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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을 바라보라! (2023년 1월 22일 주일낮설교)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 22, 2023

:창세기13:14-18

說敎:

 

하나님은 인류 최초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와 함께 우상장사를 하면서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를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시고 그와 같은 고향과 부모와 본토를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실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무려 75세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비록 목적지조차 분명하지 않았지만 고향을 떠나나왔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그 때까지도 자식 하나가 없어서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문명이 발달한 지금도 무작정 살고 있던 보금자리를 떠나는 일이 쉽지 않는데 씨족으로 얽혀 살던 그 때 이렇게 정든 부모형제와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축복을 보장해 주셨던 것입니다.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우리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실 때는 아브라함과 같이 거기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아브라함과 같이 망설이지 말고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우리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엄청난 축복을 받았었고 덩달아 함께 따라 나왔던 조카 롯도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 복을 많이 받았음에도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도 서로가 함께 살기에 복잡하고 다툼이 많았던 것입니다.

(13:6-7)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독립시키고 이처럼 다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이 과정에서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귀한 도전과 교훈이 남아 있기에 오늘 함께 배워보려고 합니다. 가슴을 열고 말씀을 받아 아브라함과 같은 풍성한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3:5-9)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미국에서 살아가려면 가장 필수적인 것이 운전입니다. 운전을 하면서 가장 많이 접하는 단어는 바로 “Yield”입니다. 이 말은 양보라는 뜻입니다. 운전을 할 때 이와 같은 양보하라는 사인을 무시하게 되면 엄청난 사고가 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곳곳에 이와 같은 Yield Sign이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은 이 사인 앞에서 고집부리지 아니하고 서로 양보함으로서 교통도 원활하게 흐르고 사고도 방지하며 즐거운 여행과 운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Yield”라는 이 단어는 양보로만 쓰이지 않습니다. “수확, 유익, 수익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들을 종합해 보면 양보라는 말은 나의 유익을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무에서 정확하게 이와 같은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롯의 삼촌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연장자이고 어른입니다. 그러므로 양보를 해야 한다면 손아래 사람이자 조카인 롯이 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른 행세도 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먼저 챙기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양보하고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타국에서 재물은 생존의 가장 소중한 기본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미국이라는 타국에서 이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을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이 땅에서 생존해 가는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재물입니다. 이렇게 볼 때 소중한 생존이 달려 있는 선택의 기로에서 양보를 한다는 것은 결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고 늙어 기력도 없지만 젊은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양보의 미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하나 배워야 할 소중한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양보의 미덕입니다. 아름다운 인생과 사랑을 만들어 가는 삶의 숨은 공로자가 바로 이 양보의 미덕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왜 외로운 타국에서 조카 롯과 헤어질 결심을 하였습니까? 서로 다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외롭고 삶이 힘들어도 서로 다투면서 행복을 추구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다툼의 패악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2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나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다툼은 인생을 갉아 먹는 암과 같은 악한 존재입니다. 이와 같은 다툼을 멀리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유일한 One Way는 바로 양보의 미덕입니다.

16세기는 우리 종교계에서는 황금의 때였습니다. 쯔빙글리, 쟌 칼빈, 마틴 루터 등 기라성 같은 종교개혁가들이 일어나 종교개혁을 외친 때였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자기들만의 교리와 진리가 있기 때문에 한 치의 양보도 용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유럽의 종교 개혁자 중 루터와 쯔빙글리는 그들이 지도하는 운동에 관한 생각이 서로 반대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극한 대치상황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다툼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이른 아침 쯔빙글리는 스위스의 한 산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자신의 영혼을 흔드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두 마리의 염소가 좁은 산길을 가고 있었는데 한 마리는 위로 오르려 하고 다른 한 마리는 내려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길은 너무나 좁아서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공간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두 마리는 도중에서 만나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극한 대립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두 마리는 서로 마주 바라보며 꼿꼿이 서서 마치 한 판 싸움이라도 벌일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래쪽에서 올라가던 염소가 길 위에 엎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한 마리가 그 등을 딛고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제 길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쯔빙글리는 그곳에서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양보하는 것이 제 갈 길을 편히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낮추시어 인간이 그 등을 딛고 빛의 왕국에 오르게 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 니다.

염소를 통해서 받은 도전으로 그는 결국 겸손하게 스스로를 낮추며 종교개혁을 완성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남은 삶을 살아가면서 아브라함과 말 못하는 미물인 염소를 통해서 양보의 미덕을 배우고 인생을 보다 더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변화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롯은 눈앞의 유익을 먼저 택하였습니다

(13:10-11)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상식이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롯의 선택을 비판 할 것입니다. 그는 삼촌 아브라함 때문에 改過遷善(개과천선)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를 데리고 우르를 떠나 나왔기 때문에 그가 넓은 새로운 세상에서 거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세가 드신 늙은 삼촌에게 선택의 권한을 드리지 아니하고 눈앞에 보이는 물이 풍부하고 기름진 소돔 땅을 먼저 선택하고 미련도 없이 삼촌 아브라함을 떠나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참으로 사가지가 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죽하면 아브라함조차도 그와 같은 조카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겠습니까? 성경은 세세하게 모든 사건을 다 기록하는 책이 아닙니다. 거의 대부분의 자세한 내용들은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문맥을 묵상해 보면 아브라함이 멍하니 서 있었음을 의심 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와 같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위로와 축복을 주셨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13:14-16)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이는 네 조카는 너를 버리고 떠나버렸지만 조카보다 천 배, 만 배 더 나은 네 아들이 너를 지키고 섬기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련 없이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하고 떠나갔던 롯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불에 타버리는 최악의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소돔 사람들은 그렇게도 끔찍한 심판을 받았을까요? 하나님은 그 대답을 다음과 같이 아주 간단한 말씀으로 대신해 주셨습니다.

(13:13)

소돔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입에 단 것이 몸에는 해로운 법이고 눈에 아름다운 것이 독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롯과 같이 눈앞에 보이는 유익만을 미련 없이 선택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은 황금만능 시대입니다. 돈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을 정도로 사람과 사회가 변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돈만 얻을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행동하고 처신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풍부한 것도 악이 묻어 있으면 망하게 되고 적은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흥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오늘 우리들에게 귀한 말씀 하나를 남겨두었습니다.

(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고 말입니다. 결코 성도들의 가는 길에 눈에 보이는 재물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소망하는 재물을 얻고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야 진정한 복이 된다는 사실을 롯을 보면서 배우고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3:14-15)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아브라함도 사람이기에 조차 롯에 대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섭섭한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자상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라 이와 같은 아브라함을 위로하시고 더 좋은 축복으로 보상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환경 앞에서 좌절하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악한 환경 앞에서도 미래를 기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외롭게 혼자 남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신 이 말씀은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눈앞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방팔방을 내다보는 비전을 가지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난 주일에 받았던 말씀처럼 악한 하만이 사악한 계략을 꾸미고 모든 권세를 다 가진 왕의 제가까지 받아 모르드개와 유다민족을 몰살하려고 하였지만 결국은 자신이 먼저 처형되는 비참한 결과를 보았던 것처럼 끝난 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인간보다 천 배, 만 배 더 강하신 하늘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양보하고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공평하신 하나님은 이렇게도 놀랍게 아브라함에게 보상해 주셨습니다.

(13:14-17)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손이 잘 되고 재물에 한이 없는 축복이 바로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한,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확실한 진리 하나를 배워야 합니다. 롯과 같이 눈앞에 유익을 먼저 선택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이와 같은 축복이 훨씬 더 귀하고 오래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잃었다고 절망하지 말고 오늘 얻었다고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내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늘의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주시는 복으로 인생을 살아야 오래토록 풍성하고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성경 속에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는지를 말입니다. 롯과 아브라함은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부정적으로나 긍정적으로 배워야 할 소중한 대상인 것입니다. 부디 아브라함처럼 양보의 미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아브라함처럼 축복을 받아 누리는 그런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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