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빌립보장로교회

-- 성령의 열매맺는 교회 --

Mon05062024

Last update12:00:00 AM

Font Size

Profile

Menu Style

Cpanel
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제2의 인생을 위하여! (2023년 3월 5일 주일낮설교)

제2의 인생을 위하여! (2023년 3월 5일 주일낮설교)

2의 인생을 위하여!

3. 5, 2023

:열왕기상 19 :19 - 21

說敎:崔仁

 

리챠드 바크(Richard Bach)가 쓴 [갈매기의 꿈] 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갈매기 조나단은 고독한 선구자였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갈매기들이 해변 가에서 조금 날라서 겨우 먹이를 찾고 먹이를 찾은 다음에는 또 제자리에 앉아 있다가 다시 배고프면 가서 먹이를 찾곤 합니다. 그것 밖에는 갈매기들이 더 이상 돌아다니는 데가 없습니다. 그것이 갈매기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중에서 똑똑한 꿈을 가진 조나단이라는 갈매기가 도전을 시도했습니다. 자기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더 높이 날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멀리 바라볼 수가 있다." 그러니 미지의 나라를 향해날아 가자고 속삭였습니다. 그랬더니 동료들이 이와 같은 조나단을 돌았다고 판단하고 그들에게서 쫓아내버렸습니다. 그래서 조나단은 동료사회에서 추방되고 외톨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추방당한 갈매기 조나단은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의 슬픔은 동료들의 세계에서 추방되었다는 슬픔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커다란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더 높이 날 수가 있는데 그리고 더 멀리 갈 수가 있는데......, 동료들이 이 비상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슬픔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한계, 그 이상을 보지 못하는 짧은 안목에 대한 슬픔이었던 것입니다.

저자 리챠드 바크는 이와 같은 갈매기 조나단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을 채찍질 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영적인 비전도 없고 그저 오늘 하루에 만족하며 적당하게 돈 벌고 적당하게 누리면서 적당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마치 바닷가를 나르며 적당하게 먹이나 얻어먹으며 멀리 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갈매기와 같은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멀리 날 수 있는 날개가 갈매기에게 주어졌듯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권세를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상 19장에는 이와 같은 놀라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놓은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엘리사입니다. 그는 평생을 부모님과 함께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어 의식주를 해결하며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상상도 하지 못했던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겉옷을 벗어 던져주었습니다.

(왕상19: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당시 이렇게 겉옷을 던지는 것은 나를 따르라, 나의 제자가 되라, 나의 후계자가 되라!”는 뜻이었습니다. 엘리사는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즉시 모든 사사로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엘리야를 따라 나섰습니다. 바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입니다.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왔던 그가 새로운 미지의 삶을 선택하고 엘리야를 따라나섰던 것은 바로 새로운 제2의 인생을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엘리사를 통해서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고 잠시잠깐이면 사라져버릴 우리들의 인생을 제정비하고 신선한 변화를 만들 수 있도록 은혜와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엘리사는 부모님과 결별하였습니다

 

(왕상19:20)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 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엘리야를 쫓아가기 전에 한 일은 단 세 절에 불과한 매우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놀라운 결단이었습니다. 엘리사가 밭에서 소를 열 두 겨리나 이끌고 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을 볼 때 그는 결코 소작농을 하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농사는 대를 이어 짓는 가업입니다. 그 자체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생계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엘리야 시대라면 거의 씨족 내지는 부족사회로 가족 중심의 삶이었고 그 생계 수단은 목축업이나 농사였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뜻밖에 나타난 엘리야의 등장으로 일대 변혁을 일으키는 제2의 인생을 출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찾아온 엘리야에게 며칠 고민해 보고 마음에 결단이 서면 말씀드리겠습니다.”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베드로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그 즉시로 예수님을 쫓았던 것처럼 엘리사 역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즉석에서 엘리야를 쫓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평생을 함께 살아왔던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부모님의 의중조차 여쭈어 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엘리야를 따라가겠노라고 선포하고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제2의 인생을 가려고 한다면 가장 연약한 육신의 정을 끊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을 부르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신약시대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던 역사였습니다.

 

(4:21-22)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8:21-22)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매정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이 부모님을 외면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경하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만큼 육신의 정을 끊어내고 신령한 사명을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육신적인 정을 끊어내지 못하면 결코 신령한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베드로나 오늘 본문의 엘리사처럼 담대하게 육신의 정을 끊어내고 하나님을 쫓을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미디안을 두려워하며 몰래 숨어서 곡식을 떨고 있던 기드온을 부리신 것도, 약혼을 하고 결혼을 앞둔 동정녀 마리아를 선택하시고 예수님을 잉태하게 하신 것도 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그 자체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신뢰하신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엘리사는 생계의 수단을 다 정리하였습니다

(왕상19:21)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

엘리야의 부르심을 받은 엘리사는 평생토록 자신과 함께 밭을 갈고 일을 하며 수고해 주었던 그 소중하고도 정들었던 소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농사짓는데 필수적으로 필요하였던 소의 모든 기구들을 불살랐습니다. 이는 육신의 삶을 위한 모든 것을 청산하는 놀라운 결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육신적인 삶과 영적인 삶을 동시에 누리려고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소를 잡고 모든 농기구를 태워 두 번 다시 육신의 삶을 위해 되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단을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깊은 도전을 받고 또한 마음을 결단하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두 개를 두고 어느 것을 선택하여야 할는지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왕상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기 직전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할 때 외친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는데 그 앞에서 엘리사가 만약 머뭇거리고 있었다면 엘리야는 두 말 하지 아니하고 엘리사를 버리고 떠났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부모님과 입 맞추고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요청하였을 때에도 엘리야의 반응은 매우 냉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왕상19:20)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 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은 구걸하여 맡는 것도 아니고 또한 맡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생색을 내거나 억지로 하거나 핑계를 대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엘리사는 육신적인 삶을 깨끗이 청산하고 아무런 미련도 없이 엘리야를 쫓아가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기약 없이 엘리야를 쫓으며 수종들었습니다

(왕상19:21)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

엘리야는 엘리사를 부를 때 그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나를 따르게 되면 너의 삶은 내가 혹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다. 네 부모는 어떻게 될 것이다. 네 미래는 또한 어떻게 될 것이다.”는 등의 단 하나도 일러 준 것이 없습니다. 이처럼 막연하고 불투명한 미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물어보지도 않았고 염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믿고 쫓아갔던 것입니다. 그것도 엘리야를 수종드는 종으로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자는 고 안이숙 여사와 같이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를 노래하며 내일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동일하였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그 어떤 것도 보장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보다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 복을 누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처음으로 그들을 내어보내실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대신 주셨던 것입니다.

(10:9-15)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의 종의 가는 길을 섬기고 받들 인물들을 하나님께서 곳곳에 준비해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접하지 않거든 발에 묻은 먼지까지라도 털어버려 그 집이 복을 받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은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주의 종이 여러분 곁에 있거든 무조건 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인정하시고 섬기라고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섬기면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나그네를 대접하고 이삭을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도록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도 아무런 대책이 없었지만 그는 육신적인 삶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당당하게 엘리야를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훗날 우리들이 익히 잘 아는 바와 같이 엘리사는 가는 곳 마다 하나님께서 섬길 자를 구별하여 두셨고 엘리사는 원 없이 스승이었던 엘리야보다 더 크고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동행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 말고 엘리사처럼 많은 이적과 기적을 베풀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을 정도로 하나님은 엘리사를 귀하게 들어 쓰셨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제2의 인생을 이렇게 출발하여 성경에서 가장 위대하게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기적 같은 삶을 평생토록 누렸던 인물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때 엘리사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엘리야를 쫓아가지 않았다면 그는 육신적인 삶으로 만족하다가 이름 없이 사라진 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도 깊은 고민과 결단을 해야만 합니다.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는지, 어떻게 육신적인 삶보다 신령한 영적인 삶을 더 추구할 수 있겠는지를 말입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어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몸이라면 무엇인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들에게 유익이 되는 그런 멋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또 다시 신선한 봄이 오고 있습니다. 추위와 고통 속에 짓눌려 있던 만물이 기지개를 켜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일어나고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생들은 과연 어떻게 이 봄을 맞이하고 어떻게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는지, 깊은 생각과 결단으로 이 아름다운 봄에 기적 같은 축복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아멘, 할렐루야!

Add comment


Security code
Refre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