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감사치 않을까요? (2022년 11월 13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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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3 November 2022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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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감사치 않을까요?
11. 13, 2022
本文:로마서1 : 1 8 - 2 3
說敎:崔仁根 牧師
미국 남부 도시의 큰 정신병원의 구급차 운전사로 일해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여전한 일과로 정신병 환자를 병원에 내려놓고 차를 돌리려고 하는데 병원의 위층 창문을 통하여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 좀 보시요!" 운전사는 병실 위를 바라보며 "나를 부르는 겁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병실의 창문에다 상체를 내어 놓은 채 어느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렇소. 그런데 내가 당신에게 한 가지 물어 보아도 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운전사가 "무슨 질문인데요?"라고 하자, "당신은 건강한 정신을 가졌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 본 일이 있어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운전사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15년 동안 이 병원에서 일하며 매일 정신병 환자를 운반하면서도 나의 건강과 정신에 대하여서는 한 번도 감사해 본 일이 없었음을 크게 깨달았습니다." 어떤 분이 태어난 애기의 손가락을 하나씩 세면서 열 손가락을 다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감사를 하지 않는 인생은, 마치 다람쥐가 도토리나무 밑에 떨어진 열매를 주워 먹으면서도 그 도토리가 어디서 온 것인지 위를 한 번도 바라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는 다니지만 원망과 불평은 자주하지만 감사는 하지 않는 교인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과 같이 팬데믹으로 인한 대외활동이 제한되고 사람들과의 교제도 원활하지 못하며 직장까지도 재택근무를 하는 현실에서는 더 더욱 감사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우리는 11월 감사의 달을 맞았고 오늘 그 두 번째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는 감사의 달에만 생각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둘이 아니라 60만 명이나 광야에서 죽이셨고 오늘 우리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하면 좋은 윤리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예외 없이 지키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원망과 불평은 자주 하지만 힘을 다해 감사는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도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인 감사를 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찾아보면서 감사의 달에 걸 맞는 진리를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원인을 알게 되면 해결책도 찾을 수 있으니 마음 귀를 기울이고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육신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창6:1-3)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사람은 육신과 영혼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얼핏 보면 다 건강하고 멀쩡해 보이지만 영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게 되면 육신적인 자로 전락하고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구보다 더 많이 체험하고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육신과 영혼의 차이를 깊이 감지하고 육신적인 삶과 영적인 삶의 구별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인생의 본질을 논한 매우 귀한 진리입니다. 사람은 육신의 조건만 충족되면 행복하게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삶의 본질은 육신적인 만족보다 영적인 변화가 더 소중한 것임을 설명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8장의 내용입니다.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말씀이 실로 무섭습니다. 왜 육신대로 살면 이렇게도 비참하게 죽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육신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감사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요리 문답 제1문이 이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소요리 문답 제1문
문 사람의 사는 목적이 무엇이뇨?
답 사람의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 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 해답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고 말입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들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잊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또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시50: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으로 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는 어리석은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니 그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시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육신적인 삶을 던져버리고 영적인 삶으로 변화를 받아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말세이기 때문입니다
(딤후3:1-3)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지금 우리는 누가 워래도 말세의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이 말세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예언해 두신 말씀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맞아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감사치 않는 삶”이 그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우리들이 특별히 감사를 드려야 하는 대상은 오늘 우리들을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들을 낳으시고 키우시고 교육시켜 주신 부모님이십니다. 그리고 가르치고 옳은 길로 이끌어 주시는 스승님이십니다. 하지만 오늘날 최소한 이 세 대상을 향해 가슴으로 감사를 드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모두가 다 자기가 잘나서 잘 자랐고 잘 배웠고 잘 사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자식을 낳아서 키워보신 분은 알 것입니다. 자식 하나를 낳아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입니다. 특별히 스스로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자동차로 일일이 태워다 주고 태우고 오는 일을 과면 몇 번이나 하였을까요? 그렇게도 비싼 등록금으로 공부를 시키느라 부모의 등골은 휘어지다 못해 골병이 들어가지요. 그런데도 좋은 직장 얻어 잘 살면 그것이 자신이 잘나서 그런 줄 아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전혀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란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죽하였으면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셨겠습니까?
(시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고 말입니다.
지난 주간에 은퇴하신 선배 목사님이 힘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LA에서 친구 내외분이 찾아 오셨는데 호텔 잡아주고 식사대접하고 시애틀을 구경시켜 드리느라고 고생하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자녀들이 다 잘 자라서 의사도 되고 사업도 하여 부모는 목회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도 매우 넉넉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아 물어보았습니다. 목회도 제대로 못하는데 어떻게 넉넉한 노후를 보내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자식들로부터 매달 십일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어려부터 자식들에게 나중에 직장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먼저 드리고 그 다음으로는 부모님께 다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고 가르쳐왔다는 것입니다. 낳고 키우고 공부시키고 직장을 얻을 때까지 부모가 뒷바라지를 해주었으면 그 다음에는 그 부모를 자식들이 섬겨야 한다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아주 편안하고 넉넉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하지만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실은 참으로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오늘 우리들의 주변은 살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뉴스를 통해서 잘 아시겠지만 30대의 딸이 60대의 어머니를 몰래 독극물을 넣은 음식을 먹여 살해한 사건이 며칠 전 한국에서 발생하여 온 국민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화학 액체를 어머니에게 몰래 먹여 살해한 30대 딸이 경찰에 구속됐다.
인천 계양경찰서는 11일 존속살해 혐의로 30대 여성 A씨를 구속했다고 밝혔다.
소병진 인천지법 영장 전담 부장판사는 이날 오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진행한 뒤 “도주할 우려가 있다”며 A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A씨는 지난 9월 인천시 계양구 한 빌라에서 화학 액체를 몰래 먹여 60대 어머니 B씨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B씨는 같은 달 28일 오후 6시 46분쯤 혼자 살던 빌라에서 숨진 채 아들에 의해 발견됐다. 발견 당시 사망한 지 1주일가량 지나 시신 일부가 부패한 상태였다.
A씨는 이날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기 전 “어머니에게 죄송하지 않냐, 보험금은 얼마나 받을 계획이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부검 후 “체내에 남아있는 화학 액체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견을 경찰에 밝혔다. A씨는 살해 후 1주일 동안 어머니 휴대전화로 온 남동생의 문자메시지에 자신이 어머니인 것처럼 답하며 범행을 숨긴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경찰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워 보험금을 받으려고 했다.”며 혐의를 시인했다.
경찰은 지난 9월 20일 전후를 B씨가 사망한 시점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의 보험가입 내역과 A씨의 범행 수법 등을 추가로 조사할 방침이다.](2022년 11월 11일자 조선일보에서 발췌)
이것이 과연 뉴스 사회면에 버젓이 나올 이야기입니까? 자기가 살아가다가 진 빚을 갚기 위해 보험을 가입하고 어머니를 죽여 그 돈으로 빚을 갚으려 하였다는 30대 딸의 이야기라고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장례식장에서는 “어머니가 코로나 백신을 맞으시고 부작용이 일어나 돌아가셨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였다고 하고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러나 이것이 버젓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말세인 것입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에는 사랑도 없고 감사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감사가 없으니 섬기지를 못하게 되고 섬기지 않으니 이처럼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벧전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 채 사탄 마귀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듯 감사가 사라진 영혼은 사탄 마귀와 대적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의 어머니마저도 돈과 바꾸는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금 이와 같은 말세의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적인 삶으로 이 힘든 때를 감사로 회복하는 능력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신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고백하고 그와 같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놀라운 업적을 남겨 놓은 전무후무한 사도였습니다. 자신의 소중한 모든 베네핏들을 배설물과 같이 과감하게 던져버리고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는 채 오로지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복음을 전하며 바친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할 만큼 놀라운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입니다. 그러한 그가 명령하고 있습니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 말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물어보았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냐고?” 담대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도 범사에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 중에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고백한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상대적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중에서 가장 많이 감사를 드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와 은혜는 서로 함수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면 감사하지 못하도록 가로 막고 있어도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고 말입니다. 이와 같은 고백과 탄식이 가슴에서부터 우러나와야 비로소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데?”, “부모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데?”하면서 원망한다면 그런 사람에게 감사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불행하게도 모두가 다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 원망과 불평은 넘쳐나도 감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 된 우리들은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와 부모님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감사는 그 다음에야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흙이 없는 곳에서 나무가 자랄 수 없듯이 은혜가 없는 곳에서는 감사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