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용서해야 하나요? (2023년 2월 12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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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2 February 2023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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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용서해야 하나요?
2. 12, 2023
本文:요한복음 18 : 3 - 11
說敎:崔仁根 牧師
지난 화요일인 2월 7일 인천시 남동구의 한 아프트에서 12살 된 초등학교 5학년생이 숨져서 부검을 해 보니 학대로 인한 다발성 뇌손상이 원인으로 밝혀졌습니다. 즉시 경찰은 그 부모를 연행하였고 조사 중 밝혀진 사실은 엄마는 계모이고 아버지는 친부인데 계모가 지속적으로 때리며 학대하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구속영장을 신청하였다고 합니다. 21세기 지금도 계모가 이렇게 아이가 죽도록 때리며 학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섭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전처와 이혼하고 재혼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겨우 12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이처럼 비참하게 맞아서 죽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 모두를 경악케 하고 슬프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려고 하면 다소 부족하고 못나도 따뜻하게 용서하고 감싸주는 마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용서는 사랑의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용서가 없이는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너무나도 미워하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기라성 같이 나타나신 예수님이 온갖 이적과 기사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자 그들은 엄청난 질투심에 불타올랐고, 상식적으로 자신들이 믿어 왔던 신앙에 엄청난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틈만 나면 예수님을 공격하였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예수님으로부터 실망을 하고 돌아서도록 모략을 꾸몄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당시 그들의 법이었던 율법에는 간음하다가 잡히면 군중들이 몰려나와 돌로 쳐 죽여도 무방하였습니다. 항상 사랑을 외치고 다니시던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에 이 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음하다 붙잡힌 한 여자를 예수님 앞에 내동이 쳐 놓고 손에 손에 돌을 들고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하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법대로 돌로 치라”고 한다면 그렇게도 사랑을 외치고 다니더니 잔인하게 돌로 치라고 한다며 비난할 것이고, “용서해 주라”고 한다면 어떻게 율법을 어길 수 있느냐고 몰아붙일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 둘 모두가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양심이란 게 있어서 차마 돌로 그 여인을 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왜 용서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은 “우리는 왜 용서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 귀를 기울이고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용서해야만 용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우리교회 성도들은 거의 다 기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곧 죄가 되고 하나님과 단절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기도가 응답이 되는지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의 이 말씀은 기도가 왜 응답이 되지 않는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귀한 해답이 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기 전에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또 다른 진리를 가르쳐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마18:18-19)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이 또한 기도 응답에 관한 예수님의 소중한 가르치심입니다. 두 사람이 합심한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땅에서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에 한을 품은 채 기도한다면 그것은 그대로 하늘에서도 묶이고 뭉쳐서 응답의 기적을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땅에서 이웃들과 형제들에게 원한을 품고 용서하지 못한 채 하늘의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엇을 구한다는 것은 어딘가 모순되어 보이고 믿음과 거리가 먼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에서 소중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는 기도를 드리든, 예배를 드리든,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마5:21-24)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말입니다.
우리는 앞서 인천에서의 슬픈 사건을 들었습니다. 그 남편이 낳은 아들은 죽을 만큼 때리고 학대하면서 그 남편은 사랑한다고 하면 그 사랑이 진실한 사랑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남편을 사랑한다면 그 남편이 낳은 아들도 귀하게 여겨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여자는 남편도 아들도 다 잃은 채 차가운 감옥에서 혼자서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가치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웃들이나 형제는 미워하고 원수를 맺으면서 그 하나님과는 화목하고 그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욕되게 하는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함께 하도록 우리들에게 붙여주신 이웃들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들의 그 숱한 허물과 죄 또한 용서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18:23-35)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는 지름길임을 깨닫고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들이 용서 받고 살기 위해서라도 용서해 야 함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용서의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요8:10-11)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예수님 앞에 내동이 쳤습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쳐 죽일 듯이 손에 손에 돌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 편에서 생각해 보면 그러한 바리새인들도 얄밉지만 그들에게 빌미를 준 간음한 여인이 얼마나 더 밉겠습니까? 그 여자 때문에 아무 상관도 없는 예수님께서 궁지에 몰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는 엄청난 감동을 받게 됩니다. 단 한 마디도 그 여인을 비난하시거나 “너 때문에”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도 탓을 많이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 때문에 내가 망했다. 너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 너 때문에 내가 암에 걸렸다. 너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 할 수가 없다.”는 등 수도 없는 탓을 남에게 돌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다 터무니 없는 핑계일 뿐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인생은 내가 주님 손잡고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우리들의 어리석은 말과 생각을 단번에 제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간음한 여인 때문에 바리새인들 앞에서 얼마나 어려운 進退兩難(진퇴양난)의 궁지에 빠지셨습니까? 주님의 비상한 지혜가 없었다면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궁지에 빠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그와 같은 궁지로 몰아넣고 하나님의 법도 어긴 채 간음하다 잡혀 온 그 여자가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미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뜻밖이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나도 너를 용서하여 주리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오늘 우리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심의 모범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도망 가버린 베드로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을 짐승처럼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잔인한 그 인간들까지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눅23:33-37)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과연 그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잔악무도한 무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그냥 사람일지라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앞서 소개해 드린 말씀을 묵상해 보신다면 과연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와 같은 존재들임을 알 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고귀한 목숨을 장난치듯 다루고 목숨이 끊어져 가는 고틍 앞에서 조롱하고 비웃는 모습은 차마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초연하게,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렇게도 예수님께서 친히 용서하시고 모범을 보여주시며 “용서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들이 어떻게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그래서 우리는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죽을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약1:10-11)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벧전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그 때가 언제일는지 알 수 없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지난 2월 6일 새벽 1시 17분 튀르키예와 시리아북부지방에 임한 지진은 그 규모가 7.8에 달하였습니다. 그곳 주민들은 곤히 잠을 자다가 끔찍한 변을 당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망자만도 2만 5천이 넘었고 이재민은 3천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그야말로 阿鼻叫喚(아비규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도 무너진 건물잔해를 다 치우지 못해 그 속에 깔린 사람들을 구조하지도 못하였는데 외신들은 잔해물 속에 묻혀 있는 사람이 십만 명도 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자랑할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실로 오늘 우리들의 목숨은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음을 부인할 수가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도 원수 맺고 미워하고 박대하며 용서와 사랑을 외면한 채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호스피스병동에서 7년간 근무하고 있는 김여란이라는 여의사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약 1,000여명의 임종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호스피스병동은 병원에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돌아가실 때까지 잠시 머물도록 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다시 살아날 소망이나 기대가 전혀 없는 오로지 죽는 날만 기다리는 그야말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환자나 가족들은 이제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으므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가장 평온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환자가 머무는 시간은 길어야 3달이고 거의 1달 안에 돌아가신다고 합니다. 그동안 그들이 지나온 삶을 정리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마음 정리가 바로 “용서”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 의사가 깨달은 것은, 왜 좀 더 건강할 때 용서하고 사랑하며 함께 삶을 나누지 못하고 죽기 직전에야 이러한 변화를 만드는지 안타까왔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이웃에서 목회를 하다가 은퇴한 선배가 있는데 그 선배가 부임하고 8년 만에 극렬하게 내쫓은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암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고 난 다음 선배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죽음을 앞둔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다 해결하고 평안하게 떠나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살아생전에 진정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아가도록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롬12:17-21)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은 꼭 이 말씀을 가슴으로 품고 사는 날 동안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언제 죽을는지 알 수 없고 마지막 순간에 후회 없이 세상을 떠나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가장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원수를 용서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삶으로 우리들의 삶에는 평안과 행복을 누리고 자손들에게는 모범과 축복을 유산하는 그런 고귀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