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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사람인가? (2023년 4월 23일 주일낮설교)

나는 어떤 사람인가?

4. 23, 2023

:가복102 9 - 3 7

說敎: 牧師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이처럼 짧고 어려운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말을 했던 소크라테스 자신이나 오늘 우리 모두가 자신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였으면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하늘의 하나님을 심판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은 도무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 채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들에게 이에 관한 놀라운 진리 하나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6:8-14)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여기에서 특별히 밑줄 친 부분을 오늘 가슴에 새기기를 원합니다. 그 말씀은 오늘 우리들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는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이 누구인지를 천명하는 가장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처럼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들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밝혀졌다면 이제 거기에 합당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우리들이 이제 과연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그 해답을 오늘 본문에서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인간은 여러 종류였습니다

(10:30-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종류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서슴 없이 이웃에게 해를 가하는 날강도들과 졸지에 죽음에도 이를 수 있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의 일처럼 방관하는 유명한 지도자들과 그 지도자들이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친히 반문하셨습니다. 이 세 사람들 중에 즉, 위대한 종교지도자들인 레위인과 제사장 그리고 그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인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고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스스로 잘산다고 판단하는 사람들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잘사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야 비로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잘나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든지,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된다든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스스로 잘난 것은 될는지 몰라도 하늘의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렇게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 한 가지 질문을 하여야 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하고 말입니다. 나는 강도와 같이 남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인가? 아니면 연약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이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통을 당하며 사는 사람인지, 아니면 레위인과 제사장들과 같이 허울은 위대한 종교지도자이나 하나님으로부터는 외면을 당하는 표리부동한 사람인지, 아니면 욕을 먹으며 살고 있을지라도 이웃의 아픔을 지나치지 못하고 정성을 다해 도와주는 사마리아 사람인지, 겸허하게 하나님 앞에서 오늘 고민해 보는 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소중한 생명을 받고 죽어도 다시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갈 하나님의 구별된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지난 413일 밤 10시 쯤 켄자스에서 16살 먹은 소년이 쌍둥이 동생을 데려오라는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어떤 집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는데 주인이 나오더니 머리와 팔에 각각 총을 쏘아 총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미주리주에서 16세 흑인 소년이 총격을 당했다. 잘못된 주소를 받아 심부름을 가서 생긴 일이다.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경찰에 따르면 13일 오후 10시쯤 캔자스시티 주택가에서 총성이 울렸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현지 검찰은 17일 총을 쏴 부상을 입힌 84세 백인 남성을 1급 폭행죄와 무장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

16세 흑인 소년 랄프 얄은 부모님 부탁으로 쌍둥이 동생을 데리러 갔다. ‘노스이스트 115 스트리트노스이스트 115 테라스라는 주소가 혼선을 빚은 게 사건의 빌미가 됐다. 결과적으로 다른 집을 찾아간 얄은 초인종을 두 번 누른 후 총을 두 방 맞았다.

총격을 가한 앤드류 레스터는 얄의 머리와 팔에 각각 한 방씩 총을 쏜 것으로 알려졌다.](중앙일보 2023419일자에서 발췌)

과연 랄프는 총을 맞아야 할 엄청난 잘못을 저지는 것일까요? 전혀 아니지요.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단도직입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처럼 아주 작은 일에도 갑질을 하며 고통을 주는 가해자와 어이없이 총을 맞은 피해자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와 같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존은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에서도 지금 사회문제가 되고 있을 정도로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학교 폭력과 전세 사기 사건이 그렇습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못생겼다는 이유로,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다가 끝내는 자살을 하거나 심각한 우울증이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전세를 내주고 돈을 받은 다음 전세 기간이 만료 된 후에 돈을 내주지 않고 주거지를 팔아버림으로 한 순간에 전세를 떼이고 길거리로 쫓겨나는 피해자가 2,400세대에 이르고 그 피해액만 2천억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비관하여 20-30대가 3명이나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누군가는 고통을 주고 또 누군가는 고통을 당하여야만 하는 공정하지 못한 사회가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가해자입니까? 아니면 그와 같은 악랄한 가해자로 인하여 엄청나게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피해자입니까?

예수님께서도 수도 없는 악한 인간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예수님께서 이처럼 악한 자들로부터 시험을 당하던 중에 나온 말씀입니다. 그 내용을 잠시 본문으로 돌아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0:25-29)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던 율법사가 예수님께로 나와서 질문을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29절에는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예수님께 또 질문을 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던 자가 그 예수님께 옳게 보이려고 했다는 자체가 너무나도 우리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올무로 엮으려고 했던 인간이 그와 같은 예수님께 잘 보이면 무엇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 사악한 인간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허망한 인간의 부조리한 모습이요 현실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는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의 삶의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끊임 없이 이웃을 공격하고 전쟁하면서 스스로의 욕망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아무런 명분도 실리도 없는 전쟁으로 러시아의 푸틴이 그 아까운 젊은 생명들을 우크라이나에 보내어 죽게 하고 선량한 우크라이나의 백성들을 죽이고 있는 모습에서 이와 같은 현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바로 오늘 우리들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강도와 같은 악한 자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보듬고 강도 만난 자와 같은 불쌍한 이웃들을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보살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함께 마음과 사랑을 모아 이처럼 소중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가족들이 서로 총질하고 미워하고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하며 다투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수단에서는 내전이 일어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같은 민족끼리 총과 대포를 쏘아대며 며칠 사이에 400명이 주고 4천여 명의 부상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들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총과 대포는 우리나라의 선량한 백성들을 지켜내고 적을 방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이웃끼리 서로 죽이는데 사용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입으로는 제사장과 레위인들 처럼 이웃 사랑을 외치지만 정녕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있을 때는 피해서 도망가는 비겁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강력한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사랑에 빚진 성도들이니 우리들도 조건 없이 섬기고 도와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친히 명령하시기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10:36-37)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스스로 잘난 척하고 예수님까지도 시험하였던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셨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구별하신 이 세 사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가 원수지간이었고 특별히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인간으로조차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가고 남은 백성들이 이주해 온 이방인들과 혼혈이 되어 태어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함께 예배조차 드리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인사조차도 못하도록 법으로 정하여 극렬하게 무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심 산에서 별도로 산당을 짓고 예배드려야 하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야만 하였습니다.

(4: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는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는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여 지나갔던 것도 그들만의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19:16)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이운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19:20)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어떤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도 다 소중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일보다 그들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하나님의 중심에 있는 진실을 바로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12:10-13)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율법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못하게 금하고 있지만 이처럼 생명을 살리는 일은 그 안식일 법보다 앞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율법이나 말씀도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올바르게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법을 만드시고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한 어리석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제자장과 레위인은 강도를 만난 사람이 거의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들이 믿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못내 그 불쌍한 사람을 피하여 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인간으로도 보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 불쌍한 강도 만난 피해자를 도와주었습니다.

(10:33-35)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그 어떤 종교적인 이론과 성경적인 교리보다도 더 불쌍히 여기고 사랑을 베푸는 정성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반대로 제사장과 레이인과 같이 그들이 믿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이처럼 불쌍한 사람을 외면한다면 그들은 정작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율법주의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도 요한은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매우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정성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강조하시고 가르치시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명령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희생하고 도와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가르치시는 예수님 앞에서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라는 구별된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마리아인과 같이 상종할 수조차 없는 더럽고 부정하게 태어나고 살아가는 천박한 사람일지라도 죽어가는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 줄 알 때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을 가장 소중한 예수님의 제자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워싱턴주에서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라는 법이 있습니다. 불쌍한 이웃이 위기와 고통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도 외면하면 처벌을 받게 되는 법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가?”하고 말입니다. 나는 성경교리를 지키기 위해 죽어가는 사람도 외면하는 종교인인지,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강도인지, 비록 사회적으로는 욕을 먹으며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초라한 존재일지라도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소중한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까지도 고통당하는 이웃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사랑의 사람인지, 깊이 한 번 고민하며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천 번 만 번 죽어야 할 죄에서 해방 되었고 우리들을 그렇게 자유케 하시려고 살을 찢고 피를 흘려 희생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힘차게 소생하고 일어나는 아름다운 봄의 계절에 우리들의 영혼도 이처럼 새롭게 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그런 멋진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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