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는 왜 나갔더냐? (2023년 2월 19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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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9 February 2023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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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는 왜 나갔더냐?
2. 19, 2023
本文:마태복음11:7-11
說敎:崔仁根 牧師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를 보면 노인이 바다에서 고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이 고기를 잡아야 하는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인은 고기를 잡을 만한 힘도 없었고, 고기를 잡아도 노인이 다 먹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노인은 고기가 걸렸으니까 그 고기를 잡으려 했던 것뿐이었습니다. 상어 떼가 달려들어 잡은 고기를 모조리 뜯어먹고 마침내 노인은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노인에게 남은 것은 생선 뼈다귀 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모르면 아무리 부지런히 또 열심히 살아도 이처럼 아무런 결과가 없게 된다는 사실을 헤밍웨이는 이와 같은 소설을 통해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單刀直入(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광야에는 왜 나갔더냐?”고 말입니다. 어쩌다가 한 번 물어보신 것이 아닙니다. 무려 이와 같은 질문을 매 절마다 세 번씩이나 던지고 계십니다.
(마11:7-9)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여러 번 예수님께서 같은 질문을 하시는 것은 바로 광야에 나간 목적에 관해서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네가 사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질문으로 응용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삶이 끝났을 때 과연 우리는 이 땅에 무엇을 남길 것입니까? 튀르키예에 지진이 나서 4만 6천 명이나 죽었는데(아직도 정확한 수치는 알 수도 없음)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죽음을 당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세에는 이와 같은 지진이 처처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마24:7-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이와 같은 말세를 대비하여야 하겠고 우리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삶을 새롭게 살아나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그와 같은 삶의 목적의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주시는 귀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신선한 도전과 깨달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갈대와 같은 인생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마11:7)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불행하게도 우리 주변에는 삶의 목적의식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왜 돈을 버는지, 왜 사랑을 하는지, 왜 교회에 다니는지 분명한 목적이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소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날카롭게 던지신 질문도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광야에는 왜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해서 나갔더냐? 이것은 오늘우리들이 무슨 목적의식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예리한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냉철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막연하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부르시기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친 자녀들이 되도록 예수님의 피를 쏟아 친히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엡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은 실로 천금을 얻은 것보다 더 놀랍고 감격스러운 복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빌립보장로교회를 맡겨주시고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과연 어떻습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분에 따라, 환경에 따라, 형편에 따라 충성하기도 하고 무관심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십자가에 내 놓으시기까지 희생하시는데 우리는 이렇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정함이 없이 흔들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어떤 은총도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약1:6-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갈대와 같이 세상에서 덧없이 흔들리며 속절없이 시간만 낭비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은 매우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대쪽 같이 심지가 견고한 성도들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사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대쪽 같이 당당하게 서서 우리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힘차게 살아가야 합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농촌에서 태어나 16세에 디트로이트로 가 유명한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이 세운 회사의 직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헨리 포드는 점점 인정을 받아갔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한번은 에디슨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는 에디슨에게 한 가지만 질문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가솔린이 기계를 돌릴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을 들은 에디슨은 두말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 포드는 에디슨의 이 한 마디 대답에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자동차 엔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년이 지나고 2년, 3년이 지났으나 실패했습니다. 다시 5년, 6년이 지났으나 또 실패했습니다. 7년, 8년이 지나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3년 만에 헨리 포드는 마침내 자동차 엔진을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우진 회사가 바로 포드자동차였습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아무리 실패의 난관이 있다고 할지라도 목표를 이룰 때까지 좌절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결코 갈대와 같이 지향 없이 흔들리며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을 한 번 보십시오. 그는 수도 없는 고난이 파도처럼 뒤덮었지만 그는 당당하게 지치지 아니하고 전진했던 위대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갈대처럼 흔들리지 아니하고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빌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어차피 죽어야 할 목숨이라면 값지고 후손들에게 남길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려면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리고 후손들에게는 우리들의 소중한 이름 석 자를 남겨주는 변함없는 목적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갈대처럼 흔들리지 말고 대쪽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예수님은 거듭 말씀하십니다. “광야에는 왜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보려고 나갔더냐? 그런 사람은 광야에 있지 않고 왕궁에 있느니라.”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광야에 나간 목적에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친히 인정하시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왕궁에나 있을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광야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시간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지금 이 말씀을 주신 예수님께서 친히 인정하시고 도와주실 그런 멋진 인생은 과연 무엇일까요? 왕궁에서 세상 사람들과 담을 쌓고 자기들만 부드러운 옷을 입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이 아니라 그 반대로 대쪽 같은 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되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은사들을 불쌍한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따뜻한 사랑으로 차가운 세상을 녹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주고 나누는 삶입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행20:33-35)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 두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주신 말씀과 주님의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자신의 삶의 철학과 믿음으로 삼았던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하나같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떤 삶의 목적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는지에 대한 정확한 해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축복이 참으로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건강한 몸과 정신을 주셨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런 자녀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꾸러가지 않고 꾸어줄 수 있는 귀한 재물도 많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들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거저 주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눅10:30-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복을 받았으면 그 복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이 더 커지고 복을 주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성도들이 너무나도 인색하게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과 자식들에게는 온갖 것으로 다 해주면서도 이웃들에게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아예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광야에서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를 찾는 것처럼 의미가 없는 헛된 수고만 할 뿐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심장으로 다가섰던 사마리아인과 같이 오늘 우리는 그렇게 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 가장 기부금을 많이 내어 놓은 연예인 Top5를 발표했는데 5등이 아이유로 43억 원이고 1등이 하춘하씨로 200억 원이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돈 아닙니까? 아직도 어린 아이유가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하춘하씨가 그렇게도 많은 돈을 내 놓았다는 사실에 다시금 머리가 숙여지고 감동이 일어남을 느끼게 됩니다. 하춘하씨는 KBS의 아침마당에 자주 출연하는데 벌써 70대 임에도 너무나도 그 얼굴이 밝고 평화로와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처럼 놀라운 선행으로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작은 것에서부터 서로 돕고 사랑하며 나누는 멋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비가 풍성하시 하나님께서 더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재물은 이렇게 사랑하며 나누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잠8:21)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비엔나 대학의 심리학 연구소 소장인 브홀러 박사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 200명을 조사한 결과, 그들이 성공한 것은 머리 좋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인생의 목표가 분명했고, 그 목표를 향해 매일매일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은 피곤을 모릅니다.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앞을 향해 달려갈 뿐입니다. 그와 같은 생의 목표가 이웃들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얼마나 더 소망이 넘치고 힘이 나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렇게 멋진 목표를 향해 힘차게 전진하는 믿음의 식구들이ㅣ 되시기 바랍니다.
선지자를 보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마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예수님은 세 번째로 왜 광야에 나갔는지, 그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광야에 나갔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여야 하는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지자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지적하신 선지자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례 요한은 광야에 있었습니다.
(요1:21-23)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세례 요한이 이 땅에 왜 왔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소리는 인격이 아닙니다. 소리는 사람도 아닙니다. 소리는 목적만 전하고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이렇듯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존재의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앞에서는 그 분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할 존재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을 지적하였다가 칼로 목 베임을 당하고 30대 초반에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와 같은 세례요한을 여자가 나은 자 충에 최고라고 평가하셨습니다.
(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30년 정도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사람보다 더 훌륭한 삶을 살고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길게 오래 산다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화려하게 산다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칭찬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세례 요한과 같이 선지자와 같은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선지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란 뜻입니다.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 하나님께서 친히 복을 내리시는 지상 최고의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신28:1-3)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수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시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남은 삶의 목표는 바로 이와 같은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이 말씀을 중심으로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풀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이웃들을 섬기면서 가장 소박하면서도 가장 비범한 그런 멋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생의 선한 목표를 따라 복된 길로 가기를 원하시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