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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축복입니다! (2022년 9월 4일 주일낮설교)

꿈은 축복입니다!

 

9. 4, 2022

:창세기37:5-10

:崔仁根

 

BOYS, BE AMBITIOUS, not for money, not for selfish accomplishment, not for that evanescent thing which men call fame. Be ambitious for attainment of all that a man ought to be.

(젊은이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돈을 위해서도 말고 이기적인 성취를 위해서도 말고, 사람들이 명성이라 부르는 덧없는 것을 위해서도 말고 단지 인간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William Smith Clark.

이 말은 2차 대전 이후 패망한 일본의 젊은이들을 위해 당시 일본에서 선교사 겸 대학의 교수로 헌신하던 윌리엄이 일본을 떠나면서 일본 젊은이들에게 남긴 유명한 명언입니다.

이 종이 교회를 시작하였을 때 특별히 청년, 대학부를 직접 지도하였었는데 가장 많이 강조한 강의의 주제는 이었습니다. 꿈을 가지고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젊은이가 되기를 소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 종이 평소에 자신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삶의 철학이기도 하였습니다. 부산에서 신학대학을 마치고 그대로 신학대학원으로 진학하면 교회에서 등록금도 다 후원해 주고 생활의 터전도 부산에 그대로 있으니 만사가 쉽고 편했지만 부산에서 자라서 부산에서 공부하고 부산에서 목사가 되면 너무나도 시야가 좁을 것 같아 최소한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에서 공부를 하며 견문을 넓혀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기에 아무런 연고도 도움도 없는 서울로 무작정 올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총회신학대학원에서 3년을 공부하고 성적도 좋았고 인기도 좋아서 서울의 모 교회에서 부목사로 오라는 청빙을 받았지만 최소한 한국에 복음을 전해 준 미국에서 공부를 좀 더 하는 것이 미래 목회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아무런 연고도 없고 돈도 없으면서도 무작정 미국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에서도 좋은 교회를 만나 부목사로 인정을 받으며 중고등부를 맡아서 18명이던 중고등부를 60여명으로 성장시키자 교회에서는 인기가 절정에 올랐고 담임목사와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 편안하고 안전한 교회를 떠나 우리 빌립보장로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척 한 달 만에 자체교회를 가지기 위해 교회를 사러 다녔고 그러다가 지금 우리교회의 땅이 나온 것을 보고 무조건 사들였습니다. 당시 우리교회의 땅은 집 6체의 가격으로 개척교회로서는 사기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이 지금 우리교회의 Vision Project의 기초가 되어 1,000억 원대의 꿈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50여 년 동안 목회하면서 이 종이 확실하게 체험하였던 하나의 사실은 하나님 안에서 가지는 선한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서 꿈을 가져야 하고 그 꿈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그리고 믿음의 열매를 확인하는 멋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꿈은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로 이와 같은 꿈을 안고 일어나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요셉이라는 인물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교회를 주신 축복의 달 9월 첫 번째 주일에 이와 같은 요셉의 꿈을 통하여서 우리 모두가 새로운 비전과 꿈을 안고 새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말씀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모쪼록 마음 귀를 기울이시고 귀한 말씀에 큰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입니다

(37:6-7)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37: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신학대학에 다니면서 야무진 꿈을 가지지 않고 그냥 지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는 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공무원이 되거나 대기업에 취직하려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졸업을 하면 목사가 되고 목사가 되면 큰 교회의 당회장이 되는 꿈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요예배가 있는 날이면 많은 신학생들이 순복음교회나 충현교회, 온누리교회, 광림교회, 영락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리며 자신도 나중에 목사가 되면 그렇게 큰 교회를 운영하는 능력 있는 목사가 될 것이라고 야무진 꿈을 다집니다. 하지만 한국이나 미국에서 대형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1% 미만이고 자체 예배당을 가지고 있는 교회도 20%밖에 되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목사들은 대형교회는 고사하고 자체 예배당도 하나 가져보지 못한 채 일생 동안 고생고생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꿈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바로 여기에서 스스로 자신이 가지는 야망을 꿈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자신이 가진 비전이나 야망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가장 잘 이용하는 영물이 바로 사탄 마귀입니다. 방언하기를 소원하는 성도들에게 마귀가 방언을 주는 경우도 있고 대형목회를 꿈꾸는 목사에게 사탄 마귀는 교묘하게 이를 이용하여 마귀의 수단과 방법으로 대형교회로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종은 이와 같은 현상들을 직접 경험하여보았기에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개인적인 문제이고 공개적으로 말씀 드릴 수 없는 문제이기에 이정도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요셉이 가진 꿈은 개인의 야망이나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예시적인 꿈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셉이 가진 꿈의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곡식이 있는데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나머지 형제들의 단은 엎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해와 달과 열 한 별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열 한 형제들인 것입니다. 이 꿈은 나중에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던 형제들은 이 말의 뜻을 전혀 이해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이 보잘 것 없는 저 요셉 앞에서 엎드려질 일은 꿈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 야곱만큼은 이 놀라운 꿈의 이야기를 무시하지 아니하고 가슴에 새겨두었습니다

(37:10-11)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요셉을 장차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이처럼 놀라운 꿈을 통하여서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꾼 꿈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당할 고난과 역경을 이와 같은 꿈을 통하여 미리 보여주심으로 그로 하여금 절망하지 아니하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앞날을 미리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塞翁之馬(새옹지마)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한 치의 앞날도 예측할 수 없이 변화무상한 것이 인생이니 그때그때마다 一喜一悲(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뜻인 것입니다. 지금 잘나도 내일 망할 수 있고 오늘 망하여도 내일 흥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은 육신적인 성공과 실패로 교만하거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가슴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원대한 꿈을 안고 묵묵히 그 꿈을 바라보며 쫓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숱하게도 많은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37: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37:11)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37:18-20)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요셉은 결국 그가 꾼 꿈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앞서 인용해 드린 세 곳의 말씀들은 한결 같이 남도 아닌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죽이는 악한 일을 자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이 요셉을 학대하고 죽여 버리면 그가 말하던 꿈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자기가 꾼 꿈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게 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축복인 동시에 고난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도 꿈을 안고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 도와주고 격려해 주고 함께 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종도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갈 때 저를 사랑하던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과 제자들은 저를 미워하였습니다. 같이 있자고 부탁하는 사랑하는 마음이 끝내 간다고 하니 미움으로 바뀌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꼭 서울까지 가서 공부해야 훌륭한 목사가 되냐, 그러면 부산에 있는 모든 목사는 다 바보들이냐.”는 등의 야유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부산에서 같이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가서 총신대학원에 시험을 친 사람은 오직 4사람뿐이었고 그 중에서도 한 사람은 떨어졌으니 결국 3사람만 서울로 가게 되었으니 별나기는 별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셉도 꿈을 말하니 형제들이 극렬히 미워하고 시기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꿈을 이루고 가는 길은 실로 험난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이웃들은 남이 잘 되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가 개척하고 3년이 되었을 때 200명 이상 모이는 교회가 되었고 그래서 첫 부흥회를 하는데 선배목사님에게 기도를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배 목사님은 오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당일에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았습니다. 후배가 개척하여 부흥하고 부흥회까지 하니 시기심이 일어나서 기도시간을 펑크내버렸던 것입니다. 목사도 이정도이니 세상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동족들을 떠나 나와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복음을 전하며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고 나가니 다른 사람도 아닌 동족들이 일어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결단하고 일어난 사람이 4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23:12)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남보다 더 나은 꿈을 안고 달려가는 자에게는 그만큼 대적하는 이들도 많으니 더욱 기도하고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강력하신 인도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들이 추진하고 있는 비전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거대한 역사 앞에 사탄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방해하고 막아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방해하고 막아서도 하늘의 하나님은 반듯이 목적하신 바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요셉이었습니다. 이제 요셉이 어떻게 그 꿈을 이루어 가는지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꿈을 이룰 때까지 길이 참고 견뎌내야 합니다

(39:7-10)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실로 이것은 요셉에게 닥친 매우 위중한 유혹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아들여도 엄청 큰 죄를 범하게 되고 어느 날엔가는 보디발에게 들킬 것이니 위험하고 거절하여도 간악한 보디발의 아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후자를 택하였습니다. 똑 같이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할 수 있는 길이 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때때로 이와 같은 進退兩難(진퇴양난)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반드시 사람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을 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요셉은 후자를 택하고 결국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요셉도 어린 사람일진데 참으로 딱하지 않습니까? 남도 아닌 형들로부터 죽임을 당할 뻔 하였고(웅덩이에 던져 넣었는데 마침 그 웅덩이에 물이 없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음), 다시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 와서 바로 살아보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억울한 누명을 쓰고(그것도 남의 주인 집 아내를 겁탈하려 하였다는 파렴치한 죄로)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절망스럽고 억울하였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대로 오직 공의로우신 하나님만 믿고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꿈은 축복인 것입니다. 진정한 꿈이 있는 사람은 결코 환경에 사로잡혀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꿈이 이루어질 날을 기다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윗도 그랬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왕 사울의 칼날을 피하여 오랜 세월 동안 도망 다니며 생명을 부지해야 했던 비참한 현실을 견뎌내야만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 때문에 고결하신 제사장 85명이 사울의 칼날에 죽어나갈 때 그 얼마나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다윗은 처연하게 하나님 앞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23:1-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고 말입니다. 그의 믿음이 얼마나 컸으면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그 와중에도 이처럼 노래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있는 자만이,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주신 그 꿈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자만이 이렇게 당당할 수 있고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감옥에 들어갔던 것이 오히려 복이 되어 그 감옥에서 바로 왕을 만나는 기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같은 옥중에 있었던 죄수 중에 복권된 한 사람이 요셉을 바로 왕에게 소개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41:9-16)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나의 허물을 추억하나이다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징조가 있는 꿈이라 그곳에 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소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고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인에게 해석하더니 그 해석 한대로 되어 나는 복직하고 그는 매여 달렸나이다 이에 바로가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낸 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오니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더라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요셉이 비록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지만 그가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바로 앞에 설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으니 轉禍爲福(전화위복)이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오늘이라는 날에 모든 결말을 다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요셉처럼 꿈을 믿고 묵묵히 참고 견디면 하나님의 때에 모든 것이 변하여 더 잘 될 줄 확신하며 기다리는 인내를 키워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요셉의 꿈은 현실이 되었고 그 꿈대로 요셉의 형들은 요셉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며 용서를 구하는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이 이야기는 참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참고 어떻게 용서하고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정확하게 가르쳐 주는 교과서가 되고 있습니다. 이 귀한 말씀을 거울로 삼고 우리들의 남은 삶은 요셉처럼 승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복된 역사로 가득하시기를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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