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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려고! (2023년 3월 26일 주일낮설교)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려고!

3. 26, 2023

:야 53 : 1  -  6

說敎:崔仁 牧師

 

1888년 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다이나마이트를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이나마이트를 제조한 다음에 일약 명사가 되었고 엄청난 돈을 벌고 사람들의 관심과 촉망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언제나 하던 버릇처럼 신문을 펴서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곳에는 자기가 죽었다는 기사가 대서특필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신문 기사의 보도는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이 죽다." 이 기사를 읽은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은 자기 동생이 죽었는데, 기자들이 혼돈하여 자기가 죽은 것으로 보도를 헀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망 기사 앞에서 그는 깊은 고뇌와 말할 수 없는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을 만들어서 재물을 얻었고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탄을 만든 제조업자가 드디어 죽었다."고 보도된 신문을 찢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다행히도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훗날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이 만든 노벨평화상이었습니다. 그 이후 매년 세계와 이웃의 평화를 위해 헌신한 사람을 선택하고 100만 불의 상금을 지급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이 되었고 지금에 이르기 까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빛의 자녀들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과 이웃들에게 평안을 주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들의 평안을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기리는 고난주일을 한 주 앞둔 이 시점에 이와 같은 생산적인 사고의 변화를 만들어 귀하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들을 화목케 하시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것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고 말입니다. 우리를 낫게 하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평화를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 그 정결하신 몸과 살을 찢으시고 보혈을 흘려주셨던 예수님의 사랑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이와 같은 아름다운 희생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그 길을 쫓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본래 죄의 형벌로 고통을 받아야 할 존재였습니다

(7:18-24)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속죄를 깨닫기 전에 탄식하며 기록한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죄인이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면 누구나 동일하게 고백하게 되는 사실상의 진리 같은 내용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비참한 죄의 현실을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의 보혈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처럼 자신이 곤곤한 사람이요 죄악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의 속죄의 축복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씻음 받기 전에는 이렇게 다 허망한 죄인이었고 그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였던 모세도 다음과 같이 인생의 허망함을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의 처량한 모습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들을 친히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와 악이 가득한 우리들에게는 진정한 평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없는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는 사망이라는 고통만 넘쳐나는 것입니다.

(32: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3:11)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악인입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다 악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진정한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죄 때문이요 이 죄는 또한 우리들을 엄청난 사랑과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5:10-1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한 순간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원수의 장막을 풀고 화목하여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예수님은 그토록 무서운 십자가를 스스로 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평안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이렇게 찔리고 상하셨다.”고 표현하셨습니다. 말은 이렇게도 간단한데 실상은 사람의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잔인한 인간들은 흠도 티도 없으신 예수님을 짐승에게도 할 수 없는 끔찍한 만행으로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양 손에 못을 박았고 양발에도 또한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 이처럼 못을 박아 매달아 놓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잔인한 악행인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어떻게 평강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이처럼 잔악하게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시고 못하실 일이 없으신 능력과 권세가 넘쳐나는데도 그토록 모진 고통과 죽임을 당하셔야만 했을까요? 그 해답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모진 고통을 당하신 것은 오직 하나, 죄로 말미암아 슬픔과 고통으로 죽어가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나음과 평안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그 어떤 방법으로도 태어날 때부터 안고 나온 죄악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길 외에는 소망이 없었으니 바로 예수님의 피였습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보혈이 없이는 그 누구도 죄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주시기 위해 이토록 놀라운 희생을 스스로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이와 같은 놀라운 사랑과 희생을 가슴으로 기억하며 신앙생활을 하여야만 합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은 신자는커녕 사람의 도리도 못다 하는 미련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단단히 경고하고 계십니다.

(고후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 말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인간은 연약하여 아무리 소중한 것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딤후1: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평안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1:21-23)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받는 것도 어렵지만 지키는 것은 더 어려운 법입니다. 우리들에게 평안을 주시려고 하나님은 그토록 희생하셨는데 오늘날 우리는 그 가치도 모른 체 스스로 잘나서 잘 살고 편안할 줄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최선을 다해 그 소중한 평안을 지키지 않으면 바람에 덧없이 날리는 티끌처럼 평안도 날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평안을 지키는 방안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1:22-23)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께서 살아나시고 믿음이 있어야 평안을 지키며 믿음이 있어야 그 평안이 하나님의 사랑인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말세이다 보니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이 없습니다. 이것이 특정한 어떤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예언하신 말씀이니 더욱 더 두려운 것입니다.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마지막 때에 사람들은 믿음보다는 세상적인 성공과 출세를 더 선호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인생이란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은 날마다가 천국이 되는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재산과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그래서 후손들에게 이에 관한 소중한 진리를 남겨두었습니다.

(2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나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25:24)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이렇게도 똑 같은 말씀을 잠언에서 두 번씩이나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의미가 너무나도 분명하고 평안에 대한 갈급함이 진하게 묻어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리라 솔로몬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평안의 소중함을 거듭 기록하여 두었습니다.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평안과 재물은 별개의 것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경험해 보고 겨우 조금 알게 되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근본을 아시므로 우리들에게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평안을 선물로 주셨던 것입니다.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진정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근심도 하지 않으며 평안만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 해답을 예수님은 의외로 간단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말입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근심도 물리치고 두려움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세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믿음에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신자들입니다. 그와 같은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재물이나 부귀영화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길 수 있게 되고 그 믿음으로 또한 삶에서 가장 소중한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소중한 믿음을 우리는 어떻게 간직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행히도 하나님은 그 방도를 자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도 귀한 말씀은 어디에서 들을 수가 있습니까? 바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들을 수 있습니다.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들의 피부가 햇빛을 받으면 비타민 D가 생겨납니다.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겨납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아름답게 소생하는 봄의 계절입니다. 우리 빌립보의 모든 성도들도 이 아름다운 축복의 계절에 믿음으로 평안을 지키며 이렇게도 소중한 구원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도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님께 무한한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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