는지를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고전7:32-35)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노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왜 사도 바울이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시사 사도로 세워주셨으니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아니하고 온전히 하나님만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강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과 같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있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은근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당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결혼마저도 모든 은혜로 복을 주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도록 하지 않았다면 이는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놀라운 결단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숨길 수 없는 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전7:6-8)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았고 더 적극적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았던 위대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세상을 헤치고 살아나가며 가족들을 돌보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만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한다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상식적으로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강하게 경고를 하시고 계십니다.

(고후6:1-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앞서 심리학자의 실험결과를 말씀 드렸듯이 인간은 참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욕심에 젖어 사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자식을 낳고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하게 잘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죽어 천국으로 갈 진정한 성도라면 하나님의 이와 같은 은혜를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귀한 은총으로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다윗 왕은 다음과 같은 사건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삼상25:4-14)

다윗이 광야에 있어서 나발이 자기 양털을 깎는다 함을 들은지라 다윗이 이에 열 소년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 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앙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다윗의 소년들이 가서 다윗의 이름으로 이 모든 말을 나발에게 고하기를 마치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이에 다윗의 소년들이 돌이켜 자기 길로 행하여 돌아와서 이 모든 말로 그에게 고하매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나발의 양떼를 지켜주었던 다윗과 그 귀한 은혜를 망각한 나발의 모습을 대비해 볼 수가 있습니다. 나발이라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은혜를 베풀어 준 다윗을 보답하기는커녕 오히려 격멸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400명의 용사들을 데리고 직접 그와 같은 악한 자를 응징하기 위해 달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로 인해 다윗의 칼날을 피하기는 하였지만 결국에는 나발이 죽게 됨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손도 대지 아니하였는데 그 많은 재산을 거느리고 오만방자하며 잘 살아가던 나발이 왜 갑자기 죽었을까요?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뜻밖의 놀라운 해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치셨다고 성경이 밝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상25:38)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너무나도 놀랍지 않습니까?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들이 두려움으로 가슴에 새겨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스스로 잘나서 오만하게 되면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치시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탄식하며 이에 대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이것은 우리교회 헌금봉투에 인용되어 있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1불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릴지라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드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믿음이 우리들의 가슴에 살아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은혜의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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