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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감사하라! (2022년 11월 20일 주일낮설교)

여호와께 감사하라!

추수감사주일

11. 20, 2022

:시편136:1-4

說敎:崔仁根 牧師

 

얼마 전 한국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소형 트럭을 몰고 다니던 채소장사가 마이크로 열심히 외치며 골목골목을 다니다가 그만 네 살짜리 사내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치어서 죽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운전을 하던 가난한 채소 장사는 구속되었고, 아이 부모와 가족들은 갑자기 당한 슬픔에 온통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엄마인 집사님은 구속된 채소장사를 감옥에서 꺼내주었고 보상금도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내 아들이 살아 다친 몸을 고친다면 병원비가 필요하겠지만 하늘나라에 갔으니 무슨 돈이 필요하겠습니까? 내가 보상금을 받으면 또 한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진정한 예수님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가난한 채소장사의 삶까지 끊어놓고서 어찌 마음이 편하겠냐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의 이런 불행을 감사로 바꾸어 놓는 믿음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저절로 나오는 행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감사는 언제나 상대를 헤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할 때만 할 수 있는 고도의 신앙인격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시편 기자는 분명한 감사의 이유를 구절구절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련하고 우매하여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염두에 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려 26절이나 되는 긴 절에서 매 절마다 감사의 이유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단 한 줄도 빼지 않고 선포하는 공통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아는 성도라면 무조건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아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가슴 아픈 사건에서도 우리는 희생자의 어머니가 범인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자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생각한다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네 살짜리 아들을 죽인 범인을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한 번 더 영적으로 깊이 생각해 본다면 그 범인이 절대로 고의로 아들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한 손으로는 운전대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마이크를 잡고 채소 사세요!”하고 외치다가 갑자가 자전거를 타고 튀어 나온 아이를 미처 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내 아들을 죽인 원수중의 원수이지만 그 사람의 현실로 들어가 보면 너무나도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감옥에 갇혀버리면 그 가난한 가족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서 자비, 인자, 사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우리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채소장사와 같은 죄인입니다. 마음으로 죄를 짓고 생각으로 죄를 짓고 입으로 죄를 짓고 눈으로 죄를 짓고 행동으로 죄를 짓는 단 하루도 죄를 짓지 않고 사는 날이 없는 죄인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원죄를 품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법대로 판단하신다면 우리는 모두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인자하셔서 우리 모든 죄를 예수님께 떠넘기고 오늘 우리들을 해방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죄 없는 사람처럼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도 인자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일 년 중에서도 가장 감사를 깊이 생각하고 드리는 2022년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이유를 다시 한 번 더 배우며 마음 판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많은 은혜를 받으시고 사는 날 동안 감사하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136: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사실 우리는 진정한 선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우리들 자체가 속속들이 악하기 때문에 선에 대한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하십니다!”는 말씀을 들어도 그렇게 가슴에 와 닫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과 악의 차이가 무엇인지 우매한 우리들에게 쉬운 말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10:11-15)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고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선과 악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선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고 악은 자신을 위해 타인을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선하십니다!”고 선포하심으로 인간은 악합니다!”는 사실을 반증시켜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악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께서 아무리 선하게 우리들을 사랑해 주셔도 그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근본은 하나님이나 타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내 눈에 들보가 빠져야 하나님도 볼 수 있고 이웃의 허물도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를 빼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하고 타인의 허물을 먼저 보는 이런 자를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외식하는 이런 자들의 그릇된 행태가 바로 인간의 근본적인 악입니다. 이렇게 악으로 눈과 귀가 굳게 막혀있으니 어떻게 하나님을 보고 듣고 그 선하심을 발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지 못하니 감사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것입니다.

(6:5-7)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이렇듯 감사는 고사하고 악으로 무장을 하고 오로지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이웃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는 최악의 자리에 빠져 살다가 그 무서운 홍수로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잘난 척 해도 우리는 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7:18-19)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고백이요 탄식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도 전무후무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숨은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악에 대해 탄식하고 잘난 척하거나 교만하지 아니하고 절대적인 하나님께 의지하고 엎드렸으므로 그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사도로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의 탄식은 바로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바로 이와 같은 절망과 탄식 속에서 그는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자체는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악을 제거하고 새롭게 되는 길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예수님을 찾아가는 유일한 길은 우리 속에 있는 악을 제거하고 악이라면 모양이라도 버리는 결단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이와 같은 진리에 관해 박식하였던 사도 바울은 짧지만 강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살전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고 말입니다. 이렇게 악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이신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악으로 가득한 죄인 된 우리들을 위해 어떠한 사랑으로 희생하셨는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던 사도 바울은 또 다시 우리들에게 소중한 권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 말입니다. 감사는 이렇게 드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인자하시기 때문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136:1-2)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8:1-4)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자비하십니다. 이 말씀을 영어로는 Mercy라고 쓰는데 이는 용서와 사랑과 푸근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Mercy의 반대말인 cruelty를 생각해 보면 가슴에 쉽게 그 의미가 와 닿게 됩니다. Cruelty라는 말은 잔인함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우리는 우리들의 타락한 본성이 죄악을 가득 담고 있기 때문에 악하다고 배웠습니다. 이 세상에 죄를 짓고 감옥에 가야 할 사람을 존경하거나 사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죄인이고 날마다 같이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죄인을 가장 혐오하고 싫어합니다. 그런데 하늘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얼마나 더 오늘 우리들의 죄와 악이 혐오스럽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잔인하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매순간 지켜보시다가 심판의 매를 휘두르지도 않았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처럼 심판하시거나 죽이시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서해주시고 안아주시고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어째서 우리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에게 이렇게도 과분한 은혜를 주시고 계실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15:18-24)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다 아버지입니다. 과연 우리들의 아들이 이렇게 방탕하고 소중한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다면 이렇게 잔치를 벌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절대로 상식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탕자의 형을 통하여서 발견하게 됩니다. 탕자에게 이렇게 하시는 아버지를 맏아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바로 인자하신 하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랑은 비단 아들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더러운 창녀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악랄한 바리새인들은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용서해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겼다고 몰아세울 것이고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항상 사랑을 강조하더니 잔인하지 않느냐고 몰아세울 것이니 예수님은 결국 그 형편없는 여인 때문에 궁지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8:3-1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참으로 지혜롭게 바리새인을 몰아내고 따뜻한 사랑으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눈시울이 뜨거워지도록 감동스럽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바로 이와 같은 분이십니다. 이런데도 오늘 우리들이 그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진정한 신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136:10-16)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날 아름다운 교회에서 아름다운 성도들과 함께 2022년도 감사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몸이 아파도, 삶에 지쳐서 쓰러져도, 믿음이 없어도, 신앙의 자유가 없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구별된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까지 우리들의 삶을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분은 과연 누구일까요? 우리들이 잘났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우연한 일일까요? 그도 아니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을 괴롭히는 바로를 누가 제거하여 주었습니까? 우리 앞을 가록 막고 시퍼렇게 흘러가던 홍해를 누가 열어주었습니까? 메마른 광야에서 이슬처럼 만나를 내려 먹여주신 분은 과연 누구였습니까? 목이 말라 죽어가던 백만이 넘는 사람들과 가축들에게 반석을 갈라 물을 내어주신 이는 과연 누구였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엄청난 능력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기적입니다. 3년도 더 넘게 온 세상에 창궐하여 수백만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던 코로나를 우리들은 무슨 능력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까? 저와 같이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같은 시애틀 지역 올리피아에서 목회까지 함께 하였던 친구는 저와 동갑내기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코로나로 부부가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고새면 일어나는 총기사고와, 세 네 사람이 걸어가면 그 중에 한 명은 암이라는 이 세상에서 오늘날 까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은 과연 누구의 공로입니까? 자식을 낳지 못해 평생을 통해 가슴에 한을 안고 살아가는 부부도 많고, 아이는 낳았으나 장애아라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장애우 부모도 많은 데, 자식을 낳되 건강한 자식을 낳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과연 누구의 도움이었습니까?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이 미국 땅에서 장사를 하고 직장을 다니며 소중한 자녀들을 공부시키고 오늘날 까지 꾸러가지 아니하고 잘 살아가는 것은 또한 누구의 도움입니까? 이에 대해 단 한 마디로 해답을 정리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121:4-6)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시고 지켜주셨다는 뜻입니다. 그 어느 한 가지도 우리 스스로가 잘 나서 잘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렇게 이루어 놓았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거듭한 시편 기자는 그 모든 은혜와 축복이 우리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감사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은 오늘 이 순간까지 우리들을 지켜주셨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적당하게 지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지켜주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인생 여정에 기약 없이 닥쳐오는 모든 환난까지도 면하게 해 주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21: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말씀을 믿는 믿음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바로 알아야 하고 또한 그 하나님을 바로 믿어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는 날 동안 모든 범사에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드리는 성숙한 우리 모든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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