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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원망할까요? (2022년 11월 6일 주일낮설교)

우리는 왜 원망할까요?

11. 6, 2022

:출애굽기17 :  1  -  7

說敎:崔仁根牧師

 

어떤 사람이 자기 가정이 복잡하여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와 말다툼하고, 형제는 서로 싸우고, 친자는 서로 욕하는 상태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집안엔 불평불만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웃집은 친자 2대의 대가족이므로 옥신각신하기 쉬울 텐데도 풍파도 없이 언제나 평안했습니다. 너무나도 감동이 되어 물어봤습니다. “댁은 어떻게 그리 평화스럽습니까?” 그런데 그 대답은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댁은 선한 사람만 한데 모였지만 우리 집은 악한 사람뿐이니까요.” 놀라워하는 얼굴을 보고 그 이웃 사람은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댁에서 가령 실수하여 항아리를 깼다고 합시다. 그러면 즉시 '누구야. 이런 곳에 분재를 놓아둔 놈은?', '당신은 눈뜬 소경이요?'라고 하게 되지요. 모두 저마다 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 내가 그런 곳에 놓아둔 것이 잘못이었어요.', '아뇨, 제가 부주의한 탓이지요.' 하며 모두 자기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집안이 평화롭고 안정이 되지요.” 바로 이것이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휴지통이 많이 놓여 있기 때문에 깨끗하게 정리가 된 역 홀을 보고, “나는 우리 집의 휴지통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가시 돋친 말, 비꼬는 대답, 냉정한 말대꾸, 원망하고 불평하는 소리들, 이러한 가정의 쓰레기 같은 것들을 모두 자기 마음속에 받아 넣어 집안을 깨끗하게 정리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욕을 먹어도 미소로 답하고, 빈정거려도 따뜻하게 웃어주는 인간이 되려고 결심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본능적인 악으로만 가득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서로 위로하거나 용기를 주거나 힘을 합하여 앞에 놓인 문제를 의논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고 와서 물도 마시지 못하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죽어가게 만들었느냐?”, 문자 그대로 가시 돋친 말로 모세를 궁지에 몰아넣고 힘들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목마르면 모세는 목마르지 않을까요? 그들이 힘들면 모세는 힘들지 않을까요? 모세가 그들을 그렇게 고생시키려고 일부러 이끌어 냈을까요?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망할 사람은 망할 짓을 하고 흥할 사람은 흥할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도 예외 없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자신에게 고통이 가하게 되거나 손해를 보게 되면 조금도 선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조금도 참고 견뎌내지 않습니다. 비수같이 내쏘며 원망하며 불평을 쏟아냅니다. 과연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고전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 말입니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매우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원망하게 되면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명망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살아가는 날 동안 원망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멸망당하게 되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왜 끊임없이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오늘은 감사의 달 11월 첫 주일을 맞아 감사를 갉아먹는 이와 같은 원망에 관하여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 귀를 열고 복된 말씀을 들어 축복을 만들어내시기 바랍니다.

힘든 환경이 원망하게 만듭니다

(17:1-3)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오늘 본문에서는 물이 없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는 이야기로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대로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도착하였지만 그곳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 보신 분은 경험하셨겠지만 이스라엘은 아열대지역으로 매우 덥고 숲이나 나무가 거의 없어 매우 건조하고 물이 귀한 곳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광야로 나왔기에 더 더욱 물이 귀하였습니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 마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백만 명이 넘는 대 식구가 마셔야 하니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날씨는 덥고 환경은 열악하고 식구들은 모두 집을 떠나나왔고 거기에다가 양과 염소 등 가축들까지 거닐었으니 상상만 해도 엉망진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에다 생명의 근원인 물조차 없어서 목이 타들어 가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타락한 인생들이 걸어가야 하는 육신적인 삶의 현실입니다.

지난주일 들었던 말씀과 같이 우물가의 여인의 형편이 이것과 비슷합니다. 남자를 다섯이나 바꾸어가며 세상에 빠져 있었던 여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부끄럽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오죽하였으면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한 낮의 오수에 빠져있을 때 조용히 혼자 우물에 물을 길으러 나왔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예수님은 그와 같은 그 여인에게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4:1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육신의 목마름은 이처럼 한두 번으로 끝을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추구하는 모든 만사는 결코 만족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만족이 없는 삶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적인 삶에는 원망과 불평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총기사고나 대형 참사나 사건들은 모두가 다 원망과 불평의 불씨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에 파도가 쉼 없이 일렁이고 있는 것과 같이 육신이 존재하는 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고통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인생 그 자체가 고통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겠습니까?

(5:7)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고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에게 원망과 불평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육신적인 삶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와 같은 육신의 삶을 벗어나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적인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누리며 살아가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나왔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고 세상적인 것으로 해갈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우물가의 여인을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가셨던 이유 또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니고데모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부족함이 없을지라도, 우물가의 여인처럼 마셔도 마셔도 또 다시 목이 마르는 연약한 상황에 놓여있을지라도 한결 같이 예수님이 필요한 육신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다투며 원망하며 어리석게 살아가지 말고 예수님의 품에서 진정한 위로와 평안을 누릴 줄 아는 참 신자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우리들이 아닌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을 원한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원망하게 됩니다

(17:3)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하였던 모든 인물들 중에서 모세처럼 많은 욕을 먹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예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까지 하였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17: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일찍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기주의와 악함을 온 몸으로 체험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은 비록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와 같이 모든 복을 다 누리며 살아가지만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잘 알기에 그 백성을 해방시켜보려고 내심 많이 힘을 썼던 인물이었습니다. 오죽하였으면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겠습니까?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와 같은 모세의 충정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같은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모세가 그들을 말리자 그들은 대뜸 모세를 보고 살인마라고 외치며 모세를 외면하였습니다.

(2:13-14)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분은 하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광야로 이끌어가는 진정한 지도자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세를 원망하고 돌로 치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돌로 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호하게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14:22-23)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고생하는 모세만 가지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대항하다가 다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꼭 맞는 지도자는 여러분들이 죽기 전에는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종들을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대항하는 어리석은 짓은 결코 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종은 스스로 종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원망하게 됩니다

(17: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교회에 다니고 웬만큼만 믿음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곁에 계시는 한 원망하거나 불평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께서 곁에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면 두려움 없이 그 하나님을 시험하며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맛사에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모세를 원망하며 하지 말아야 할 어리석은 죄악에 빠지게 된 배경에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7절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고 또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항상 우리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부소부재(無所不在)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놀라운 진리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의심하다가 원망하고 불평하는 엄청난 죄악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139:7-10)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공기와 같이 언제나 우리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늘 우리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며 어리석게 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다 속일 수 있어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밤낮으로 체험하면서도 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냥 원망하고 시험하다가 광야에서 모조리 죽는 비참한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전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그래도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겠습니까? 아니면 살기 위해서라도 원망과 불평을 제거하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 받으며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선한 결단을 할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이 있으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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