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영이십니다! (2022년 10월 30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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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30 October 2022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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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영이십니다!
10. 30, 2022
本文:요한복음4:17-26
說敎:崔仁根牧師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과 천사들과 같이 영으로만 존재하게 하지 않으시고 육신과 영혼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사람들은 영혼과 육신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사탄 마귀와 짝하면서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흙으로 만들어졌던 사람들은 죽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생들은 육신이 없는 영혼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어졌고 그러므로 알려고도 하지 않고 또한 알 수도 없게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친히 존재하시는지 아무런 관심도 지식도 없이 오로지 육신적인 삶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에는 다니면서도 영적인 문제와 영이신 하나님께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교인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으로 우리들의 삶이 육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있음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벧전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고 말입니다. 이는 우리 인간을 형성하고 있는 육신과 영혼을 어떻게 조화를 시키고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함을 가르쳐 주는 귀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결국 이처럼 육신적으로만 살아가던 우리들의 삶이 육신을 내려놓고 영혼을 위해 영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에 관한 기본이 바로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이처럼 귀한 진리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바로 배우고 바로 알아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육신적인 존재입니다
(요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6-18)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다혈질적이고 육신적인 사람을 하나 뽑으라고 한다면 아마 우리는 베드로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을 보고 단숨에 자신의 모든 것들. 즉 부모님이나 배나 그물이나 먹고 사는 소중한 모든 것들을 다 던져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사람이었습니다.
(눅5:6-11)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했던 그가 3년 후에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자신들도 잡혀 죽을 것 같으니 단숨에 그 예수님을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떠나서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와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요21:1-3)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 육신을 가진 인간의 한계입니다. 구차하게 학문적으로 신앙적으로 육신이 무엇이냐 하고 진부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은 끊임없이 변하고 아무리 취하고 누려도 만족함이 없고 결국은 시몬 베드로의 빈 배와 같이 초라하고 허무하게 망하고 마는 것이 바로 육신적인 인생입니다. 목숨 하나 끊어지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허망하게 끝나고 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온 몸으로 경험하였던 베드로가 인생 마지막 순간에 주는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벧전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고 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단순하게 육신적인 존재이기 이전에 우리들의 소중한 삶을 그 육신의 욕심을 위해 영혼을 죽이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이와 같은 육신적인 욕심을 접어주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혼이 잘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그 누구도 육체적인 욕망을 접고 영혼만을 위해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타락하여 그와 같은 소중한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우리들의 시대를 말세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현세를 말세라고 하는 것은 세상 돌아가는 모든 양태가 말세라고 예언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똑 같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딤후3:1-4)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중에서도 밑줄 친 부분을 서로 연계시켜 보십시오. 오늘 우리들은 돈을 부모보다, 친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 친구가 떠납니까? 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납니까? 왜 부모자식 간에 불화가 생깁니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숨길 수 없는 하나가 꼭 끼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돈입니다.
22살에 남편을 잃고 갑자기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남의 식당에 가서 일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안 듣게 하려고, 또 아버지가 없다고 기죽이지 않기 위해서 정말 양말 한 켤레도 새것으로 사신지 못하며 30년이 넘도록 고생고생하며 아들을 의사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장가를 가고 며느리에게 설거지를 시켰다고 아들이 엄마에게 “집사람은 엄마와 같이 천박한 여자가 아니야. 왜 내 아내에게 천박한 여자나 해야 하는 설거지를 시키냐?”고 욕을 하며 엄마를 쫓아내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이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엄마가 너무 구질구질하여 창피하였는데 내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설거지까지 시키냐?”고 방방 뛰면서 이제 더 이상은 이런 엄마랑 같이 살 수 없으니 내 눈 앞에서 사라지라고 아우성치는데 그 엄마는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이는 들었지,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지, 돈은 없지, 이 엄마가 선택할 수박에 없었던 것은 결국 홈래스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들이 한 두 가정에서 나오는 우연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대한민국 보건복지부에서 통계를 냈는데 대한민국 홀래스의 52%가 우울증 환자라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버림받고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악한 사기꾼들에게 사기당하고 빈털터리가 된 그들은 결국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고 그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은 길거리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육신적인 인생이란 받아들이기는 싫지만 바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시 육신적인 인생의 실패를 경험하였던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인생의 허무한 마지막을 남겨두었습니다.
(벧전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고 말입니다. 지금은 모든 푸르던 나뭇잎들이 붉은 색으로 갈아입고 차가운 아스팔트에 나뒹구는 가을입니다. 우리들의 인생도 그렇게도 푸른 꿈이 있었고, 돈도 잘 벌어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가는 것 같지만 가을 낙엽처럼 어느 날엔가는 그 잘나가던 순간도 다 지나가고 차가운 땅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육신이라는 나약한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그렇게 되리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창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이 말씀을 비켜간 사람이 없었고 또 그렇게 비켜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기나긴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육신의 한계를 안고 살아가야 하고 그것조차도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요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은 육신으로 끊임없이 목마름을 해갈하며 살아가는 여인에게 가당치도 않는 하나의 소중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진리였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거느리고 살아가는 최악의 육신이었던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왜 이처럼 엄청난 진리를 가르쳐 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이 예배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비록 육신적으로는 형편없는 지경에 놓여 있을지라도 영혼은 하나님을 찾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고 다시 부활하기 전까지는 모두가 다 죄인이고 그러므로 죄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과 영혼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육신을 넘어 영적으로 기울어지는 진정한 신앙생활을 바로 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영이시다.”고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 또한 영적으로 변화를 덧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영혼을 거스리는 육신을 뛰어넘으라고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벧전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고 말입니다. 이처럼 영혼을 거스리는 육체로는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창4:3-5)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오늘날 우리들도 가인과 같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면 우리들의 의무를 다 한 것으로 착각하는 우리들의 육신적인 판단은 잘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이 이렇듯 영이시라는 말씀에는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하나의 소중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게는 죄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는 조건으로는 그 누가 되었던지 간에 죄인을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구원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에도 죄가 없도록 특별히 간섭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은 우리들을 잉태하게 하신 부모님에게 죄의 DNA가 있기 때문에 태어나는 어린 아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도 아버지가 사람이었다면 죄인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잉태하게 하시고 마리아라는 여인을 단순하게 애기가 태어날 도구로만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는 것입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도 당연히 죄가 없으신 것입니다. 이는 이와 같이 죄가 없으시고 영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려면 오늘 우리들도 필수적으로 죄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원죄와 자범죄로 태어난 우리들이 어떻게 죄가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비법은 오직 하나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가리어주시고 씻어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희생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 된 우리들은 그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의지하며 그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사해주시기를 바라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은 어디든지 안 계시는 곳이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우리 육신은 시공간에 제한을 받지만 영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시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우주에 가득 차 계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우리들을 통치하시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이 한 말씀만 가지고도 책이 몇 권이 나올 정도로 방대하니 짧은 설교시간에는 결코 다 설명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정도로 기본적인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살아나갈 삶의 신앙적인 푯대로 삼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영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요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모든 말씀을 가슴에 품고 묵상해 본다면 진정한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육신대로 살아가는 삶은 결국은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결국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육신대로 살아가면 끊임없이 물을 마시고 남편을 다섯이나 두고 살아도 결국은 만족함이 없고 끝없는 갈급함과 목마름에 허덕이다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비참한 육신적인 삶에도 한 줄기 빛이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숱한 우리들의 죄 문제가 해결 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형벌,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지옥의 고통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니 육신적인 모든 욕망과 가치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수술이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부끄럽기도 하고 때로는 돈이 많이 들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엄청 크기 때문입니다. 또한 수술 후에 수십 가지 약물을 투입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수술은 잘못 될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해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육신적인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말씀만 따라가는 삶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도 따라가야 하는 것은 그것만이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는 영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물을 떠나는 물고기는 100% 죽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떠난 성도들은 결국 죽습니다. 사람이 죽기를 각오한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반대로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우리들에게 물으시고 계십니다.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고 말입니다. 아무리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 않을지라도 한 가지 정확한 사실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