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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관계를 위한 조건 (2023년 2월 26일 주일낮설교)

아름다운 관계를 위한 조건

2. 26, 2023

:사무엘하  2 4 : 18 - 25

說敎:崔仁

 

지난 주간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에서는 3만 명의 수사경찰들을 컨트럴 하는 보직인 경찰국가수사본부장이 임명 되었습니다. 이 자리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중요한 곳으로 검사시절 윤대통령과 함께 지근에서 일했던 특수통 검사 정순신변호사가 임명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도 귀한 자리에 임명 되자 말자 하루 만에 사표를 쓰고 말았습니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학폭(학교폭력)에 연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수통 검사에서 변호사로 변호사에서 국가수사본부장으로 화려하게 성공가도를 달려왔던 그의 삶이 그 옛날 아들이 저질렀던 잘못 하나로 한 순간에 다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의 소중함을 입증해 주는 생생한 현주소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사법 역사상 최연소 사형수가 있었는데 그는 내일 모래 곧 제대를 하려던 병장이었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아 동료 4명을 사살하고 여러 명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는 끔찍한 범죄로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범죄를 저지른 이유가 또한 끔찍합니다. 그들이 군 생활을 하는 내내 자신을 무시하고 왕따시키고 괴롭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대하여 사회로 나가기 전에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이 또한 인간관계의 실패가 만들어 놓은 씻을 수 없는 무서운 결과였습니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이웃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조물주이신 하나님과도 깊은 관계를 유지하여야 합니다. 생각 없이 남에게 고통을 주거나 고통을 당하게 되면 결국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비참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인간관계나 대신관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배워보려고 합니다. 소중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이웃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겠는지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 귀를 기울이시고 진리의 말씀에 풍성한 은혜와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삼하24:1-2)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를 내게 알게 하라

성경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만을 들어온 성도들은 성경의 진리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만 낳아 애지중지 사랑만 주고 벌을 주지 않은 채 키운 자식이 부모도 이웃도 안중에 없는 眼下無人(안하무인)이 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강단에서 성도들이 싫어하고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진노하신다는 말씀은 거의 전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에 관한 말씀으로 성도들을 위로하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관해서는 너무나도 감각이 무디어져 있고 그로인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세우신 후 그렇게도 기뻐하시고 영광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다윗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중심으로 자신과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왕상15:4-5)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으니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많은 지혜를 받았던 솔로몬은 왜 아버지 다윗과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을까요? 그래서 솔로몬이 망하게 되었는데 그 아들 르호보암은 왜 그 아버지의 망함을 보고도 아버지보다 더 악을 행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스스로 자초하였을까요? 이것은 단순히 솔로몬과 르호보암 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솔로몬과 같은 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던 여로보암은 더하였기 때문입니다.

(왕상14:7-12)

가서 여로보암에게 고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너를 백성 중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하고 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내어 네게 주었거늘 너는 내 종 다윗이 나의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좇으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음과 같지 아니하고 너의 이전 사람들보다도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의 노를 격발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을 쓸어버림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버릴지라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하셨나니 너는 일어나 네 집으로 가라 네 발이 성에 들어갈 때에 그 아이가 죽을지라

이 말씀은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이 들자 당시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여 주었던 선지자 아히야에게 자신의 아내를 변장하여 몰래 보내고 어떻게 될는지 알아보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아내에게 응답해 주신 내용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오늘 우리는 분명한 진리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시지만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는 불신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때는 가차 없이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라 아무리 우리들을 사랑하고 도와주시려 해고 우리들이 그 하나님 앞에 다윗처럼 올바르게 살아가지 못하게 되면 솔로몬이나 여로보암과 같이 엄청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이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하게 하셔서 그 백성들에게 벌을 내리시는 내용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윗이 생뚱맞게 인구조사를 하려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3일 동안 온역이라는 역병을 돌게 하시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7만 명이 죽어나가는 심판을 하셨던 것입니다.

(삼하24:15)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인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엄히 질투하시는 분이시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하나님을 등 뒤에 세우는 어리석은 행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야 합니다

(삼하24:21-23)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다윗 왕은 사랑하는 백성들이 7만이나 죽어나가자 가슴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저지른 인구조사 때문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습니다.

(삼하24:17)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백성을 향한 다윗의 놀라운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가 너무나도 백성들의 죽음을 보고 가슴 아파 하므로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가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것을 조언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으로 올라가서 그 집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기로 하고 친히 아라우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라우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번제를 드릴 수 있도록 번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값은 충분하게 치러 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서라도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고 은총을 덧입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삼하24:21)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라우나는, “어떻게 제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시려는 다윗 왕에게 제물을 팔수가 있겠습니까? 번제를 드릴 소는 이미 있는 것이고 번제를 드릴 때 필요한 재목도 타작할 때 쓰는 제구와 밭을 갈 때 쓰는 멍에가 있으니 다 마음대로 사용하십시오.” 하고 기꺼이 내 놓았습니다.

(삼하24:22-23)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 왕을 대하는 아라우나의 지극한 정성을 엿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들이 익히 잘 아는 대로 엣 날 농촌에서는 소가 농사를 짓는 기본입니다. 소의 힘을 빌려 논과 밭을 갈고 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소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농사짓는 기구들입니다. 소의 목에 걸 멍에나 농기구들은 농사짓는 필수도구들입니다. 그런데 아라우나는 그 모든 것을 다 내 놓고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데 사용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라우나는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우나는 가족의 생계가 달려 있는 것일지라도 아낌없이 다 바쳤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최상의 조건입니다. 이것저것 계산하지 아니하고 다 내어 놓는 헌신 앞에 감동 받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주신 바 없는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거듭거듭 주셨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생자 이삭이라도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기꺼이 드렸기 때문입니다.

(22:15-18)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성군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데도 아라우나는 이렇게도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다 내 놓으니 다윗이 무척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와 같은 아라우나의 마음만 받고 풍성하게 값을 치러 주었던 것입니다.

(삼하24: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풍성한 사랑만이 사람도 하늘의 하나님도 감동시켜 드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인색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은커녕 사람조차도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에 관한 소중한 진리를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고후9:6-7)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이여, 부탁하노니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인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거짓이 없는 분이시라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게 하시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게 하십니다. 드릴 수 있고 섬길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이미 축복입니다. 그것을 내 것이라고 욕심 부리지 말고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 줄 믿고 주신 하나님과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후하게 드리고 섬기고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이 종도 혈혈단신 혼서서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겨오는데 단 한 번도 꾸러가지 않도록 복을 주셨음은 그 가난하여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때도 하나님께 인색하지 않도록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빌립보의 성도 여러분들도 오늘 주시는 이 복된 말씀을 가슴에 꼭 새기시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손들에게도 꼭 실천하도록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들과도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며 남은 삶을 유복하게 살아가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값없는 제사를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삼하24:24-25)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역시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의 진면모를 보게 됩니다. 아라우나가 그렇게도 가식 없이 진심으로 다윗에게 모든 것을 다 내 놓았지만 다윗은 끝내 그 아라우나에게 값을 지불하고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다윗을 통하여서 이처럼 소중한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24절의 말씀입니다.

(삼하24: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라는 말씀과 같이 다윗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값없이 형식적으로 드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중심으로 보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이와 같은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던 것입니다.

(삼하24: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오늘 우리들의 중심을 눈여겨보시고 계십니다. 제발 예배에 올인하시되 정성을 다하여 드리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우리들의 중심을 볼 수 없지만 하늘의 하나님은 다 보시고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은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셨습니다.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고 말입니다. 이는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강력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령은 성령님이시고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인간적인 것들은 결코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룩한 예배시간에 사사로운 사람의 생각이나 가치나 판단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므로 가인의 제사처럼 열납 되지 않는 것입니다. 부디 오늘의 이 고귀한 진리를 가슴팍에 새기고 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성도들에게 빈손 들고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34:20)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가정교육이 잘 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방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같은 성도들의 집안에 경조사가 있어 방문하게 될 때 빈손으로 드나들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손에 들고 성의를 표하는 자녀들은 가정교육이 제대로 된 집안의 자제들이요, 그렇지 않고 언제나 아무런 생각도 없이 빈손으로 드나들게 되면 그것은 그릇된 경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날까지 배워야 합니다.

하루는 선배목사님이랑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 지인들과 함께 와서 식사를 하고 있던 옛 교인을 만났습니다. 그 분이 우리 테이블로 오더니 목사님들의 식사비를 다 냈으니 편안하게 드시고 가십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선배목사님이 어떻게 집사님이 식사비를 다 내셨습니까?”하니 그 집사님이 하는 말이 우리 최목사님으로부터 잘 배운 덕분이지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배우기만 하지 말고 이렇게 삶 속에서 실천하므로 사람들을 섬기고 감동을 주는 멋진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인간관계는 더 없이 친밀해지고 피곤하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기쁨과 보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길 원한다면 사람이든 하나님 앞에서든 이렇게 지킬 도리를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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